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쓰레기더미 속의 진주알] 인간탐구 김구(金九) [2] 아무리 <과거역사>라지만 반드시 그 댓가는 치를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명성태황후 암살>과 <김구>의 행적 [2]

글/ 정재선 목회자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건국 이래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과거역사 진실규명 위원회>가 수시로 존폐당함은 '아직도 사대주의(친미주의) 및 친일사상의 뿌리'가 근절되지 않은 탓이로다!! <연합뉴스/자세히보기>. 따라서 차기 정부부터라도 <과거역사 및 한민족 역사관이 제대로 각인된 분>이 지도자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아울러 <과거역사>로부터 일점의 '티'가 묻어 있는 분은 '석고대죄'를 해서라도 양심적으로 국익을 위하여 신명을 다 바쳐주면 좋겠다!!

더 이상 '선전용식 국가브랜드' 따위의 '아젠다'('융합/선진' 용어를 강조)만을 순응하는 '정치욕망'(??)에 사로잡혀서 '한민족의 길'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온가지 민초들이 의당 접촉해야 할 <과거사의 자료들>을 <도서실/문서보관소> 안에 비치해 두고서...이 기관에서 '찔끔'...저 기관에서 '찔끔'...이런 식으로 '전시회'라고 하는 미명하에...<땜질식 과거역사 알리기>는 아무런 실효를 거두지 못해 왔다고 판단되었다. 이제는 각 기관별(정부기관 및 개인기관)로 산재해 있는 그 귀하고 귀한 <과거역사 자료들>을 한 곳으로 집약하여서, 통괄할 별도의 독립기관(정권과 무관하게 법을 정해서)을 세울 것을 호소하는 바이다!! 예를 들면, '가칭' <한민족문서관리부>(도서/비도서 자료 포함)같은...이 기관은 정부의 어떤 부서보다 상위 독립기관으로서 별도로 정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한민족사관>을 그 기저(基底)로 하여 설치되어야 될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너무도 <과거역사문제>에 매인 나마지, 귀하고 귀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으며, 일반 민초들에게는 <이념적 양극화의 혼돈>만이 가중되고 있지는 않은 것인지...?? 정치인들은 대오각성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정치와 정부 때문에...민초들의 참다운 <과거역사자료>에로의 접근에 걸림돌이 되는 '역순환의 고리'를 과감하게 절단하는 그러한 지도자가 나왔으면 좋겠다는 필자의 작은 바램이다. 그리하여 민초 누구나 접근이 용이한 '디지털化'된 '오픈 라이브러리'(Open Library) 설립이 절실하다고 판단되니, 아직도 대한민국은 '100% 광복'의 상황이 아니잖은가!! 샬롬. (2012.9.23/오후 작성) (2012.9.24/오전 보정).

다음에는 <김구 선생님의 도피과정>을 살펴하고자 한다!!

<김창암(金昌巖)ㅡ>김창수(金昌洙)ㅡ>김구(金龜)ㅡ>김구(金九) ㅡ 이름이 네 번씩 바뀐 만큼이나 김구 선생님의 인생 역정도 파란만장하였다!! 신앙도 <동학(東學)ㅡ>불교(佛敎)ㅡ>개신교(改新敎)ㅡ>카톨릭교(天主敎)>로 두루 거쳤다. 개신교에서 카톨릭교로 개종한 소이는 중국 안에서 독립운동 중에 '예수회와의 필연적인 접촉이 결정적인 개종이유'(??)일 것이라는 '전제'를 둔다. 그리고 예수회의 도움(예/프리메이슨 '장제스'(장개석)이 임시정부 운영자금 지원)을 받음으로서 내려진 밀지(密指)를 귀국 후 불이행??(혹은 배도/배반??)하였다 하여, 예수회가 암살을 주도하였을 가능성(??)을 두고, 필자의 필적(筆跡)은 시작된다!!


김구(金九) 선생님은 황해도 해주 백운방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창암(昌巖), 개명하여 구(龜,九).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요, 호는 백범(白凡)으로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이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7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때 일본 사무라이들에게 암살당하신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1896년 3월 9일,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 '약장사'(상인)를 일본군(중위)으로 오해(??) 그를 살해해 체포되었으나, 사형 확정 후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에 1898년에 탈옥하였다. 공주 '마곡사'(麻谷寺)로 은둔,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김구 선생님의 은둔 유허지. 공주 소재 마곡사 경내 '응진전'(應眞殿)이 후면에 보인다. 일본 강점기에 촬영된 사진을 검토해 보니, '응진전' 앞에 3동의 건물이 있었다. 가장 동쪽에 위치한 한동은 '대적광전'과 직교로 남북 장축에 동향을 하고 있고, 나머지 2동은 '응진전' 바로 뒤에 배치되어(위 사진은 그 폐허장소), 동서장축의 남향을 취하고 있다. 이 건물중 동쪽 건물지역에서 온돌이 확인되었다고 발굴단은 전한다. 위 사진에서 왼쪽 중하단 지역이다. <'공주 마곡사: 백범 김구선생 은둔 유허지', 청주:중원문화재연구원, 2004, p.77> (화중광야 소장).


