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광야 복음선교문서 컬렉션 5-2]

'이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해 오셨고,
우리에게 은혜를 통하여 영존하는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셨던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가 너희 마음들을 위로하시고,
너희를 모든 선한 말씀과 일 안에 세우시니라.'
(데살로니카후서 2:16-17 / KJV화중광야역)

 

속사람 : 하나님의 그 뜻은 이렇게 알 수 있다
How You Can Know The Will of God


글/ 목회자 케네스 헤이긴  번역/ 정재선


 


1. 속사람: 당신의 본체(眞我)

2. 속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3. 환상들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4.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언의 은사





2. 속사람을 통한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장에서 언급한 속사람은 한 '음성'(voice)을 소유하고 있으니, 이른바 양심, 직관, 내적 인도 및 내적 증언이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과연 양심이란 것이 한 안전한 길잡이(a safe guide)인지에 대해 많은 토론이 있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영이 하나님의 생명과 본성이 함께 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당신의 양심은 안전한 길잡이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양심은 당신의 영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당신을 인도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물론 결코 거듭나지 아니한 사람은 자기 영의 음성을 따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의 영은 다시 소생할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의 양심이 허락함으로 그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 속에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이 있게 되면, 당신은 무슨 일을 함에 있어, 당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거듭난 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님이 당신의 영 안에 살아 거주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 분은 직접 당신의 마음과는 직접 교제하지 아니하십니다. 그 분은 당신의 마음 속에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그 분은 당신의 영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은 당신의 영을 통하여 당신과 교제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도(나의 아버지와 나) 그에게(성령님에게) 와서, 그와 (성령님과) 함께 살리라. (요한복음 14:23)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그 전인 것과 하나님의 영이 너희 가운데 살고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린도전서 3:16). 다시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두 번째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 가운데 거주할 것이며, 그들 가운데 거닐 것이며,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될 것이다.'(고린도후서 6:16). 따라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주하고 계신다면, 그것은 곧 그 분이 우리에게 전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악행을 저지른다면, 당신을 책망하는 것은 성령님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영인 것입니다. 성령님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령님이 이 세상을 정죄함은 예수님을 거부하는 죄일 경우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죄를 범하는 바로 그 순간을 깨닫는 것은 당신 자신의 영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침을 받고 새로이 태어난지, 곧바로 고등학교 재학중 이었을 때, 친구 하나가 나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였지만, 그들이 나를 해코지 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의 저주스런 몇 마디를 나에게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나는 그 말 가운데 한 마디는 알아차렸습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질문을 해 왔을 때, '그건 네가 참견할 일이 아니야.'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나의 속 안에서는 내가 잘못했음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바로 그 순간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빌었습니다. 나는 친구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 용서해줘라.' 그는 나의 대답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말하지 않아야 된다는 그 방법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의 죄책감을 느끼게 한 것은 성령님이 아니라 나의 영이었습니다. 나의 영은 그 속에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양심을 조명하는 몇 가지 실례를 보여주고 있는데, 즉 그는 항상 자기의 양심을 따른다고 고백한 사실입니다. <로마서 8:16>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성령님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하시니라.' 그가 고백하고 있는 이 증언은 '육체적인 것'(a physical something)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육체들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감정은 몸의 음성입니다.

이성은 혼 혹은 마음의 음성입니다.

양심은 영의 음성입니다.

만일 우리가 감정들에 의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고통을 겪게됨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나의 음성을 들어주시면 좋겠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든 아니든 차이는 없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뜻한다면, 그것은 진실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당신의 기도 소리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하면, 그것은 진실입니다. 말씀 위에다 당신의 신앙을 놓으시길 바랍니다. 당신의 감정들 위에다 놓으면 안됩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몸들이나 혹은 우리의 감정들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증거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니라.'(로마서 8:16)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말씀과 성령님은 하나입니다. 성령님이 이 말씀을 취하여 당신의 마음에다 증거하게 되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진리의 그 영이 오시면...그 분이 내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시리라.'(요한복음 16: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가(성령님이) 너희에게 모든 것들을 가르치시고,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14:26). 그 분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너희에게 다가오는 일들을 보이시리라.'(요한복음 16:13). 성령님은 당신의 영과 함께 증거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그 분은 당신을 인도하십니다. <로마서8:14>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자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우리가 말할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을 비롯하여 성경 곳곳에는, 때로는 한 환상(a vision)을 통해서 인도받는 사람도 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그에게 나타나서 어떤 일을 미리 알려주는 식으로 인도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들으려 하지 않고서, 그러한 환상 같은 특별한 방법으로 인도받기를 원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이적이 그들의 일생에서 매번 일어나는 현상은 아닌 것입니다. 일생동안 1~2회 정도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번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증언하시려고, 인도하시려고 하는데도,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한 환상이나 한 천사와 같이 극적인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려고, 소위 주님 앞에서 '양털'(fleece)이라는 것을 깎는 사람들도 있습 니다.

