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나방

글/ 안연숙


오늘 일하다가 뜨거운 물이 나오는 곳에서 물을 받다가, 그만 잠시 한눈팔다 그 물이 넘쳐서 그 뜨거운 물이 제 손에 흘러 넘쳤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쓰라림과 통증이 찾아왔는데 그 통증과 함께 많은 손님들이 몰려와서 전 아픔을 참고 손님들을 맞아야 했습니다. 그 와중에 음식이 늦다고 타박하는 손님이 생겼지만, 제 고통이 더 컸기 때문에 뭐,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습니다. 제 아픔에 비해 그렇게 투덜거리는 말 쯤은 별수롭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계속 찬물로 설겆이를 하며 손가락의 화기를 가라앉혀서 통증이 물러갔을 때, 얼마나 평안하고 기쁜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계속 뜨거운 김만 데여도 쓰라렸지만, 좀 전의 그 고통만 하지 않아서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일하는 내내 기쁘고 찬 물로 설겆이 할 수 있어서 설겆이는 남이 하지 못하도록 제가 다 뺏어서 일을 했습니다.

잠시 잠깐의 화상의 고통이었지만 늘 즐겨먹는 고기를 생각할 때,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구워먹는 그것을 생각할 때 정말 내 살이 타지 않아서 몰랐었고, 그게 귀한 것인 줄 몰랐습니다.
제가 제 생명 유지를 위해 먹는 것이지만, 결국 다른 생명의 아픈 희생이 있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화상을 입어서 고통스러우면서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화상입지 않았을 때는 뜨거운 물이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았지만 화상을 입었을 땐 잠시 뜨거운 물이 데여도 엄청 아프다는 것을 말입니다. 작은 화상이 그토록 고통스러운데 온 몸이 타는 그런 고통은 어떠할까요??

그런 고통을 겪으며 장렬히 순교하신 영어성경 최초 번역자이신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은 단지 사제들만 읽을 수 있었던 '라틴어성경'을 '영어'로 옮겼다는 그 죄로 그렇게 화형을 당했던 것입니다. 스스로 불구덩이로 뛰어든 것 입니다. 그렇게 될 줄 알았어도 성경을 번역하여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들이 읽도록 길을 연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영적 생명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읽는 성경이지만...그것을 필사하던 사람들의 노고과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희생해서 번역하였음에도 잘 읽지도 않고 우리 구미에 맞게 또는 상업적으로 변개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점점 잡지책처럼 되어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단이미지참조/2004년 발행된 잡지성경 'REVIVAL(여성용) & REFUEL(남성용)' ㅡ 자세한 내용은
<화중광야홈피클릭ㅡ>상단킹제임스성경ㅡ>모조성경 열면 자세한 내용 읽을 수 있음!!>.


미켈란젤로의 그림은 그 성경 내용을 쉽게 그냥 그림으로만 이해하도록 그려놓은 것이지요. 그림이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정작 글을 읽지 않고 이미지로만 이해해서 더 이상 사고가 필요 없게 만드는 그런 게 있는 거 같습니다. 그래서 교황이 미켈란젤로에게 성당에 성경적인 그림을 그리라고 한 거 같습니다. 그 그림만 보고도 다 이해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런데 왜 어려운 글로 이해하도록 하셨을까요? 결국 같은 말인데 되풀이해서 다른 말로 기록해 둬서 미로(迷路)같이 보이게 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복잡한 미로보다는 쉽게 그림으로 잡지책처럼 이해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간단한 복음엽서 같은 걸로 말이지요.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동기는 될 수 있으나 진짜는 아니라는 거지요. 진짜의 일부분이지만 코끼리 다리 만지며 코끼리 전체를 상상하는 장님 문잡기 식이라 할까요??

