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광야 복음선교문서 컬렉션 3]

'이제부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해 오셨고,
우리에게 은혜를 통하여 영존하는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셨던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가 너희 마음들을 위로하시고,
너희를 모든 선한 말씀과 일 안에 세우시니라.'
(데살로니카후서 2:16-17 / KJV화중광야역)

성경에서 구원처럼 복잡다단한 주제는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성경번역이 얼마나 중요한 지는 한국기독교가 130여년을 지나오면서, 아직도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한글로 된 '최선의 번역본'(The Best Translation)이 나오지 않았음에 돌이켜 봐야 할 것이다. 필자가 말하는 '최선의 번역본'이란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 시간' 곧 '크로노스' 안에 숨겨놓으신 그 비밀이 풀려지도록 밝혀 놓은 번역본을 말한다. 다음에 공개하는 성경기록도 아직도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필자가 다년간 성경을 연구해오고 번역해오는 과정에서 계속 살펴보고 상고해 본 결과, 이제는 떳떳하게 풀어서 밝히 드러냄이니, 혹여 이해가 안된다 하더라도 '그 말씀의 초보'(히브리서 5:11-14)에 머물지 않기를 당부하는 바이다. 샬롬. (2007.8.7/ 정재선 목회자)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 가라' (빌립보서 2:12)

2:12 Wherefore, my beloved, as ye have always obeyed, not as in my presence only, but now much more in my absence, work out your own salvation with fear and trembling.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받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순종해 왔듯이, 내가 갔을 때(G3952/παρουσια) 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도(G666/απουσια) 더욱 더 두려움과 떨림으로 너희 자신의 구원을(구원에 관하여) 이루어 가라(완성하라/성취하라=G2716/work out=κατεργαζομαι).

1. 사도 바울이 본 <빌립보서>를 기록한 장소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되어 있지 않다. 혹자는 카이사랴, 혹자는 에베소서라고 생각하나 <1:13>을 볼 때, 의심할 바 없이 로마임이 틀림없다. 위 본절에서는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대영을 받아 전하는 예수님의 메시지이다.

내가 갔을 때(G3952/παρουσια):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를 상징한다. 이 용어 '파루시아'(παρουσια)는 본 <빌립보서 1:26>에 언급되어 있다:

1::26 That your rejoicing may be more abundant in Jesus Christ for me by my coming to you again.

1::26 이는 내가 너희에게 다시 감으로써 너희 기쁨이 나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더욱 풍성하게 하게 함이라.

여기에서 감으로써(coming)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지만, 가고 있는(오고 있는) 진행형인 동명사임을 엿볼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의 표상인 것이다. 예수님이 더디 오심을 비유로 전하셨다(마태복음 25:14-30). 예수님이 '마지막 때'의 상황을 예언하실 때,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다(마태복음 24:3):

24::3 And as he sat upon the mount of Olives, the disciples came unto him privately, saying, Tell us, when shall these things be? and what shall be the sign of thy coming, and of the end of the world?

24::3 그리고 그분(예수님)이 올리브산 위에 앉으셨을 때, 그 제자들이 그분을 향하여 따로 이르러, 말씀드리기를, "우리에게 알려주소서. 이런 일들이 언제 있을 것입니까? 그리고 주님이 오심(다시)과, 그 세상의 그 끝의 그 표적이 무엇일 것입니까?" 하였다.

위 구절에서 주님이 오심(다시)'파루시아'(παρουσια) 용어가 최초로 언급되었으며, 신약에 모두 24회(2x12)인용된다(마태복음 24:3,27,37,39. 고린도전서 15:23; 16:17. 고린도후서 7:6,7; 10:10. 빌립보서 1:26; 2;12. 데살로니카전서 :2:19; 3:13;4:15; 5:23. 데살로니카후서 2:1,8,9. 야코보서 5:7,8. 베드로후서 1:16; 3:4,12. 요한일서 2:28). 프토레미 기간부터 주후 2세기에 이르는 파피루스 사본에 의하면, 이 용어는 왕이나 황제 혹은 주요 인사의 '도착'이나 '방문'을 의미하며, 혹자가 생각하고 있는 신약 용어는 아니다.