1941년에 나도 한 때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나도 한 양털을 깎아 냈습니다. 나의 양털 깎기를 실천한 사람입니다. 양털을 깎아낸 것입니다! 그 사건이 나를 치유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양털로 인도받음이 많은 자 그들은 하나님이 아들들이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물론 사사 기드온이 양털을 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드온이 살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살던 그 언약 아래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보다 더 좋은 약속 들 위에 세워진 한 새로운 언약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속 어느 곳을 보더라도 베드로, 바울, 그 밖의 사도들이 주님 앞에서 양털을 깎아내도록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이 실행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감각의 세상 속에서, 즉 사탄이 신(神)인 이 곳에서 우리는 양털을 깎아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4:4). 내가 전에 텍사스의 한 교회에 목회직을 찾고 있었을 때, 나는 주님 앞에서 양털을 깎은 적이 있습니다. 그 교회의 회중이 100퍼센트 나를 새 목사로 부임하길 원한다면, 나는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허락했습니다. 결과는 100퍼센트 찬성을 얻어 그 목회직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말한 대로, 나는 양털을 깎았습니다! 그 때는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불행한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설교할 모든 기름부음을 잃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에, 나의 뼈 속에 하나의 불꽃이 있는 것 같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예배드리러 교회 문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내게 찬물 한 양동이를 쏟아부은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그 뜻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나는 그 분이 허용하는 뜻 안에 있을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허용하는 뜻 안에 있게 되면, 매사가 올바르게 되질 않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양말을 신은 채 발을 씻는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교회를 맡는데 있어서 일찍이 없었던 실수였습니다.

다른 교회들로 부임할 때, 한 양털을 깎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나는 100퍼센트의 인정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속의 증언'으로 말미암아, 그 '속의 음성'으로 인하여, 나의 속에 의지함으로써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으며, 그리고 그렇게 행하였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은 스스로 책임을 지길 원치 않습니다. 그렇지만 책임이 있는 곳이 바로 그들입니다. 차라리 그 책임을 주님께 맡기고, 이렇게 말하는 편이 훨씬 쉬울 것입니다: '주님, 제가 그렇게 하길 당신이 원하시면, 문을 열어 주소서. 만일 그렇지 않으면, 문을 닫아 주소서.' 당신의 '속에 의지하여' 나타나는 응답을 알 때까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보다 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쉬운 것입니다.

때로는 이 '내적 증언'을 듣기까지는 기다리는 시간이 걸립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는 너무 바쁘다 보니까, 영적인 일들이 우리를 모호하게 만듭니다. 마음을 가지고 침묵을 지키는 것 보다는 육체를 가지고 침묵을 지킴이 더 쉬울 것입니다. 손과 발을 가지고 능히 할 수 있는 것처럼 마음을 가지고 잡음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때로는 잠을 자려고 할 때 육체는 축 늘어져 있는 데도, 마음은 여전히 시끄러운 때가 있습니다. 그 날의 활동들, 생각들, 계획들 혹은 앞날에 대한 근심들과 걱정들로 마음이 맴돌기 때문입니다.

