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쓰레기더미 속 진주알] 인간탐구 김구(金九) [1]

<명성태황후 암살>과 <김구>의 행적 [1]

글/ 정재선 목회자


[또 하나의 비극/화중광야소장] 불과 100여년 전에 한 나라의 위기시대를 온몸으로 지켜내신 자국의 국모의 <어진> 하나도 제대로 구비치 못하고서...무슨 세계 선진국 대열(경제대국 10위권...)...운운할 수 있겠는가!! <한류>ㅡ><K팝>ㅡ><강남스타일>...허구성 디지털에만 '올인'하여 민중의 여론을 호도해오는그런 배후세력들은 머지 않아 그 정체들이 만인 천하에 드러나고 만다!! 본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위 <명성태황후>로 '추정되어'(??) 오고 있는 '한국말년사'(장도빈/1945)에 수록된 위 사진의 원본사진이 곧 경매에 나온다는 보도를 접하고서 부터다. <국민일보/자세히보기>. 여기에서 우리는 냉정하게 과거의 역사를 비춰봐야 한다. 만일 위 사진이 '진짜' <명성태황후 어진>이었다면, 왜놈들이 가만 놔둘리 있었겠는가?? 이 사진이 최초로 실렸다는 1935년 <조선일보 신년호>에는 왜놈들의 검열을 피할려고 '규중에 숨은 고운 각시'라고 밝혔는가?? 그러다가 이승만의 <독립정신>에서 이 사진을 약간 변조해서 <명성황후>라고 실은 것인가?? 명성태황후의 <진짜 어진>은 반드시 밝혀진다!! <'명성태황후의 어진은 반드시 있었음에 틀림없다!!'<2>/자세히보기> (2012.9.1/깊은밤)


<김창암(金昌巖)ㅡ>김창수(金昌洙)ㅡ>김구(金龜)ㅡ>김구(金九) ㅡ 이름이 네 번씩 바뀐 만큼이나 김구 선생님의 인생 역정도 파란만장하였다!! 신앙도 <동학(東學)ㅡ>불교(佛敎)ㅡ>개신교(改新敎)ㅡ>카톨릭교(天主敎)>로 두루 거쳤다. 개신교에서 카톨릭교로 개종한 소이는 중국 안에서 독립운동 중에 '예수회와의 필연적인 접촉이 결정적인 개종이유'(??)일 것이라는 '전제'를 둔다. 그리고 예수회의 도움(예/프리메이슨 '장제스'(장개석)이 임시정부 운영자금 지원)을 받음으로써 내려진 밀지(密指)를 귀국 후 불이행??(혹은 배도/배반??)하였다 하여, 예수회가 암살을 주도하였을 가능성(??)을 두고, 필자의 필적(筆跡)은 시작된다!!

실로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세월이 너무 빠르다...또 한장의 달력을 넘겨야 할 시간이다...2012년 9월이 기다린다...참으로 치졸하다 못해 야비하고 치사한 작태들이 온 세계는 물론 우리 한반도를 옭아매려고 발악이다. <2012년 런던올림픽> 끝나고 나면, 그동안 막아놓았던 <아젠다의 댐문>(The Dam Gate Of Agenda)을 열을 것이라고 예견하였었다. 그러기에 2011년 12월에 2012년 주제를 <대칸민족이여, 일어나라!!>로 정하였던 것이다!! 혹여 필자의 글을 처음 접하는 독자는 무척이나 '갈등'(??)이나 '충격'(??) 둘 중에 한 가지 '딜레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지금까지 듣고 배웠고 깨달았던 <역사지식>에 충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소이(所以) 때문이라고 필자는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자가 3년전 2009년 8월부터 시작한 본 <필적>(筆跡)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진행중이다...노구에 피곤하고 시력이 너무 혹사 당하여 잘 안 보이고, 지친 몸에 쉬고 싶고 눕고 쉽고, 여행도 떠나고 싶고, 맛있는 것도 먹고 싶지...왜 않을까 본가?? 그러나 본 <필적>(筆跡)의 펜끝이 멈추지 않기에...이렇게 힘겨운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3년전에 본 주제를 착수할 때는 평범한 글 정도로 생각하였고...부담없이 누구든지 공감할 수 있는 '바운더리' 안에서 집필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10년 <The End Of The Line>과 <국치100주년>을 다루면서...필자의 집념은 <역사적 사실>에 떠밀려 버려져 버린 <역사적 진실>로 향하여 추적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기존 전문가들의 공유 영역이었던 <역사학자들>이..일부지만...1910년 8월 29일 일본제국의 한국을 강제로 착취한 <한일병탄>의 100주년이 되는 2010년 8월 29일 1주일 전인 8월 22일에 <일한시민공동선언대회>가 <100년전에는 물라서 당했지만, 100년 후에는 알기에 당하지 않는다/자세히보기>...8월 29일에는 한국과 일본의 역사학자들과 시민들이 서울에서 함께 토론하는 그 광경이 인터넷상으로 떠올라 옴을 보고서는 여간 흥분에 사로잡혀 있지를 못했다!! 그러한 흥분은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두 손을 마주잡고 서로 껴안는 모습을 보면서 느꼈던(금방이라도 남북이 하나가 될 것 같은 느낌) 그 때 이후로 처음 느껴보는 감정의 발로였다!!