아마도 미켈란젤로 때의 교황은 그 '아이콘化'의 장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지에 사로잡혀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을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윌리암 틴데일'은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도 왜 그 성경을 이해하기 쉬운 자신의 모국어 '영어'로 옮겼을까요??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암흑 교황시대 1000년>, 그 당시를 살아가면서 말입니다. 압축되지 않고, 형상화되지 않고, 글자 그 자체로 <예호바 엘로힘>을 만나는 그 길을 많은 사람들이 누리길 바래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손의 결과물이요, 걸작품입니다. 무엇을 믿을지 누구를 따를 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빛이요, 자신이 나아갈 방향인 것입니다. 애굽에서 예호바의 크나큰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대리하였던 모세가 엘로힘의 <십계명>을 받으러 '시나이산'으로 올라갔을 때, 불안하였던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계명, 곧 그 말씀보다도 더 실제적인 형상과 표적을 보길 바랐었고 마음에 안정을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군중들의 소요를 잠재우고자 모세의 형인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의 금붙이를 모아서 큰 황소 우상을 만들었댔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우상이 금세 마음의 평안을 찾아주었고, 그 곁에서 기뻐 날뛰었습니다. 예호바가 주시는 그 말씀보다는 그저 눈앞에 보이는 그 아름다움과 자신들의 걸작품이 더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호바는 그 아무런 형상도 주지 않으셨고, 단지 우리 사람들과 이야기 하셨습니다. 단지 벽장에 걸린 우상 인형이 아니셨고, 살아계신 인격체시기에 그런 그 분을 그런 우상처럼 판에 박히게 만드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우리는 예호바를 생각해서 만들었으나 항상 우리가 원하는 곳에 우리의 목표된 곳에 계셔야 한다고 하지만...그러나 그 분은 스스로 어디든 다니시는 자유인이셨고...그렇기에 우리에게 그 분이 스스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호바의 말을 딱 잘라서 우리가 원하는 데로, 우리의 구미에 맞는 데로, 우리가 알기 쉽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예호바가 살(FLESH)을 입고 오신 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형상을 알게 하심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모습으로 그 분이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신 것이지, 자신의 형상을 우상처럼 섬기도록 하신 것이 아니지요. 사람도 서로를 대할 때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고 그 사람 자체를 봐야 한다고 하듯이, 역시 예호바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하신 그 말씀과 그 계획들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형상으로 만들 수 있어도, 그 자체가 우상이 되어선 안되고, 또한 그 말씀자체도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예호바를 바라보게 하는 것을 멀어지게 만드는 모든 것이 그것 자체가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가감없이 알 필요는 있습니다. 그 완벽한 것을 추구하지만, 아마도 그 완벽한 것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거 같습니다. 신기루를 잡고 살아가는 흙으로 돌아갈 슬픈 흙, 우리는 아담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예호바 엘로힘만이 완벽하시며, 그 말이 우리에게 전달될 동안 많은 변형이 있음을 자인하면서 나중에 그 분 앞에서 그 분의 말을 듣기 위해 기대하며 그 분 앞으로 나갈 길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예호바의 그 말씀을 읽는 것은 이유식을 먹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나중에 장성하여, 예호바 앞에서 그분의 그 말씀을 잘 받아먹기 위해서 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숭배받을 만한 모든 흔적들은 하늘로 다 들리워 옮겨지고, 그 말씀만이 그 모진 핍박의 세월 속에서도 지켜져 오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편하게 예호바 엘로힘을 믿을 수 있는 길을 왜 다 없애셨을까요?? 그 분의 그 말씀을 듣지 않고 단지 그 형상에 빠져서 안주할 우리들임을 너무나도 잘 아셔서일까요?? 성경에 보면 실제로 예호바의 사람들이 가졌던 물건들을 예호바처럼 섬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호바는 아닌데도 말입니다.