방언들로 기도하면 큰 유익임을 한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내가 알지 못하는 한 언어로 기도 하면, 내 영은 기도하는 것이지만,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지 못함이다'(고린도전서 14:14). 기도하는 동안에, 당신의 마음이 다른 일들로 인하여 방황한 적이 있었습니까? 나도 마음의 평정을 갖기 위해서 1시간이 걸린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른 언어들(방언들)로 기도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임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이 방언들로 기도할 때, 당신의 마음은 평온해집니다. 마음이 평온해지면, 당신 자신의 영과 영적 일들을 더욱 깨닫게 됩니다. 다른 방언들로 기도하고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한 영(a Spirit)이시고, 영들의 그 아버지(the Father of spirits)이신 하나님과 당신의 영이 직접 교제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활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의 기도 언어가, 당신의 머리가 아니라 당신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영들을 훈련(단련)시킬 수 있다면, 모든 삶의 곳곳, 심지어 사소한 것 까지도 행함을 결정하는데 '그래' 혹은 '아니야'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으로 정신적 세계와 물질의 세계에다 전 생애를 소요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가슴을 지출하여서 우리의 머리를 개발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 왔습니다. 우리의 지능을 소유하는 지식은 우리의 삶 속에서 왕의 자리를 차지해왔고, 우리를 인도해야 할 우리의 영은 감옥 속에 갇혀있는, 말하자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내적 증인'(inward witness=속사람)은 우리의 마음을 인도하는데 갈구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내적 증인'을 귀담아 들었더라면, 우리가 결코 해내지 못했을 일들이 수 없이 많음을 우리 모두는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업에다 돈을 투자하지 않았더라면 돈을 잃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해봅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 사업의 동역자로서 뽑지 말아야 했다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동역자란 단순히 결혼 상대자가 아니라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일정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내적 증인'에 귀를 기울였더라면, 우리는 결코 일정한 사람들과 사업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말입니다. 이 '내적 증인'을 정의하기란 아주 간단합니다: 당신이 어떤 일정한 선(a certain line)을 따라서 기도하면서 해야 할 일을 숙고하고 있는데, 만일 당신의 영 안에 하나의 걸림(a check), 즉 그 일을 하지 말라고 알려 주는 '속에 의지하는 것'(something on the inside)이 나타난다면, 바로 그것이 '내적 증인'입니다.

때로는 당신이 그것을 깨닫기 위해 마음의 고요를 얻는데는 시간이 좀 걸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전에 누가 내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어떤 일을 하도록 알려 주는 것이 내 자신의 영인지 아니면 성령님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나는 성경 기록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람의 영은 주님의 그 등불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을 쓰시려고 하신 말씀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하길 바라고 있는 것은 단순히 나일 수 있습니다.'  '그 일을 하길 바라고 있는 자가, 당신의 살(몸), 즉 겉사람인지 아니면 속사람인지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만일 그것이 속사람일 경우, 그건 맞습니다. 속사람이 새로이 태어나서 하나의 새로운 창조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것들은 사라졌고, 보라,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었도다.' 속사람이 자기 속에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성령님으로 채워졌다면, 속사람이 성령님을 모시어 당신 속에 거처를 정하신 것입니다.

그른 일을 행하길 원하는 자는, 한 그리스도인의 속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겉사람입니다. <요한의 서신>에서 사도 요한은 이 속사람 속에 거주하고 있는 하나님의 그 씨와, 속사람은 죄를 지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에게서 난 자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분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살아있음이요, 그가 죄를 지을 수 없음은, 그가 하나님에게서 났음이다.'(요한일서 3:9). 바로 이 속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본성과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인간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때문에, 그들의 본성을 물려받습니다. 그래서 흔히 사람들은, '그는 자기 아버지를 꼭 닮았어.' 혹은 '그 여잔 꼭 자기 어머니를 닮았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 그 분의 본성을 물려받습니다. '너희로 하여금 이 약속들을 통해서 정욕으로 인하여 그 세상에 있게 된 썩어짐을 피한 후에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베드로후서 1:4).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태어난다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다시 난 것은 썩어질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곧 살아 계시고 영원토록 지속되는 하나님의 그 말씀을 통해서 난 것이 다.'(베드로전서 1:23) 우리는 하나님의 그 말씀으로 태어납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먹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릇된 행위를 저지르고자 하는 하나의 욕심은 그의 영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그것은 곧 겉사람이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내적 증인'에 대한 하나의 성경적 예시로서, 우리는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이 로마행 배 위에서 겪은 이야기를 읽게 됩니다: '이제 여러 날이 지났고 단식하는 절기도 이미 지나 항해하기가 위태로워진지라, 바울이 그 사람들에게 권고하여, 말하기를, '여러분, 내가 보기에는 이번 항해에 화물과 배 뿐만 아니라, 우리 목숨에도 상당한 손실과 피해가 있으리라'고 하나'(9,10절).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되'라고 바울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이 바울에게 말했다고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내가 보기에는'(I perceive)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진짜 '나'(I)는 누구입니까? 그것은 바로 속에 있는 사람, 곧 영의 사람(the spirit-man)입니다. 바울은 정신적으로 그것을 본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을 육체적으로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영 안에 그는 이 증인을 소유한 것이었습니다.