아!! 그런데...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2010년 8월 29일 <한일병탄 100주년> 이후로는...고대하였던 <역사적 자료들>이 시시때때에 맞춰서 공급될 줄 알았는데...오히려 인터넷상에서는 그 이전에 흔히 보였던 자료들마저 서서히 꼬리를 감춰 버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 지금 이 정부의 배후세력이 <한민족 역사인식> 방향을 완전이 180도로 뒤바꾸어 가는구나!!...점점 어두워만 가는구나!!'...그리하여 2011년에는 주제를 <The Dark Year Of 2011>로 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대선을 치뤄야 하는 2012년에는 주제를 설정해 놓지 못하였다!! 이 기간에는 이념의 <대충동>으로 한바탕 <마당놀이 굿판>을 벌여야 하는 운명적인 <한민족 역사적 진실>에로 방향타가 움직일 것으로 예견하였고...이 예견은 적중하였고(쑥대밭되어 버린 '통합진보당'이 해체 진행중...) <2012.8.29/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유시민 인터뷰 참조>...그리하여 국내외 8천만 <한민족>(桓民族)에게 각성과 경계와 계몽을 촉구하는 견지에사 <2012 대칸민족이여, 일어나라!!>라는 주제를 설정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본 주제는 아직도 미완성품이다...<주제곡>이 아직 연주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동역자 아들 <다니엘>이 다른 분야에서 있다가 근래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 곡의 1차 자료가 완성된지 이제 2년이 되어 간다...어제에 그 곡의 연주에 필요한 마지막 2차 자료가 우리의 또 다른 동역자에 의해서 완성되었다...이제 다니엘이 컨디션이 회복되면, 그의 열손가락으로 연주할 것이고...그 연주곡이 독자 여러분에게 들려질 것이다...그 주제곡이 속히 연주될 수 있도록 여러분의 진심어린 간구와 기도를 부탁드린다. 이 대단한 <역사적 진실>은 그저 자료들이나 찾아서 읽어보고 곁들여서 꿰매지는 식의 안일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필자의 타고난 성품과 기질이 끝까지 파고드는 근성을 부여받아서 인지...아울러 연구자의 길을 걸어서 그런지...<역사적 사실>에 밀려 거의 존재가치도 없이 '망각되어 버렸던' 아니 '쓰레기 같이 우리 곁을 떠나 버려져 있었던 그 더미 속에서 '진주알'을 발견하였으니...바로 백범 김구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김구 선생님과의 만남은 <명성태황후 암살> 시기인 1895년을 기점으로 해서 전개될 것이다!! 김구 선생님의 인생 행적에서 대변화를 준 사건이 있었다.

그리고 본 <필적>(筆跡)은 오직 <명성태황후 어진>을 찾아 지속될 것이다!! 여러분의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린다. 샬롬!! (2012.8.31/밤에)

<김구의 스승 고능선(高能善)의 가르침> 고능선은 조선 후기 해주지역에서 명망있는 유학자였다. 성리학자이며 학맥으로는 화서학파 에 속한다. 김구는 고능선으로부터 학풍을 배웠다. 그리고 고능선은 김구의 약점을 이같이 지적해 주었다: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無足奇 縣崖撤手丈夫兒) ㅡ (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 힘을 주지 않고, 낭떠러지에 매달려도 손을 놓을 수 있는 게 대장부라) ㅡ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른는 것은 대단한 일아 아니다. 그러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은 가히 장부의 일이라 할 수 있다.' 남대장부의 기백의 특성을 묘사한 것이다. 심담이 허약하였던 김구는 스승 고능선의 이 가르침에 변화를 가져왔고, 훗날에는 '한민족'(桓民族)의 구국의 길로 방향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

◆백범 김구 투사의 막내 아들이신 김신(金信)께서 비명에 암살당하신 선친을 사모하는 통한의 글이다. <손충무, '백범 김구사록: 망국의 한', 서울:범우사, 1976,  p.427. (화중광야소장).
아직 필요한 자료들이 입수되지 못하였기에...우선 <위키피디어>를 인용, 보완하여, <김구 선생님과 명성태황후 사건>과의 연계성을 펼쳐 나간다!!

[에필로그 ㅡ 김구(김창수)의 치하포 사건과 수감 생활/1896-1897]

21세였던 1896년 2월 청나라로 향했다가 단발정지령 시행과 삼남 의병 봉기 소식을 듣고, 1896년 2월 하순 평안북도 안주에서 길을 돌려 고향으로 귀환하던 중,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鴟河浦)에서 진남포로 가는 배를 타고 가다 빙산을 만나면, 그는 사람들과 함께 내려 빙산을 의지하여 작은 빙산을 떠미는 방법으로 배를 빼낸 뒤 우여곡절 끝에 치하포 인근 5리 밖의 강 어귀에 정박하였다. 치하포구의 한 여관방에 머무르고 있었다. 여관방에는 한복을 입고 성이 정씨이고, 장연에 산다는 사람도 있었다. 김구는 그 사람이 진남포로 간다고 하였으며, 장연 출신이면서 경성말을 하고 흰 두루마기 밑에 칼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굳이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위장한 것은 평범한 상인이나 기술자가 아니라, '을미사변'(乙未事變)의 공범이라 도피 중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였다. 한국인으로 변복한 것을 수상히 여긴 그는 '미우라 고로'(三浦梧樓/명성태황후 암살 주도)이거나 그의 일당으로 단정하였다.

