[화중광야스페셜 ㅡ 10월은 종교개혁의 달]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
(Luther As Reformer)

편역/ 정재선 목회자


◆루터의 서명이 기록된 문서 (제공/Sacred-Destinations)


본 글은 'Stephan Fussel, A Cultural-Historical Introduction, The Luther Bible of 1534'  (p.30-33)에서 인용, 편역한 것임.


'나는 한 농부의 아들이다. 나의 증조부, 나의 조부, 나의 부친은 농부들이셨다. 필립 멜란크돈이 말한 것 처럼, 나는 한 직공장, 한 청지기와 나라 안에 있는 무엇이든, 노동자들의 감독이 되어야만 했다. 그때 나의 부친은 만스펠트(Mansfeld)로 이사하셨고, 한 광부가 되셨다. 그곳이 바로 내가 난 곳이었다.' (Tischreden, No.6250). 이 간략한 자서전적 이야기가 투링기아(Thuringia) 동광산(銅鑛山)으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이 '사회적 사다리'(social ladder)를 오르게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태어난 지 1년이 지난 1483년 11월 10일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그의 부모 한스와 마가데 루더(Hans and Margaethe Luder)는 만스펠트로 이사하였다. 그곳에서 그의 부친은 한 광산 안에 일자리를 얻었다. 이 직업상 변화가 루터 가족의 경제적 및 사회적 입신(향상)을 가져다 주었다. 그의 부친은 광석의 제련 총책임자로 승진하였고, 동제련 관리자로서, 그는 만스펠트 마을운영회의 회원으로 선출되어, 시행정 앞에서 시민들의 권리를 대변하기에 이르렀다.

마틴은 먼저 만스펠트 안에서 라틴어 문법학교에 입학하였다. 1496년에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에 있는 성당학교(cathedral school), 1498년부터 아이제나흐(Eisenach)에 있는 성도 조지(St George) 교구학교에 다녔다. 1501년 여름학기에 에어푸르트대학교(University of Erfurt)에 있는 인문학부에 입학하였고, 1502년 9월 29일에 학사(bachelor/baccalaureus artium) 학위를 받았다. 1505년 1월에 그는 석사학위를 받았다. 에어프르트대학에서 계속 이어진 그의 법학 연구의 1학기 중에, 그는 과감하게 직업계획을 바꾸었고, 1505년에 에어푸르트에 소재한 '성도 아우구스티네'(St Augustine)라고 하는 은둔자 단체에 들어갔다. 이는 그가 번개를 맞아 놀랐을 때, 치명적인 위기 앞에서 서원하였던 것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1507년 4월 3일, 사제로 임직을 받은 후부터, 루터는 에어푸르트대학교에서 신학을 수강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그는 아리토레스와 오캄의 윌리암(William of Ockham/1285-1349)과 튀빙겐대학교 교수 가브리엘 비엘(Gabriel Biel/약1410-1495)의 스콜라 철학과 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후에 그는 그들의 '요한계시록'의 교리와, 그들의 영적, 지적의 엄격한 분리와, '자연인'의 가용력(可容力)에 대한 이론을 맹렬히 공격하였다.

1508년 10월에,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약1469-1524) 아우구스티네團의 주교 총대리가 루터를 비텐베르크(Wittenberg)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 이듬해에 새로이 설립된 대학교에서 도덕 철학을 강의토록 해주었다. 루터는 피터 롬바드(Peter Lombard/약1095-1160)에 관해 강의하였다. 1510-11년에 그는 다른 아우구스티네團 사이에 벌어진 한 논쟁을 수습하러 로마로 파송되었다. 훗날, 그의 '로마 체험'에서 얻은 인습은,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재임 1503-1513) 하의 로마교회(바티칸)와의 對立이 교황권의 세속 권력을 반대하는 기초가 되었다. 교황 율리우스 2세는 1506년에 '성도 베드로성당'(St Peter's CathedraL)의 재건축을 위한 기금이 필요했고, 그는 '면죄부'(Indulgence)를 발매하려 하였다.