내가 없는 지금도(G666/απουσια): '아푸시아'(απουσια)이 용어는 '부재'(不在)는 동사 '아페이미'(απειμι=G575απο/~로부터 + G1510ειμι/존재하다. 머물다) '떠나 있다'를 의미한다. <빌립보서 1:27>에 언급되어 있다:

1::27 Only let your conversation be as it becometh the gospel of Christ: that whether I come and see you, or else be absent, I may hear of your affairs, that ye stand fast in one spirit, with one mind striving together for the faith of the gospel;

1::27 오직 너희의 행위가 그리스도의 그 복음에 합당하게 할지니, 이는 내가 가서 보든지 혹은 떠나 있든지, 너희에 관한 일들을 듣고자 함이니, 곧 너희가 한 영 안에 아울러 한 마음으로 굳게 서서, 그 복음을 믿는 그 본질을 위하여 함께 힘쓰는 것이라.

그러나 그분이 지금도 오고 계심을 깨달아야 한다. 이처럼 다시 오고 계시는 동안, 그 사이 참그리스도인인 너희 신부는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가라는 것이다. 신랑이 오고 계심을 깨달았으니, 비록 더디 오지만 반드시 온다 함은 기정 사실이니, 어찌 두렵고 떨림이 없으리요! 설레임 속에 안절부절하면서, 신부가 신랑을 맞아서 연합(한몸)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 바로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가라는 경고인 것이다. 신부가 갖추고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태가 이 말씀 속에 담겨져 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마땅히 예비하고 있어야 할 조건인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가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는 것인가?

1) 영원한 구원의 근원 곧 원인자이신 예수님의 본을 따라야 한다(히브리서 5:9):

5::9 And being made perfect, he became the author of eternal salvation unto all them that obey him;

5:9그리고 완전하게 되심으로, 그분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들을 위하여 영원한 구원의 그 근원(원인자)이 되셨다.

2) The Geneva Bible: The Annotated New Testament(1602):

He is said to make and end of his salvation, which runneth in the race of righteousness. (그분은 의의 경주 안에서 달리시는 자신의 구원의 한 마침을 이루셨다.)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가라.'고 하는 위의 풀이는 1602년에 발행된 <제네바성경>의 풀이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이 경주로를 포기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선포하였다(고린도전서 9:24-27):

9::24 Know ye not that they which run in a race run all, but one receiveth the prize? So run, that ye may obtain.

9::24 한 경주로에서 달리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한 사람만 상을 받는 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같이 달리라.

9::25 And every man that striveth for the mastery is temperate in all things. Now they do it to obtain a corruptible crown; but we an incorruptible.

9::25 이기려고 힘쓰는 자마다 모든 일들에 자제하나니, 이제 그들은 변질될 한 월계관을 받으려 하지만, 우리는 변질되지 않을 한 왕관을 받고자 함이라.

9::26 I therefore so run, not as uncertainly; so fight I, not as one that beateth the air:

9::26 그러므로 내가 이같이 달리되, 방향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이같이 싸우되,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9::27 But I keep under my body, and bring it into subjection: lest that by any means, when I have preached to others, I myself should be a castaway.

9::27 오직 내가 내 몸을 억제하여 복종케 함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선포한 후에, 나 자신이 버림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라.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가라.' 본절은 구원에 관해서 하나님과 인간의 두 측면이 함께 결합된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인 '주권적 의지' 곧 '불레'(βουλη)는 인간의 '선택적 의지' 곧 '델레마(θελεμα)와 대립(적대)되는 것이 아니라, 용납(합일)되는 것이다.