특별한 형상은 없지만...그 분이 우리를 향하신 뜻이 담겨있는 글자로 우리에게 다가오심은 세월을 이겨서 대대로 예호바 엘로힘을 알게 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리로 전달하는 음악은 그 특성상 그 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 미술은 오래 가지만 색이 바래집니다. 조형물은 세월에 마모됩니다. 하지만 글자라는 것은 세월을 지나서도 그 글자를 아는 사람들에 의해 거의 정확히 전달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악보로 음악을 남긴 음악가들이 후세대에게도 그 음악가들의 음악을 연주 할 수록 길을 열어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글의 주제라고 할까요?? <불나방>은 빛을 좋아해서 그 빛을 따라 자신을 태우지 않을 태양빛인 줄 알고 불이 타는 불구덩이 빛으로 계속 향하다가 타서 죽는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예호바 엘로힘이 아닌 빛을 예호바 엘로힘으로 아는 그것이 우상이며, 그것이 결국 우리를 죽게 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프지 않고 평안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 그 분의 뜻이라면 우리의 무지함이, 우리의 우매함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영적 죽음>(SPIRITUAL DEATH)을 말함도 있지만, 실제로 우리가 이 현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서 권력이 예호바 엘로힘이 된 사람들에 의해서 자신과 그 밑에 다스리던 사람들까지 죽어감을 보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살'(FLESH)의 죽음도 함께 말함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 무엇으로도 예호바를 대신하려 하지 말고 성경이 말하지 않는 길로 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고된 길인 것입니다. 남이 많이 가지 않아서 길이 험한 좁은 길인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 생각대로 사는데 왜 나는 내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지 말입니다. 사실 그들도 그들이 만들어 놓고 정해놓은 신(神/god)에 매여 자기들 맘대로 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짧은 생을 살아왔지만 제 영을 지키시는 그 분, 속사람의 말씀에 따라 살아온 길은 자로 잰듯이 빈틈이 없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은 없지만, 그 분은 제 마음의 소원을 아셨고, 그것이 어떻게 하면 이루어 질 것인가를 너무나도 잘 아셨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때 예배당 계단을 내려오다 결심했던 '피아노 기능 선교사', 아이들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하는 그 길 말입니다. 지금도 사실 어떻게 이끌어 주실 지 모르지만...그저 저를 두신 그 길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그 곳에서 있게 하신 예호바 엘로힘이 실수하실 일이 없기에 원망하지 않고 견디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기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 길을 말입니다...

이슬람에서는 그 예호바 엘로힘의 그 뜻을 가지고 헛되이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잘못해도 '알라'의 뜻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끝입니다. 엘로힘의 뜻을 따른 것이 아닌데도 '인샬라' 한마디로 상대방의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물론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신(神/god)의 영역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은 예호바의 이름을 헛되이 일컫는 것에 속하겠지요.

    20:7Thou shalt not take the name of the LORD thy God in vain; for the LORD will not hold him guiltless that taketh his name in vain. (EXODUS 20:7, King James Version)

    20:7너는 너의 엘로힘 예호바의 그 이름을 결코 헛되이 사용하지 말지니, 이는 예호바가 자기 이름을 헛되이 사용하는 자를 형벌을 받지 않으리라 허락치 않을 것임이도다. (출애굽錄 20:7, 엘로힘말씀 정재선역)

물론 제가 완전히 예호바 엘로힘의 그 뜻에 맞춰서 산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다른 건 안 바라본다는 것이겠지요. 예호바의 그 뜻 앞에서 신발을 벗어버린 예호슈아처럼, 제 자신의 계획과 목표를 내려놓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헌신짝처럼 버려버린 그 계획들을 다시 쓰레기통에서 주워서 잘 털어서 예호바는 저에게 설명해 주십니다.

네가 바라는 그 목표로 가기 위해서는 이 방법으로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제 길이 막힐 때 마다 잘 깨닫지 못합니다. 나귀도 알아차린 큰 검을 들고 있는 천사를 그 나귀를 타고 있던 '발라암'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발라암'이 자기를 더 가지 못하게 벽에 그 발을 아프게 하기도 한 나귀에게 발람이 꾸짖었습니다. '내 손에 검이 있으니 너를 죽일 수도 있다'고, 말을 듣지 않는 암나귀에게 소리를 칩니다. 그러자 그 나귀의 입을 여시어 그 나귀가 하는 말을 발람이 알아듣게 하십니다. '내가 당신의 나귀인데 여태 당신을 등에서 떨어뜨린 적이 없다.' 그러고 나서 발람의 눈을 뜨게 하사 천신(天神)이 앞에서 큰 검을 들고 금방이라도 엘로힘의 말을 거역하는 발람을 죽이려 하는 것을 보게 하셔서, 그제서야 나귀 등에서 내려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천신이 전하는 엘로힘의 그 말을 들었습니다:

    22:28And the LORD opened the mouth of the ass, and she said unto Balaam, What have I done unto thee, that thou hast smitten me these three times?