 

 

◆루터의 '솔터'(시편가) 속페이지(1780년 발행). (독일/Bibelarchiv-Vegelahn 제공)

1512년 12월에, 루터는 안드레아스 본데스타인 폰 칼쉬타트(Andreas Bodenstein von Karlstadt/약1477-1541)의 후원으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는 그의 영적인 스승인 요한네스 폰 스타우피츠(Johannes von Staupitz)에 의해 성경주석 교수로 임명되었다. 스타우피츠는 루터를 '성도 아우구스티네團'의 정신과 훗날의 중세 말기에 일어났던 유럽 중세 말기에 일어났던 신앙쇄신운동인 '데보티오 모데르나'(Devotio Moderna)의 핵심인물로 만들었다. 성경주석의 교수로서, 루터는 수 년간 <시편>(1513-1515)과 사도 바울의 <로마서>(1515-1516) 풀이에 전념하였다. 죄와 은혜에 대한 바울 교리가 성경 본문만을 엄격하게 따르는 그의 성경 연구에 중핵(中核)을 이루었다. 그는 강의용으로 <벌게이트역본>을 재인쇄하였고, 여백을 충분히 두어서 그의 학생들이 그의 풀이를 충분히 기록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루터가 손수 친필로 기록한 <솔터>(Psalter/詩篇歌/German Psalter (1531/Der Psalter des Konigs und Propheten Davids/Der Psalter deutsch. Martinus Luther. Wittemberg, 1524)의 필사본이 오늘날 볼펜뷔텔(Wolfenbuttel) 소재 '헤르초크 아우구스트 비블리오테크'(Herzog August Bibliothek) 안에 소장되어 있다. (오른쪽 이미지).

루터의 새로운 신학적 접근은 하나님의 의(義)에 관한 그의 평가와 인간의 칭의(稱義)에 관한 그의 이론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의(義)는 더 이상 심판의 하나가 아니라 믿는 자에 의해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하나의 선물임을 가르쳤다. 따라서 그는 학문적 신학에 도전하였을 뿐 아니라, 당대에 종교적 실행에도 도전하였던 것이다. 학문적 신학으로 제안한 '행위들에 의한 칭의'(justification by works)에 대한 자신의 공격을 예상하면서 발표한,
그의 첫 번째 독일어 저술 'Die Sieben Busspsalmen'(7가지 참회 시편가/The Seven Penitential Psalms 1519)은 회개와 심판에 관하여 초점을 두었다. 이 주장은 1517년 9월에 발표한 그의 'Disputatio contra scholasticam theologiam'에서 위기에 처하게 된다. 여기에서 그는 당대의 전형적인 죄를 비하하는 것과, 모든 '자연적' 인간은 자신의 자유 의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이론으로 공격한다. 그는 인간의 극단적인 죄성(罪性)과 구원에 대한 은혜의 필요성을 거리낌없이 말해 버린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루터에 의하면, 구원은 누구든지 살 수 있다는 안전이라고 하는 거짓 감각 속으로 사람들을 가라앉혀 온 로마교회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격렬한 정죄에 대한 하나의 작은 단계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루터에 의하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것 만이 하나님의 은혜에 동참하게 되는 유일한 길이었다. 마인쯔(Mainz)의 대주교, 곧 면죄부를 설파한 책임자인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흐트'(Albrecht of Brandenburg)에게 보내지고, 종교개혁을 유발시킨 그의 유명한 1517년 10월 31일의 95개 논박에서, 루터는 면죄부가 유도한 거짓되고 치명적인 안전성을 개탄하였다(논박 31, 9, 52). 이것은 지고의 가치로 간주되는 사랑과 기도의 행위들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박 41, 74).