 <화중광야 주제곡2>'르빠우오/바울의 배/유리바다'와 직결!!

1.바울의 로마순교여행 (click)

2. 동영상보기 (작업중)


몇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한 가족이 외식중이었는데, 그들은 갑자기 집으로 달려갈 필요를 느낀 것입니다. 그들은 곧장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서둘렀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위급 사태가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사태를 해결해 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했듯이, 그들은 그들의 영들 속에 이미 그 사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본 것을 단순히 말한 사실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항해의 일행에게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들을 위협하진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서야 그들은 바울의 말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 입니다. 나의 회중 가운데는 목회자인 나의 말을 듣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나중에는 후회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사람들로 일을 하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말을 듣지 아니하면 강제적으로 위협하면서,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른 영(the wrong spirit)을 소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의 영 안에서 이용되어야 할 것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 은사들(the spirit gifts)은 사랑과는 별개적으로 사용될 수 있으며, 비록 그 은사들이 일부 사람들에게만 복받음(blessing)을 가져다 준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반드시 효율적인 것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은사를 받았을 때, 그 일부 사람들이 사랑 안에서 그것을 베푼다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가져다 준다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27:20-21>을 읽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들이 보이지 않고, 적지 않은 풍랑이 우리를 몰아치니, 구조될 소망이 모두 사라지니라. 여러 날을 먹지 못한 뒤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로 나가서서, 말하기를, '여러분, 여러분이 내 말을 귀담아 듣고....' '  이 말씀은 진정 대단한 하나의 선포였습니다. 바울이 '당신들이 내 말을 들었어야 돼'라고 말한 사실을 주목합시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보기에는'이라고 말한 것 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내 말을 귀담아 듣고, 크레테를 떠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이와 같은 타격과 손실을 입지 아니하였으리라.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하는 것은 기운을 내라는 것이라. 이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 누구의 목숨도 잃지 않을 것이라...그러므로 여러분, 기운을 내라. 나는 하나님을 믿나니,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이라.'(21,22,25절). 바울은 위기를 내다 보았습니다. 만일 항해의 일행이 그의 말을 들었더라면, 그들은 배의 파손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물건(상품)과 배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나는 하나님을 믿으므로' 목숨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었고,그래서 모든 사람의 목숨이 구해진 것임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인도받음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안티옥 안에 있는 교회에는 몇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그들이 주님을 섬기며 단식하고 있을 때, 성령님이 말씀하시기를...'(사도행전 13:1-2). 어떤 상황에서 성령님이 말씀하신가를 주목하기 바랍니다: '그들이 주님을 섬기며 단식하고 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한, 그와 같은 섬김을 우리는 소유하지 못합니다. 대개 설교자는 주님이 아니라 사람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해서 대부분의 우리의 교회의 예배들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티옥의 교인들은 주님을 섬겼습니다. 바로 그러한 분위기가 되었을 때, 성령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곳에서 오늘날 우리가 예배를 드림이 좋을 것입니다. 성령님도 소위 '내적 음성'(inward voice)이란 것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성령님이 당신 속에서 말씀하실 때, 그것은 내적 증인(inward witness)보다 약간 더 강권적일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음성이 전하실 때, 그것은 여전히 내적 음성인데, 너무 현실적이다 보면 누가 말했는지 주위를 살펴보는 예가 있습니다. 나도 기도하는 도중에 성령님이 내게 말씀하심을 체험하는 때가 가끔 있습니다.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말하는 줄 알고 뒤를 돌아보곤 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서는 내 등뒤에 아무도 없음을 알고 있지만, 너무 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 주변의 누구에게나 들릴 수 없을지라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성령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실에 있어서 우리는 육체의 귀를 가지고서는 성령님의 음성을 듣지는 못합니다.