    22:28예호바가 그 당나귀에게 말할 그 능력을 주셨고, 그 당나귀가 발라암에게 묻기를,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당신이 나를 세 번씩이나 나를 때렸더냐?' 하였다.

    22:29And Balaam said unto the ass, Because thou hast mocked me : I would there were a sword in mine hand, for now would I kill thee.

    22:29그러자 발라암이 그 당나귀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를 어리석게 만들었음이도다. 내가 나의 손 안에 한 검을 가졌더라면, 지금 내가 너를 죽였을 것이다.' 하였다.

    22:30And the ass said unto Balaam, Am not I thine ass, upon which thou hast ridden ever since I was thine unto this day? Was I ever wont to do so unto thee? And he said, Nay.

    22:31그러자 그 당나귀가 발라암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오늘까지 평생동안 타왔던 당신 자신의 당나귀가 아니더이까? 내가 전에도 이같이 행한 적 있더이까?' 하였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없었느니라.' 하였다.

    22:31Then the LORD opened the eyes of Balaam, and he saw the angel of the LORD standing in the way, and his sword drawn in his hand : and he bowed down his head, and fell flat on his face.

    22:31그때 예호바가 발라암의 두 눈을 여셨으니, 그가 예호바의 천신(天神)이 그의 손 안에 한 검을 빼든채 길 안에 서있는 것을 보았도다. 그러자 발라암이 얼굴을 땅바닥에 대고 엎드렸도다.

    22:32And the angel of the LORD said unto him, Wherefore hast thou smitten thine ass these three times? Behold, I went out to withstand thee, because thy way is perverse before me :

    22:32예호바의 천신(天神)이 그에게 묻기를, '어찌하여 너는 네 당나귀를 세 번씩이나 때렸느냐? 보거라, 내가 너를 막으려고 나왔느니, 이는 네가 무모하게 나를 거역함이다.'

    22:33And the ass saw me, and turned from me these three times : unless she had turned from me, surely now also I had slain thee, and saved her alive. (NUMBERS 22:28-33, King James Version)

    22:33이 당나귀가 나를 보았고, 내 앞에서 이렇게 세 번이나 돌이켰도다. 이 당나귀가 내게서 돌이키지 않았더라면, 확실히 지금쯤 내가 너를 죽였을 것이요, 이 당나귀는 살렸을 것이도다.' 하였다. (민수經 22:28-33, 엘로힘말씀 정재선역)

우리를 지으신 엘로힘은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인형으로 말 잘 듣는 종이나, 인조인간으로 만든 것이 아닙니다. 엘로힘이 우리에게 자신의 뜻(블레/βουλη)을 전하지만, 그것을 행하는 것은 우리의 뜻(델레마/θηλημα)이기에 이토록 경책 하시면서까지 자신의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세히보기>.