가난에 시달려 제대로 학문을 배우지도 못했던 청년 김구는 20세 되던 1895년에 안태훈(안중근의 부친)의 집에 머물면서, 해주지역에서 명망있는 유학자 고능선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그는 성리학자이며 학맥으로는 화서학파 에 속하였다. 그는 김구에게 우리나라는 청일전쟁서 패한 청나라와 손을 잡고 일본을 쳐부셔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항상 사내대장부의 기개(氣慨)를 가져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바로 앞글에서 밝힌 바 있는 그 유명한 훈도(訓道)이다:

    '득수반지무족기 현애철수장부아'(得樹攀枝無足奇 縣崖撤手丈夫兒) ㅡ (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 힘을 주지 않고, 낭떠러지에 매달려도 손을 놓을 수 있는 게 대장부라)

    [풀이] '가지를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는 것은 가히 장부의 일이라 할 수 있다.'


이에 감동한 청년 김구는 김형진(金亨鎭)과 의논하여 참빗 장수와 황화(荒貨/담배나 쌈지 따위의 잡동사니) 장수로 가장하고, 평양을 거쳐 육으로 정평(定平)함흥(咸興)삼수(三水)갑산(甲山)을 지나 압록강 기슭을 돌아 남만주 소재 삼도구(三道溝)에서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부대에 가담한다. 이 의병부대에서 청년 김구는 화약보급을 담당하였다. 이 의병부대는 강계성(江界城)에 포진하고 있던 왜적(일제)을 토벌하려다가 참패당하고, 김구는 귀국 길에 오른다.

이해 10월 8일(음력 8월 20일)에 일본 공사 '미우라'(三浦悟樓)가 주도하는 사무라이들이 황궁에 침입하여 친로책(친러시아정책)을 펴오던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를 암살한 '을미사변'이 발생하였던 것이다.

1896년 황해도 안악(安岳)으로 내려오는 도중 2월 하순에 '치하포'(鴟河浦)의 객주집에서 변복하고 있는 일본 육군 중위(실제는 약장수)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하고,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 해주 백운방 기둥 김창수'라고 쓴 포고문을 길가의 벽에 붙이게 한 뒤, '쓰치다'의 행장 속에 들어 있던 엽전 8백냥을 그곳에 사는 가난한 동포들에게 나누어 준 다음 신천(안중근의 집)으로 돌아왔다.

한편, 일본이 가만 있을 수 있나?? 급기야 한국 주재 일본 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는 외무대신 '이완용'(李完用)에게 자국인 '쓰치다 조스케' 살해범(김창수/김구)을 조속히 잡아서 처벌해달라고 아래와 같은 제하의 공문을 보낸 것이다:

(5) [日本人 土田讓亮의 被殺事件과 犯人逮捕要求件] <公文第二○號>

<이미지제공/국사편찬위원회>. 주한 일본 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郞)가 한국 외무대신 이완용에게 자국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의 살해사건을 해결해달라는 협조공문이다. 이 자는 1894년 베이징 대리공사로서 청일전쟁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그후 한국에 변리공사로 있다가 1901년에 '가쓰로 다로' 내각에 외무대신으로 진급하여 1905년 을사늑약을 주도하였다. <19세기를 뒤흔든 포퓰리즘의 극치 ㅡ 일본드라마 '언덕위의 구름'/자세히보기>.