"믿음이 의로워지면, 행위들은 고난의 그 열매인 것이다."(Faith justifies and works are the fruit of faith./ The Universal Bible Commentary, p.519) 그렇다면 이 '행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로 '고난들'을 의미한다. 이로써 믿음이란 '고난의 열매'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성경적인 실례가 바로 야콥의 고난이다(히브리서 11:9):

11::9 By faith he sojourned in the land of promise, as in a strange country, dwelling in tabernacles with Isaac and Jacob, the heirs with him of the same promise:

11::9 믿음으로 그는 한 타국 안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그 땅 안에서 머물며, 그 동일한 약속의 상속자들인 이삭과 야콥과 더불어 장막들 안에 거주하였으니,

'믿음' 곧 '고난의 행위들을 통하여 얻어 낸 그 열매'가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고 한다(히브리서 11:6). <창세기 47장>은 야콥의 "그 고난의 열매"를 입증하게 된 "그림자"를 예표한 것이다. 후에 이 약속의 성취됨을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11:22>에서 요셉을 인용함으로서 밝히 드러난다. 이것을 "하나님의 첨가하심"(Divine Adding)이라 부른다: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야콥과 구분됨)의 자손들이 떠날 것을 언급하였고, 자기 뼈들에 관하여 당부하였다."



'창조자이신 엘로힘' 하나님은 인간이 불순종하여 죄를 면치 못하게 되었어도, '그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다(요한복음 3:16). 인간은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자신의 죄를 깨끗이 할 수 없다. 이렇게 단절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시고자 하는 것이 '엘로힘 하나님'의 인간 구원의 계획이다.

그런데 이 회복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만이 가능하게 된다.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고 선하심으로 인하여,(관련찬송 aod0.gif) 인간에게 한 뼘의 죄라도 묻어있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면 불순종의 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겠는가? 인간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그 나무>에 달려 죽음에 이르렀을 때, 무리들(유태인들과 로마 병정들)에게 보여주심으로써 확증되어 진다(마태복음 27:39-44):

27:39 And they that passed by reviled him, wagging their heads,

27:39 그리고 지나가던 자들이 머리를 흔들면서, 그 분을 모욕하여,

27:40 And saying, Thou that destroyest the temple, and buildest it in three days, save thyself. If thou be the Son of God, come down from the cross.

27:40 말하기를, "성전을 헐고, 삼일만에 다시 짓는다던 자여, 네 목숨이나 구하라. 만일 네가 하나님의 그 아들이거든, 그 장대로부터 내려와 보라." 하더라.
 <'십자가' 용어 대신 '장대'로 번역해야 함>

27:41 Likewise also the chief priests mocking him, with the scribes and elders, said,

27:41 또한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이와 같이 그분을 조롱하며, 말하기를,

27:42 He saved others; himself he cannot save. If he be the King of Israel, let him now come down from the cross, and we will believe him.

27:42  "그가 다른 사람들은 구원 하였으면서도, 자기 목숨은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만일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면, 지금 그 장대로부터 내려와 보라고 하라. 그러면 우리가 그를 믿겠노라.
<'십자가' 용어 대신 '장대'로 번역해야 함>

27:43 He trusted in God; let him deliver him now, if he will have him: for he said, I am the Son of God.

27: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였으니,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원하시면, 당장 그를 구원하시게 하라. 이는 그가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그 아들이라.' 하였음이라." 하였다.

27:44 The thieves also, which were crucified with him, cast the same in his teeth.

27:44 그분과 함께 죽음에 못박힌 그 도적들도 이와같이 그분을 모욕하더라.
<'십자가' 용어 대신 '장대'로 번역해야 함>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중보자(MEDIATOR)가 필요하다. 인간의 편에 서서 인간 대신 고난을 받고, 그 죄의 대가를 치룰 중보자 말이다. 과연 어느 누가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을 대신할 수 있겠는가?