루터는 이 때까지만 해도 자신의 집에서 부르는 이름 '루더'(Luder)를 사용했는데, 알브레흐트 대주교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처음으로 자신의 성(姓) '루터'(Luther)를 사용한다. 1517-1519년 사이에는 헬라어-라틴어 합성어 '엘레우데리우스'(Eleutherius/자유)라는 이름을 사용하기도 하였기 때문에, 베른트 묄러(Bernd Moeller)와 칼 스타크만(Karl Stackmann)은 루터가 자신의 이름을 어원적으로 '루더'와 연결시켜, 자신의 개성에다 크리스천의 자유로 변형시킨 것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것은 루터가 1517년 11월 11일에 그의 에어푸르트(Erfurt) 친구 요한 랑(Johann Lang)에게 쓴 한 서신 속에서 입증되었다. 그는 'F(rater) Martinus Eleutherius, imo dulos et captivus mimis, Augustinianus Wittenbergenesis' 즉 'brother Martin the Free [through God], or rather a vassal and prisoner [of God], Augustinian in Wittenberg' (하나님을 통한 자유인 형제 마르틴 및 하나님의 종이요 매인자인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틴)이라고 서명하였으니,
이는 1520년에 펴낸 자유에 관한 그의 논문, 'Von der Freyheyteyniss Christenmenschen(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Of the Freedom of a Christian Man)에서의 기본적인 생각을 예견한 것이었다: 'A Christian man is the most free lord of all, and subject to none, a Christian man is the most dutiful servant of all, and subject to every one.'(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주인이요 누구에게나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충성된 종이요, 모든 사람에게 종속된다.) 성도 바울(고린도전서 9:19)과 일치되는 이 모순적인 생각은 모든 인간의 '이중 본능'(twofold nature)을 감안하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속'(inward) 사람은 '겉'(outward) 혹은 세속적인 것이 필요치 않다: '그 복음, 곧 오로지 하나님의 그 말씀', '믿음 만이 당신을 경건하게, 자유롭게, 그리고 복을 받게 만든다.' 그대신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다는 어떠한 개념/생각으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몸이 영에게 복종될 수 있는 목적을 가지고서', '겉' 곧 육적인(bodily) 사람은 선행들을 해야 한다. 루터가 신봉하고 1517년 초기처럼 자신의 이름을 바꿈으로 지지를 받았던 자유의 개념은 그의 자신의 신학적인 논쟁에서 취하였던 그 전환/목적을 그가 잘 알고 있었음을 이같이 나타내준다.

그의 95개 반박문(라틴어로 기록)은 루터의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게 신속하게 퍼져나갔다. 보다 많은 군중에게 공식적으로 전해지도록, 그는 1518년 3월에 'Sermon von Ablass und Gnade/Sermon of Indulgence and Grace'(면죄부와 은혜에 관한 설교)를 발행하였는데, 2년 만에 25회 재인쇄될 만큼 대담한 주장을 충족시켜 준 작품이었다. 자신의 죄들을 회개한 '참다운 그리스도인들'(True Christians)은 마땅히 '만족의 일들'(works of satisfaction)을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게으르고 불완전한 그리스도인들'(lazy and imperfect Christians)에게 야기되는 면죄부 행위와 대조시킴으로써서, 루터는 흥미를 끄는 실행을 선언하였다. 그의 반박문으로 인하여 그를 이단이라 부르게 될 자들은, '성경에 전혀 간섭해보지도 못하였고, 그리스도인 교사들의 글을 전혀 읽어보지도 못하였고, 그들 자신의 가르침을 전혀 깨닫지도 못하였고, 오로지 그들 자신의 난해하고 논리성이 빈약한 의견들을 부패시키는 어두운 두뇌들이었다...'(dark brains that had never put their noses into the Bible, never read the Christian teachers, never understood their own teachers but putrefy in their own riddled and rotten opinoons...)