구약성경에 어린 소년 사무엘이 12살 때 한 밤중에 그에게 전하시는 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무엘아'라고 음성이 불렸습니다. 아버지 엘리가 부른 줄 알고 일어선 그는 엘리의 방안으로 들어가 용무를 물었습니다. 엘리는 부르지 아니하였다고 말했습니다. 사무엘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 때 그는 음성을 다시 들었습니다: '사무엘아.' 그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서 엘리에게 갔습니다. 그는 아버지 엘리가 부르신 줄 확신하였습니다. 그 때 엘리는 하나님이 아들 사무엘을 부르심을 깨달았습니다. 다음에 그 음성을 들으면 대답할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사무엘이 그렇게 했을 때, 주님이 그에게 전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것은 들을 수 있는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사무엘에게는 들리는 음성이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일 들을 수 있는 음성이었더라면, 사무엘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엘리도 그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 음성은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시는 것이었습니다(사무엘상 3장).

내적 증인(inward witness)과 내적 음성(inward voice)간에 유사점이 있는 때가 있습니다. 어떤 때는 증인이 더 분명한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덜 분명한 때도 있습니다. 증인은 단순히 하나의 걸림(a check)이거나 전진 신호(go-ahead signal)인 것입니다. 증인은 우리의 주의를 모으기 위한 하나의 내적 부저 소리(an inward buzzer)와도 같은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내적 음성'이 우리에게 전합니다. 우리가 '내적 음성'을 통해서 인도를 받을 때, 그것은 말씀과 함께 있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영이 움직일 때는 항상 말씀을 따라 함께 움직입니다. 성령님이 말씀과 함께 있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은 성령님에 의해 감화된 것이므로, 만일 당신에게 전하고 계시는 그 분이 성경 속의 성령님과 동일하다면, 그것은 곧 이 말씀과 함께 있는 것이 됩니다. 성경에 이르기를, 이 세상 안에는 많은 음성이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여행을 하는 중에, 일종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이 들었다는 그 음성을 말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 나는 그들이 옳고 그른 지를 아무런 판단없이 알게 됩니다. 나는 그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가 그 말씀과 일치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한번은, 어느 훌륭하다는 여자 그리스도인을 만났는데, 그 여자는 그 교회에는 하나의 큰 복받음이었습니다. 만일 마귀가 사람들을 그릇 인도할 경우, 마귀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영향 및 증언(간증)을 앗아 갈 수 있으며, 그로 인하여 복받음 대신에 저주를 남길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주님이 자기에게 보여주셨다는 한 계시를 내게 말했습니다. '믿을 수 없군요, 왜냐하면 당신의 계시는 그 말씀과 일치하지 않으니까요.'라고 나는 그 여자에게 말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내게 전하신 건 분명해요. 그 분의 음성을 들었는걸요.'라고 그 여자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는 자기가 본 하나의 환상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되풀이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성경적이 아닙니다.' 나는 성경 말씀들을 인용하면서, 그 여자가 말하고 있는 사건의 모순들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당신의 계시를 뒷받침(증언) 할 수 있는 어떤 성경 말씀이든지 내게 알려 주실래요?'라고 말했습니다. '전 그렇게 못해요.'라고 그 여자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 여자에게 성경구절 어느 곳이라도 펼치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그 여자가 성경 말씀의 장 (章)을 읽으면, 그 여자가 말하고 있었던 모든 일과 모순되리란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그 여자는 내가 일러준 성경 구절을 읽었습니다. 그리고는 성경을 덮고 나더니, '참, 성경 아니 무슨 성경이야. 난 하나님이 내게 전하셨고, 이 계시도 보여 주셨음을 잘 알아요. 난 이 계시를 간직하고 계속 살아갈래요.'  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전하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전하셨다면, 당신에게 성경말씀과 일치하는 말씀을 전하셨을 겁니다. 내 말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혼자서 읽으실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 여자는 계속 우겨댔습니다: '성경 아니 무슨 성경이에요. 난 내 계시를 간직하고 살아갈래요.' '좋습니다.'라고 나는 마지막 대답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것과 동거할거구요, 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동거할 겁니다.'

음성들을 쫓다가 도중에 하차하는 안타까운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세상 안에는 많은 음성들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의 그 빛'으로 그것을 살펴보지 않고서 무턱대고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들을 통해서 우리와 교제(교통)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음성을 듣는 것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그것은 무언가 듣고자 하려고 기도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만일 그 분이 우리에게 전하신다면, 그거야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이 우리에게 전하시지 않아도, 우리는 그 분의 말씀을 소유하고 있기에, 우리는 '그 말씀의 그 빛' 속에서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계속 더보기>

<Created/19941229><Opened/20021223>
<Modified/20060326><20061015> <Updated/20070827>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