맞다. 한 분이 계셨다. 살아계신 속제제물로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을 감찰하시면서 무기력과 의심과 공포를 달래시면서 '하나님 그 아버지'에게, "아버지,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이 잔을 나로부터 옮기소서. 그러나 나의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Father, if thou be willing, remove this cup from me: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thine, be done.) (누가복음 22:42)라고 간구하셨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아끼시는 '독자'(시편 22:20)이셨다. '예수' 이름 자체가 '구원자'(SAVIOR)이시다.  이 분을 통하지(거치지)아니하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요한복음 14:6).

이것을 가리켜 '창조자 엘로힘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라고 부른다. 이 구원의 계획 속에는 14가지의 조건들이 선행된다. 반면에, 하나님은 성도에게 이 과정 속에서 다음과 같이 '9가지 반응'을 보여줘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을 가리켜 '약속자 예호바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선택적 의지'라고 부른다.이 선택적 의지는 성도 각자에게 주어진 선택권이기 때문에, 너희 자신의 구원을(구원에 관하여) 이루어 가라(완성하라/성취하라=G2716/work out=κατεργαζομαι)는 마지막 통첩인 것이다. 이 과정은 하나님의 소관이 아니다. 이 부분은 성도 자신의 의무들 곧 성도 자신의 '행함들'(works)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행함들 곧 '연단, 인내, 시련과 시험을 이겨내며, 한편으로 유혹의 회피 내지 극복'이 없으면 그 믿음은 헛된 것이요, 죽은 것이기에(야고보서 2:20), 그러니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것이다.

'네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 가라.'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이루어가는' 것인가?:

첫째, 인내를 완전히 이루라. 이것은 사도 야코보의 권면이다(야코보서 1:2-4):

1:2 My brethren, count it all joy when ye fall into divers temptations;

1:2 나의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들에 빠질 때에 그것을 다 기쁘게 여기라.

1:3 Knowing this, that the trying of your faith worketh(G2716=κατεργαζομαι) patience.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이루는 줄 너희가 알게 됨이라.

1:4 But let patience have her perfect work(G2041=εργον), that ye may be perfect and entire, wanting nothing.

1:4그러나 인내 자체를 완전히 이루라(완성/종착에 이름). 이는 너희로 완전하고 갖추어져 아무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과정에서 성도는 시험받음을 기쁨으로 여기라는데는 그 만한 이유가 선행된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해 놓으신 '생명의 왕관'(고린도전서 9:25. 디모데후서 4:7-8 참조)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야코보서 1:12). 반면, 유혹과 미혹은 죽음을 낳기 때문에 절대 피하라는 조건을 제시한다.(야코보서 1:13-15).

둘째, 고난을 참으라. 이것은 사도 베드로의 권면이다(베드로전서 2:19-21):

2:19  For this is thankworthy, if a man for conscience toward God endure grief, suffering wrongfully.

2:19 따라서 만일 어느 누가 부당하게 고난을 받더라도, 하나님이 계신 것을 깨달아 참으면, 그것은 칭찬할 만 하도다.

2:20 For what glory is it, if, when ye be buffeted for your faults, ye shall take it patiently? but if, when ye do well, and suffer for it, ye take it patiently, this is acceptable with God.

2:20  따라서 너희가 너희 잘못들로 인하여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영예가 있겠느냐? 그러나 만일 너희가 선을 행하다가, 그것으로 인하여 고난을 받고, 너희가 그 고난을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니라.

2:21 For even hereunto were ye called: because Christ also suffered for us, leaving us an example, that ye should follow his steps:

2:21 따라서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그리스도도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으사, 우리에게 한 본을 남겨 놓으시어, 너희로 그분의 발자취들을 따라오게 하셨음이라.

셋째, 많은 적그리스도들을 주의하라. 이것은 사도 요한의 권면이다(요한1서 2:18):

2:18 Little children, it is the last time: and as ye have heard that antichrist shall come, even now are there many antichrists; whereby we know that it is the last time.

2:18  어린 아이들아, 마지막 때가 되었도다. 그런데 적그리스도가 올 것이라 너희가 들어옴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들이 일어났으니, 이로써 우리가 마지막 때임을 아느니라.