◆루터가 살았던 16세기의 비텐베르크의 전경. (Arthur Cushman McGiffert, Martin Luther: The Man And His Works, New York: The Century Co., 1911, p.64)


2개월이 지나서야, 로마는 루터를 대적하기 시작하였다. '아우그스부르크 회의'(The Diet of Augsburg)에서 교황 특사 카제탄(Legate Cajetan/1469-1534) 추기경이 교황 레오 10세(Leo X, 교황직 1513-1521)를 대신하여 루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루터는 철회하지 않았다. 12월에 그의 후원자인 '삭소니의 선거제후'(Elector of Saxony) '현자 프레데릭'(Frederick the Wise)은 루터를 로마로 송환시켜 자기 지방으로부터 추방시키기를 거절하였다.
<화중광야/마틴 루터의 시대와 생애/자세히보기>. 대화, 강의와 설교들이 끊임없이 지속되었으며, 1519년에는 신학교수 잉골스타트의 요한 에크(Johann Eck of Ingolstadt)와, 칼스타트의 안드레아스(Andreas of Karlstadt)와 루터 자신 간에 '라이프찌히의 논쟁'(Dispute of Leipzig)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루터는 자신의 '칭의론'를 주장하였고, 교회 직분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교회 공의회들'(Church Councils) 까지도 과오가 될 수 있음을 결론으로 내리면서, 성경기록에 관한 어떠한 로마교회의 권위도 거절해 나갔다. 1520년 6월 15일자의 교황칙서 'Exsurge Domine'에서, 교황 레오 10세는 루터에게 60일 안으로 그의 주장을 철회할 것과, 그렇지 않으면 그를 파면시킬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그의 '주요 종교개혁 주장들'을 계속 발표하였다: 'An den Christlichen Adel teutscher nation...'(그리스도인 유산의 종교개혁과 관련된 독일민족의 그리스도인의 고귀함에 관하여/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respecting the Reformation of the Christian Estate)(속페이지/하단 왼쪽 이미지); 'De captivitate babylonica ecclesiae'(교회의 바빌론 사로잡힘/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속페이지/하단 오른쪽 이미지)와 'Of the Freedom of a Christian Man'(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하여). 이 논문만이 2년 내 독일어, 네델란드어, 영어, 스페인어, 체코어 그리고 라틴어로 36쇄나 발행되었다.


 

◆Henry Eyster Jacob, Martin Luther: The Hero Of The Reformation(1483-1546), New York: G. P. Putman's Sons, 1898, p.143,161.


이러한 저술들은 퀼른과 마인쯔 안에서 교황의 사절 기로라모 알레안드로(Girolamo Aleandro/1480-1542)에 의한 불꽃들을 일으켰다. 그러나 루터는 비텐베르크 안에서 12월에 교회법(Canon Law)과 함께 1차 교황 칙서를 불태워 버렸다. 1521년 1월 3일, 교황 레오 10세는 정식적으로 루터 파면 칙서(Decet Romanum pontificem)를 발표하였다. 1521년 4월에, 루터는 황제 찰스 5세(Charles V/1500-1558)와 '봄스의회'(Diet of Worms)에서 답변해야만 했다. 그곳까지 루터의 여행은 하나의 승리의 입성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봄스칙령'(Edict of Worms)은 루터에게 그의 저술에 대한 인쇄 및 배포를 엄격히 금지시켰다.
삭소니의 제후 프레데릭의 보호를 받으면서, 그는 1521년 5월부터 1522년 3월까지, 바르트부르크 성 안에서 'Junker Jorg'(게오르게 경/Sir George)으로 신분을 감출 수 있었다. 이 기간 중에 그는 몇 편의 설교와 저술을 하였고, 성경을 번역하였다: 'Magnificat verdeutscht und ausgelegt(마리아의 찬사/누가복음 1:46-55의 독일어 번역 및 풀이); 헬라원어로부터 신약성경 독일어 번역(1521년 12월-1522년 2월까지 11주가 걸렸다.).


<Created/20090928> <Updated/200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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