그것이 나쁜 것이냐?? 엘로힘의 그 뜻은 복주시려 하신 것이기에 사람에게 해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망시키실 때에도 간곡한 아브라함의 부탁을 들어주셨습니다. 나귀도 보는 그 천신은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사람이 제일 뛰어나다 할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을 할 수 있어도, 예호바의 그 뜻을 거역하여 눈이 그 죄로 멀어버린 우리는 어쩌면 봉사같이 되어버려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제자리를 맴돌거나 방향이 없이 떠도는 자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도 보는 예호바 엘로힘을 못 보고, 못 느껴서 죄를 서슴없이 짓습니다. 그 죄가 무엇일까요??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다'라는 '핫타트'(הטאת)라는 말이라고 하는데요. 예호바 엘로힘의 뜻에 부합되지 못하고 빗나갔음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우리 나라의 장단의 빠르기를 '한배' 라고 하는데 화살이 꽂히는 속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왜 똑같은 말을 여러 세대에 걸쳐서 반복하셨는가 생각해 봤을 때, 반복적으로 친절히 가르쳐 주신 것도 있고, 똑같은 죄를 반복하기에 항상 반복적으로 이 쪽으로 오라고, 자신에게로 오라고 하신 거 같습니다. 우리가 그 반복을 보면서 우리의 기억이 항상 무뎌짐을 생각하며 예호바 엘로힘의 그 말씀을 반복적으로 읽어야 겠습니다. 성경에서 계속 '애굽에서 이스라엘 너희를 구원한 예호바다.' 계속 반복적으로 말씀하시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것을 잊고 항상 예호바 아닌 다른 신(神/god)을 섬기려고 어그러진 길을 가서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에게는 언어를 주셨습니다. 다양한 표현을 하여 그 언어로 못하는 게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림보다 음악보다 행동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할 수 있는 언어를 말입니다. 그 언어로 예호바의 그 뜻을 전하셨고, 지금 우리에게 성경말씀으로 전하고 계십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윌리엄 틴데일'이 화형을 당할 수도 있는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지금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많이 떠들석 합니다. 진짜 역사니, 가짜 역사니 하고 말입니다. 학자의 길은 그래서 머물러 있으면 안 되는 거 같습니다. 광맥을 캐는 광부의 마음으로...물을 찾아 땅을 파는 물이 갈급한 사람의 마음으로 찾을 때 그 때 찾아지는 것이고, 듣고 싶은 자가 읽고 싶은 자가 진정한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역사가 많은 전쟁과 화재와 소실로 인하여서 많이 파괴되어 진정한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어도, 지나간 역사를 다른 이야기로 바꿔버린다고 해서 그 과거를 현재에서 바꿀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호슈아가 하늘로 '올리움'을 받은 후에 사도들이 그 말씀을 기록하고 그것을 지킨 '카도쉬'(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의 핍박을 받으며 '카타콤', 지하동굴에 은신하며 그 말씀을 지켰습니다. 하지만 로마가 그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면서 핍박을 하지 않자 카타콤에 있는 사람들은 지상으로 나왔고, 그 성경기록들을 그 로마황제 '콘스탄틴'이 다 모아서 불태우거나 변개시켰습니다. 그는 유대교와 태양신을 믿던 자신의 어머니 '헬레나'의 신앙과 접목시켜 그것을 카톨릭이라 부르고 성경기록들은 마음대로 학자들을 시켜서 변개시켰습니다.

만약에 동로마, 콘스탄틴노플이 서로마의 침략을 받았을 때, <헬라어 표준원문성경>을 러시아로 이전시키지 않았다라면, 지금 우리가 읽는 성경은 그마저도 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원래 사도시대 때 쓰였던 그 성경이 반드시 한 권 정도는 이 땅에 남아있지 않을까요?? 역사교과서의 진위를 따지는 만큼, 성경기록의 원류를 찾는 것도 그만큼 중요한 것이고 값진 것이라 생각합니다. 언어라는 것은 수학공식보다 더 정확하고 날카로운 기록이기에 말입니다.

    11:1When Israel was a child, then I loved him, and called my son out of Egypt.

    11:1이스라엘이 한 아이었을 때, 내가 그를 사랑하였고,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도다.

    11:2As they called them, so they went from them : they sacrificed unto Baalim, and burned incense to graven images.

    11:2부르는 그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그 선지자들 앞에서 떠났가도다. 곧 그들은 바알을 향하여 희생제를 드렸고, 새긴 형상들에게 분향하였도다.

    11:3I taught Ephraim also to go, taking them by their arms; but they knew not that I healed them. (HOSEA 11:1-3, King James Version)

    11:3내가 또한 에프라임 그들의 팔들을 잡고서 걷기를 가르쳤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을 고쳐주는 줄울 알지 못하였도다. (호세아經 11:1-3. 킹제임스 정재선역)

<2015.10.25/오후에>

 
 
<Created/20151025> <Updated/2015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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