너무도 잘 알려진 용어 '적그리스도' 곧 'antichrist'(G500=αντιΧριστοζ)는 '메시야'에 대한 반대 용어이다. 본 용어는 성경기록 속에서 단 5회(4회 단수형=antichrist 1회 복수형=antichrists) 언급된다. 이 용어는 사도 요한에 의해서, 그의 서신서 중에서 두 곳에서만 인용된다. 본절에서 사도 요한은 기독교에 대적하는 이교도들이나 타종교인들에 관해서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적그리스도의 영'(spirit of antichrist)에 의해서 빗나가 버렸던, 다시 말해서 참다운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부터 떨어져나가 버렸던 사람들에 관해서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아니라, 그들의 배도(背道)에 의해서 적그리스도들 가운데 있게 된 자들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적그리스도는 '하나의 대적의 세력'(a hostile force)이지, '하나의 특정 인물'(a specific person)이 아니다. 요약하면, 적그리스도는 '하나의 거짓 가르침'( a false teaching)인 것이다.

<요한계시록 1:9>에서 사도 요한은 "환난과 예수 그리스도의 그 왕국과 인내에 동참한 자인 나 요한"(I John, who also am your brother, and companion in tribulation, and in the kingdom and patience of Jesus Christ, )이라고 소개한다. 이처럼 고난과 환난이 동행하고 있음은 무슨 까닭인가?

넷째, 그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우라. 이것은 사도 유다의 권면이다(유다서 1:3):

1:3  Beloved, when I gave all diligence to write unto you of the common salvation, it was needful for me to write unto you, and exhort you that ye should earnestly contend for the faith which was once delivered unto the saints.

1:3 사랑받는 자들아, 같은 구원에 관하여 내가 너희에게 글을 쓰려는 마음이 간절하던 차에, 그 성도들에게 단 한번 전해진 그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고 너희에게 편지를 써서 너희를 권면해야 할 필요를 느꼈도다.

"그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한다" 함은 믿음의 길을 완전히 보존하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투쟁하라는 당부이다. 유다는 그 당시 '성도의 모임' 속으로 몰래 들어온 '영지주의'(Gnoticism)에 대한 경고로서 이 서신을 기록하였다.(4절). 영지주의의 이원론은 성경의 근본 가르침과 정면 대치된다. 첫째, 그것은 유일신인 엘로힘에 의한 창조 가르침과 모순된다. 둘째, 인간의 몸은 악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은 실재가 아닌 가현(假現)이었을 것이라는 낭설을 유포시켰다. 영지주의가 성경의 기르침에 끼친 영향은 두 가지이이다. 첫째, 인간에게는 도덕이 필요없다는 도덕 폐기론이다. 둘째, 영적 성장을 위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주장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약성경 마지막 부분에서 '시험은 기뻐하고 유혹은 절대 피해야 하는' <야코보서> 속에는, '믿음의 인내와 연단과 시련을 극복해야 하는' <베드로전,후서> 속에는, '영적 성장을 위하여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가르침을 피해야 하는' <요한1,2,3서> 속에는, 그리고 '그 믿음을 위하여 힘써 싸워야 하는' <유다서> 속에는...이와 같은 성도의 구원의 완전함을 이루어가기 위한 '환난과 고난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성도의 죽음 곧 '순교를 상징하는 고난과 환난'으로 점철되어 진다.