[공문번역/국사편찬위원회] '서신으로 말씀드립니다. 우리 仁川領事의 보고에 따르면, 長崎縣 평민 土田讓亮이라는 자가 조선인 1명(平安道 龍岡 거주 林學吉, 20세)을 데리고 黃州에서 인천으로 돌아오기 위하여 鎭南浦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도중에 황주 十二浦에서 한국 배 1척을 세내어 大同江을 내려가다 3월 8일 밤 治下浦에서 일박하고, 다음날 9일 오전 3시경 그 곳을 떠날 준비를 마치고 식사를 하기 위하여 그 곳 숙박업자 李化甫 집에 갔습니다. 다시 귀선하려 할 때에, 그 집 뜰 앞에서 그 여인숙에서 숙박한 한인 4, 5명에게 타살되었습니다. 고용된 한인 林도살해당할 위기에 처하였지만 간신히 위험을 피하여 같은 달 12일 밤 平壤에 도착하여 그 곳 주재 平原警部에게 위와 같은 사건 전말을 알려왔습니다. 그래서 平原 경부는 巡査 2명과 巡檢 5명을 인솔, 같은 달 15일 사건 현장에 도착, 검사를 하려고 하였더니 여인숙 주인은 경부 등이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 도망하였고, 피해자의 시체는 벌써 강에 버려진 뒤라 검시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여인숙의 뜰 앞에 핏자국이 여기저기 있음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경부 일행은 그곳 郡 직원에게 엄하게 항의하였더니 그들이 가해 혐의가 있는 자 7명을 데리고 옴에, 조사해 보니 누구도 가해자가 아니고 다만 이 사건을 들어서 알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土田讓亮의 남은 재산은 韓錢 10俵와 행낭보따리 1개가 있는데, 韓錢 二俵는 누군가 빼앗아 가고 나머지는 무사히 인천 영사관이 인수했다는 것입니다. 조사하건대 본건 피해 전말은 전기한 바와 같이 우리 영사의 보고에 따라서 사실이 명확할 뿐만 아니라 가해자도 쉽게 수색하여 체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므로 귀 정부는 날짜를 미루지 말고 곧 평양 觀察使 및 해당 郡守에게 엄중하게 훈령을 보내어 일정을 정해 가해자를 체포하고 상응한 처분을 하시길 부탁드리며, 위와 같이 조회하오니 유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1896년 3월 31일
辨理公使 小村壽太郞
外務大臣 李完用 閣下

[죽어서도 처참하리만치 버림받은 '명성태황후'의 거처 '옥호루']

일본 변리공사 '고무라 주타로'('(小村寿太郎/1855-1911)는 누구인가?? 청일전쟁 전에는 베이징의 대리공사로서 청일전쟁 개전 전야의 외교 처리를 한 인물이다. 청일전쟁 후 곧 <을미사변> 이후, 10월 17일 '미우라' 공사 후임으로 한국에 취임한 자이다. 1901년 제1차 '가쓰라 다로'(桂太郞) 내각의 외상이 되어, 1905년 한반도 강제 찬탈인 <을사늑약>의 선봉에 나섰던 자이다. 특히 이듬해인 1896년 4월 25일에 한국정부가 '명성태황후의 암살'에 관하여 다시 조사한 결과를 <관보>에 발표하기로 결정한 정보를 입수하고는, '고무라'는 외무대신 '이완용'을 만나 이렇게 협박하였다:

    '이러한 보고를 공공연히 관보에 게재할 경우 본관은 결코 묵과하지 않을 것이며, 엄중한 조치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다.' <김문자,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 서울:태학사, 2011, p.309>.


'명성태황후'는 일본군의 옹호로 경복궁에 침입한 왜놈 사무라이(낭인)들이 하수했다는 것이 통설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궁극적인 목적 달성을 그들에게 맡겼을 것인가?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의문이다. <을미사변>을 다룬 정치재판이었던 <히로시마 지방재판소 예심>이 진행되는 동안에, 히로시마의 도쿄를 오간 일련의 비밀 전문 내용에 비춰보더라도 하수자는 육군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였음이 분명했다. 그가 내리친 군도(軍刀)가 치명타였고, 잇따라서 몇몇 장사가...빈사의 황후를 찍었다고 해도 필경은 들러리였다.

◆1929년에 허물어 버린 '건청궁터'(고종태황제와 명성태황후의 거처)의 '옥호루'(명성태황후 암살당하신 곳) 위에, 조선총독부가 1935년에 시행한 '조선총독부미술관' 신축을 위한 '지진제'(地鎭祭/토지신에게 공사 무탈을 기원)를 지낸 무리들이 차일을 차린 식장을 빠져나오고 있다. 뒤에 보이는 산이 바로 백악산이다. 이렇듯 왜놈들은 잔인한 근성이 있음을 경계해야 한다!!<'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유리건판', 국립중앙박물관, 2007, p.189> (화중광야 소장).