김구는 아침 식사 시간에 밥값을 치르던 중 그를 습격하여 칼을 빼앗아 폭행한 뒤 살해했다. 그의 이름은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였다. 김구는 자신의 저서 백범일지에서 쓰치다 조스케를 일본 군인이라고 기술하였으나, 일본 외무성 자료엔 쓰치다는 대마도 이즈하라 출신의 상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 때 김완섭이 김구가 민간인을 살해했다 주장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으며, 창원대학교 '도진순' 교수는 자신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에 의하면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鷄林奬業團) 소속의 핵심단원이었다. 이는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1997년판에도 실려있는 내용이나, 2002년도판에는 도진순 스스로 이 주장을 철회하여 '계림장업단' 관련 내용을 삭제하였으며, 현재 '쓰치다 조스케'가 상인이었다는 것외에 계림장업단 소속이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더불어 계림장업단이 치하포 사건 이후인 1896년 5월에 조직되어 시기상으로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언론인이자 전 국회의원 '손세일'도 자신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 신판에서 '쓰치다'라는 이름의 그 일본인은 대마도 출신의 민간인에 불과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계림장업단'은 일본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주조선 일본영사관의 지휘를 받고 있는 반관반민의 단체로, 일본의 상공 및 수산 기타 800여 업종의 자위(自衛)를 도모하고 상권(商權) 확대와 군사관계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보를 모집하는 조직이었다. <자세히보기>.

김구는 현장에서 살인 이유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식당 주인이자 동장(洞長)인 이화보(李化甫)를 시켜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 벽에 붙이고 집으로 돌아가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쓰치다가 소지하고 있던 엽전 8백전 중 선주들에게 선가를 떼어주고, 나머지는 방장인 이화보를 시켜 동리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다.

석달 후 자택에서 체포된 김구는 해주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이감되어 인천으로 압송되었다. 해주 감영에서 고문당하다가 인천 감리영으로 이감, 경무관 김윤정(金潤晶)은 그에게 일본인 살해여부를 묻고, 이어 재물을 강탈할 목적이냐고 추궁하였다. 사태가 큰 사안이라 본 경무관 김윤정은 인천부윤 겸 감리사 이재정(李在正)에게 보고하였고, 이재정의 추국 때 군부의 원수를 갚기 전에는 몽백(상복)을 입지 않는것인데, 국모의 원수도 갚지 못하고도 몽백을 입는 것의 염치없음을 질타하였다. 추국하던 관리들은 부끄러워하여 이후로 그에게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하였다.

    [問]
    君の行為はもう憔憔と再初で把握するけれども、何の不協一心があってこのように人命をいたんだのか?


    [문]
    그대의 행위는 이미 초초와 재초에서 파악하였거니와 무슨 불협(不協)한 마음이 있어서 이토록 인명을 상하였는가?


    [答]
    国民された身として、国母の仕返ししようと恨みを抱いたのでこの巨事を行ったのだ。

    [답]
    국민된 몸으로써 국모의 원수를 갚고자 원한을 품었으므로 이 거사를 행한 것이다.


    <이재정의 김창수(김구)의 3차심문진술> <자세히보기>.


이어 11월 법부에서 김창수의 교수형 건의로 강도살인죄로 사형 선고를 받으나, 고종은 집행을 보류하였다. 이는 우연히 승정원승지가 특이한 죄목명인 '국모보수'(國母報讐) 라는 단어를 우연히 발견했기 때문이라 한다. 당시 국민들의 반일감정과 명성황후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한다는 '국모보수'(國母報讐)라는 김구의 신념을 의식한 조선 법부는 고종 황제가 전화로 인천감옥장에게 내린 형집행 보류지시를 근거로 사형 집행 예정일 하루전날 형 집행을 보류시켰다. <위키피디어/자세히보기>.

[관련자료] 土田讓亮 / 鷄林奬業團  政治觀光學 <20071124/자세히보기>.


◆<명성태황후 암살범>으로 추정하고 일본상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후, 해주감옥 안에 갇혀있는 김창수(김구/왼쪽에서 두 번째 안경쓴자). <손충무, '백범 김구사록: 망국의 한', 서울:범우사, 1976, 사진페이지. (화중광야소장).

◆1949년 6월 14일, 암살당하시기 12일전, '김구'(뒷줄 안경쓰고 서 계신 분) 주석의 '한국독립당 제7회 전국대표대회'일행이 '삼열사'(이봉창/윤봉길/백정기)의 묘참배 후 기념 촬영한 것이다. 이 고가의 사진을 허락해주신 '이기정'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화중광야제공).

 

<Created/20120830> <Updayed/201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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