식물이 햇빛과 어둠을 동시에 흡수함으로써 자라고 열매를 맺듯이 '성도의 모임'은 복음과 환난을 겸하여 섭취함으로써 성장하고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어둠이 없으면 곡물이 알곡이 되기 어렵듯이, 성도도 고난과 환난이 없으면 '하나님의 그 왕국의 알곡'이 되기 어렵다. 성도는 고난과 환난 속에서 더욱 더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는 것이며, 이로써 구원을 체험하게 되고, 믿음이 견고하여 지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믿음'을 양식으로 먹고 살아간다. 그리고 이 믿음에는 반드시 '환난과 고난'이 따르게 된다. 다시 말해, 믿음을 가진 자는 필수적으로 환난을 각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성도의 구원을 완성시키시기 위해' 환난이라는 필수과정을 두셨다. 믿고나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그에게는 틀림없이 환난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옛사람을 죽이게 되고 성화되어 가기 때문이다(로마서 5:3-4):

5:3 And not only so, but we glory in tribulations also: knowing that tribulation worketh patience;

5:3 그리고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환난(고난)들 속에서도 즐거워함이니, 이는 환난(고난)이 인내를 완전히 이룸을 알게 함이요,

5:4 And patience, experience; and experience, hope:

5:4 그리고나서 인내는 연단을 완전히 이루고, 그리고 나서 연단은 소망을 완전히 이룸을 알게 함이라.

사도 바울이 위에서 언급한 것은 믿음과 환난(고난)의 밀접한 상관관계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환난과 고난은 성도에겐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거쳐온 길이다.

<순교자들의 거울>(Martyrs Mirror/Thieleman J. van Braght/pp.63-99)에 보면, 사도 야코보는 주후 63년에 예루살렘 안에서 '돌로 쳐죽임과 매를 맞아 순교하였다.'(stoned and clubbed to death). 사도 베드로는 주후 69년에 네로의 명령으로 로마에서 거꾸로 매달려 죽는다(being crucified upside down in Rome on order of Nero). 사도 요한은 주후 97년에 밧모섬으로 유배당하였다(abandoned on the isle of Patmos).

어렇듯 초대 '성도의 모임의 역사'(Congregation/ '교회' 용어는 올바르지 않다)를 보면 그들 역시 수 많은 고난과 환난 속에 노출되어 있어야 했다. '성도의 모임'은  피의 역사이며, 순교자의 피를 거름으로 펼쳐왔던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마지막 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시편>은 '고난받음이 좋은 것'(유익함)이라고 말씀하신다.(시편 119:65-72):

119:65 Thou hast dealt well with thy servant, O LORD, according unto thy word.

119:65 오 주님,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주님의 종을 선하게 대하셨나이다.

119:66 Teach me good judgment and knowledge: for I have believed thy commandments.

119:66 나에게 선한 판단과 지식을 가르치소서. 이는 내가 주님의 계명들을 믿어왔음이나이다.

119:67 Before I was afflicted I went astray: but now have I kept thy word.

119:67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빗나갔으나,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켰나이다.
('고난을 당하고 난후로는 주님의 말씀을 깨달았다'는 고백) (비교/히브리서 12:6-11)

119:68 Thou art good, and doest good; teach me thy statutes.

119:68 주님은 선하시어, 선을 행하시오니, 주님의 규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119:69 The proud have forged a lie against me: but I will keep thy precepts with my whole heart.

119:69 교만한 자들이 나를 대적하여 거짓말을 날조하였으나, 나는 내 온마음으로 주님의 법규들을 지키리이다.

119:70 Their heart is as fat as grease; but I delight in thy law.

119:70 그들의 마음은 지방처럼 기름졌으나, 나는 주님의 법 안에서 기뻐하나이다.

119:71 It is good for me that I have been afflicted; that I might learn thy statutes.

119:71 내가 고난을 당해 온 것이 내게 좋으니, 이는 내가 주님의 규례들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나이다.

119:72 The law of thy mouth is better unto me than thousands of gold and silver.

119:72 주님의 입의 그 법이 내게는 수천의 금과 은 보다 낫나이다.

고난받음이 좋은 이유는 주님의 규례들, 곧 주님의 말씀들을 깨닫게 되는 지름길이라고 다윗은 고백한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징계와 책망을 중시하라고 권면한다.(히브리서 12:6-11):

12:6 For whom the Lord loveth he chasteneth, and scourgeth every son whom he receiveth.