◆위 이미지는 1929년에 일제가 완전히 허물어 버려놓은 '건청궁터'이다. 중간 우측의 공터자리가 '명성태황후'께서 바로 왜놈의 칼에 찔려 암살당하신 장소 '옥후루터'이다. 뒤에 백악산이 보인다. 민족사관이 제대로 박혀있는 지도자였다면, 이 터는 진즉 복원시켜, 한민족의 비운의 현장으로서 국민들에게 공개되었어야 했는데...다행히도 2006년에 복원되었다.
<KBS역사스페셜 영상캡처/2001.11.17 방영>.


1896년 2월 하순 안악(신천)으로 돌아온 김구는 그로부터 석달 후인 5월 11일 새벽에 체포되어, 두 달동안 해주옥(海州獄)에 구금되어 있으면서, 다리뼈가 드러나는 악형을 당했으나, 대관에게 '명성태황후의 암살범'(??)으로 판단,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동기를 말하려고 함구불언(含口不言)하였다.

7월 초에 다시 인천 감리영(監理營)으로 이감되었다. 그 동안 어머니 현풍 곽씨가 감리영 삼문 밖의 객주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며, 매일 아침 저녁으로 옥 안에 사식을 넣어주는 등 옥바라지를 하였다. 김구는 옥 안에서 장티푸스(장질부사)에 걸려 심한 고통을 참다 못해 자살까지 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1897년, 심문을 받을 때마다 김구는 국모이신 '명성태황후의 암살'에 대한 원수를 갚으려고 왜구를 죽였다고 대답하였다. 이 소문이 인근에 알려지자, 그의 충의와 용기를 흠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차려들고 옥으로 찾아 왔던 것이다.

◆1910년 한민족의 치욕의 역사가 저렇게 <한국병합기념화보>라는 제하로 일본의 '오사카신문'에 펼쳐졌다. 102년전의 일이다. 일본 천황 밑에 한국의 두 왕(고종/순종)이 그 밑에 실려있다. '잔꾀(원숭이)의 명수들'이었지만...그 죄악의 대가는 반드시 역사가 저 왜놈들에게 물을 것이다!! <민족문제연구소, '강제병합 100년 특별전: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 2010, p.32> (화중광야 소장).


그해 7월 27일, 사형에 처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8월 26일에, '김창수는 강도가 아니라 국모의 원수를 갚은 사람이므로 특사한다'는 고종태황제의 특사령이 내려졌으니,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의 압력으로 출옥하진 못하였다.

1898년 3월 9일, 김구(23세)는 죄수들에게 먹인다고 옥사장이에게 150냥을 주어, 쌀, 고기와 모주 한통을 사오게 하고, 따로 스물닷 냥을 주어 아편을 사먹으라고 해서 보낸 다음, 감옥의 바닥에 깐 박석을 들쳐내고 땅을 파서 탈옥하였다.

그 길로 남도로 내려가서, 수원
오산강경무주남원전주목포광주함평강진고금도완도장흥보성화순동복순창 등지를 거쳐, 하동 '쌍계사'(雙溪寺)와 '칠불암'(七佛庵)에서 피신생활을 하였다.

이해 늦가을에 계룡산(鷄龍山) '갑사'(甲寺)를 거쳐 공주(公州) '마곡사'(麻谷寺)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용담화상'(龍潭和尙)에게서 '계'(戒)를 받고, 노승 '하은당'(荷隱堂)의 제자가 되어 승려생활을 하며, 하은당으로부터 법명을 '원종'(圓宗)이라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부속 암자인 백련암에서 물도 긷고 장작을 패며 천수심경 등 불경을 외며 6개월 동안 스님생활을 하였던 것이다.


◆66년 전인 1946년 봄날에 '마곡사'를 방문하여 '대광보전' 앞에서 기념 촬영한 백범 김구 선생님의 일행이다. 이 때 마곡사 방문기념으로 심은 향나무가 대광보전 왼편 응진전 앞에 있다. 백범 옆의 흰 두루마기를 입으신 분은 중국 임시정부에서 생사고락을 같이 하셨고, 광복후 귀국하여 건국 초기 부통령을 지내신 이시영 선생님이시다. 암살만 당하지 않으셨으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바뀌었을 턴데...'권력'이 무엇인지...죄없는 '영웅들'만 잡아 먹었던 건국 초기의 한국 역사는 '피'로 얼룩진...결국에는 '망명'이란 종말을 고하며...떠나 버릴 것이었는데...아직도 백범 선생님을 암살한 배후세력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저격범 '안두희'는 피라미에 불과하다고 판단되었다!! <이미지제공/전국교사불자연합회>.



<Created/20120901> <Updated/2012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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