12:7 If ye endure chastening, God dealeth with you as with sons; for what son is he whom the father chasteneth not?

12:8 But if ye be without chastisement, whereof all are partakers, then are ye bastards, and not sons.

12:9 Furthermore we have had fathers of our flesh which corrected us, and we gave them reverence: shall we not much rather be in subjection unto the Father of spirits, and live?

12:10 For they verily for a few days chastened us after their own pleasure; but he for our profit, that we might be partakers of his holiness.

12:11 Now no chastening for the present seemeth to be joyous, but grievous: nevertheless afterward it yieldeth the peaceable fruit of righteousness unto them which are exercised thereby.

<요한계시록>은 그러한 환난과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려고 기록해 놓은 것이다.

아울러 마지막 때의 성도들은 환난과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과 고난을 이겨내야 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그것들을 이길 수 밖에 없는 것은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6:33):

16:33 These things I have spoken unto you, that in me ye might have peace. In the world ye shall have tribulation: but be of good cheer; I have overcome the world.

16:33 이러한 말들을 내가 너희를 향하여 전해 왔음은, 내 안에 너희가 평안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라. 그 세상 안에 너희가 환난을 갖을 것이나, 오직 담대하라. 이는 내가 그 세상을 이겨냈음이라."

<요한계시록 2-3장>이 보여주는 일곱 교회들의 모습은 마지막 때, 예수님이 다시 오시기 직전의 성도들의 신앙 상태를 미리 보여주신 것이니, 반드시 '이겨내는 자'만이 하나님의 그 왕국에로 입성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일곱교회

예수님의 책망

성도의 이겨냄

하나님의 상급

에베소의 교회(계2:1-7)

일곱별과 일곱등잔대를 가지신 분-너의 첫 사랑을 떠남(계2:4)

니콜라파의 행위들을 미워하라(계2:6)

생명의 그 나무의 것을 먹도록 함(창3:1,11,12)

서머나의 교회(계2:8-11)

그 첫째요, 그 마지막이신 분-장차 받을 고난들을 두려워 말라(계2:10)

죽기까지 신실하라(계2:10)

들째 죽음으로 해를 받지 아니함(계2:11)

버가모의 교회(계2:12-17)

양날의 그 날카로운 검을 가지신 분-발람과 니콜라파의교리를 붙잡음(계2:14)

회개하라(계2:16)

만나의 것을 먹도록하고, 한 개의 이름이 새겨진 한 개의 줌(계17)

두아디라의 교회(계2:18-29)

양눈이 불꽃같고 양발이 빛나는 놋같은 하나님의 그 아들-이세벨을 용납하여 우상들에게 바쳐진 제물들 먹음(계2:20)

자기들을 행실들을 회개하라(계2:22). 이미 받아들인 것을 굳게 붙잡으라(계2:24)

민족들을 다스리는권능부여(계2:25). 그 새벽별을 줌(계2:28)

사데의 교회(계3:1-6)

일곱영들과 일곱별들을 가지신 분-네 행위들이 완전하지 못함(계3:2)

네 행위들을 회개하라(계3:3)

흰 옷을 입음, 생명의 그 책에서 그의 이름이 지워지지 아니함(계3:5)

빌라델비아의 교회(계3:7-13)

다윗의 그 열쇠를 가지신 분-유태주의자들에 의하여 배교의 위험에 빠짐(계3:8-9)

네가 가진 것을 붙들어서, 아무도 네 왕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계3:11)

새 예루살렘과 새 이름을 그 사람 위에 기록(계3:12)

라오디게아의 교회(계3:14-22)

아멘이시요, 진실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그 시작이신 분-네 행위들이 차지도 뜨겁지도 아니하고 미지근함(계3:15-16)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계3:18-19)

내 보좌 안에 함께 앉힘(계3:20)


3.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그런데 일반적으로 '예수를 믿기만 하고(사도행전 16:31), 그 믿음을 기초로 해서 은혜로 구원받으면(에베소서 2:8)' 그냥 '천국'(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 입성하게 된다고 한다면, 신약성경에서의 <야코보서> <베드로전,후서> <요한1,2,3서> 그리고 <유다서>의 존재 가치와 필요성이 모호해지지 않겠는가! 여기에 한 성도의 간증을 싣는다:

<행위와 믿음에 대한 기존교회들의 잘못된 가르침>

"행위들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야고보서 2:20)

위의 말씀을 기존교회에서는 이렇게 가르쳤다.

"여러분들은 믿음이 있습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왜 주일예배에 참석하시지 않습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왜 전도를 안 하십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왜 기도를 안 하십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왜 십일조를 안 하십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왜 헌금을 안 하십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왜 교회 행사에 빠지십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왜 거룩한 생활을 하시지 못합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왜 거짓말을 일삼습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왜 형제자매를 미워합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자녀들이 왜 좋은 직장 좋은 대학 못갑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왜 성공 못합니까?
믿음이 있다고 하시면서...

<야코보서>에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행위로 보이라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믿음을 행위로 나타내십시오. 헌금도 많이 하고
기도도 많이 하고, 십일조도 꼭 빠짐없이 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축복하셔셔 사업도 번창하게 해주시고, 자녀들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이런식의 행위들(종교적 행위 또는 믿음에 의한 축복타령)을 강조하면서
믿음에 대한 것도 행위에 대한 것도 전혀 성경적으로 가르치지 못했다.
분명히 기존교회에서 배우기를 은혜로 구원받기에 예수믿으면
또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간다는 전제 아래에서
종교적 행위도 중요함을 배웠었다.(여기서의 종교적 행위는 성화의 과정이라고함)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는 행위는 고난이며(마태복음 24:9),
이 고난의 열매가 믿음이라고 한다.(히브리서 11:22).

이제야 이해가 간다.
행위라는 말 자체를 행위 그대로 (거룩으로 치장한 종교적 행위들:
십일조, 헌금, 선교, 기도, 전도, 모임에 빠지지 않기, 주일성수 등등) 받아들임으로 종교적 열심으로 해석해, 버려서 성도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게 했다.

그리고 믿음을 하나의 맹목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 믿기지 않아도 일단 믿어라. 그래야 천국간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씀을 들어왔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이 성경을 바로 파헤치지도 않고,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함으로서 성도들로 하여금 혼란(예수를 믿기만 하면
천국간다 해놓고 또 무슨 행위냐? 이거 앞뒤가 안맞잖아!)을 야기시켰다.

이토록 신앙에 있어 기본적인 믿음과 행위의 뜻도 바로 알지도 못하고,
설교강단에 서서 비진리를 전하는 목회자들과 그 비진리를 진리인양(그저 목사님 말씀이니까 다 맞겠지...하며 자신은 전혀 성경을 연구하지 않음)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모습을 볼 때에 너무나 안타깝다.

이 귀한 말씀들이 어서 어두운 이 땽에 뿌려져 열매맺을수 있기를 오늘도 간절히 간절히 기도한다. (2006.1.18)

위에서 보듯이, 이 과정들인 '행함들'을 이런 식으로 전한다면, 너무나 성경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이 과정들인 '행함들'속에는 한 가지 유일한 조건 내지는 규율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순종을 본받아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 하도록 간구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도움으로(in Christ) 필히 성도는 자신이 연단, 인내, 시련을 통하여 유혹은 피하며, 고난을 하나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여 극복해 나가야 하는 이 과정을 일컬어서 너희 자신의 구원을(구원에 관하여) 이루어 가라(완성하라/성취하라)라고 사도 바울은 이 '행함들'을 '경주로'에 비유하면서, 마지막 '우승자가 되어 썩지 아니할 왕관'을 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권면하고 있다.(고린도전서 9:25. 디모데후서 4:7-8).

<Created/20060115> <Updated/2007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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