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대한민족이여!! 깨어나라!!] 2015년 7월 5일, 독일 '본' 월드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제39차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는 일본이 신청한 23개 근대산업시설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에 등재된 유적 23곳 중 7곳이 <한국인 징용자들이 고통을 당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배려는 없었다. 지나간 역사적 유물을 필적해 올라가 보니...일본은 1592년을 시발로 하여, 본격적으로 <한반도침입>을 시도해 오고 있다!! 우리는 속칭 <7년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대사건을 <임진왜란/임진란>이라 일컬어 왔다.

이에 관한 우리의 역사적 조명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데 반하여, 일본은 공영방송 <NHK>를 이용하여 꾸준하게 한반도 침공을 '미화시켜'(??) 오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3년의 <야에의 벚꽃>(八重の桜)를 위시해서, 2014년의 <군사 칸베에>(軍師官兵衛)에 이어서, 현재 방영중인 2015년 <花燃ゆ>(꽃타오르다)를 시청한 본 필자는 '모두가 한반도침공과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는 당연성을 위장시키는 일본 국가전략의 일환'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대한민국의 공영방송의 대책은 고작 단조로울 뿐이었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주도했던 <삿초도히>(薩長土肥) ㅡ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조슈번-야마구치현, 도사번-고치현, 히젠번-사가현·나가사키현)> ㅡ 그 중에서도 옛 조슈번(長州藩/현재 야마구치현/山口県) 하기시(萩市)의 <쇼카손주쿠>(松下村塾)학숙(學塾)과 사무라이 마을인 <조카마치>(城下町) 두 곳을 우리는 필히 주목해야 한다.

쇼카손주쿠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만든 학숙으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의 주역을 길러낸 곳이고, 조카마치는 이들이 살던 곳이다. 쇼카손주쿠를 만든 '요시다 쇼인'은 '정한론(征韓論)의 원조'로 지목되는 사람이다. 도쿠가와 막부에 의해 참수된 그는 감옥에서 '국력을 배양해 취하기 쉬운 조선·만주·중국을 복속시키고, 열강과의 교역에서 잃은 국부와 토지를 조선과 만주에서 보상받아야 한다'라는 유훈을 제자들에게 남겼다.

[필독관련자료] 1.<제2임진란>과 <대저주>가 드러나고 있다!! (자세히보기). ㅡ 2.[花中曠野 大河秘史 - 들새바람 '野風'] 미륵불(彌勒佛)이시여, 속히 이 땅에 오시오소서!! <인트로> (자세히보기). ㅡ 3.역사는 살아 숨쉰다(1) - '꽃타오르다'(花燃ゆ) (자세히보기).

요시다 쇼인과 함께 주목할 인물은 그의 수제자로 메이지유신의 주역인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이다. 이번에 쇼카손주쿠와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하기시의 조카마치는 '다카스기 신사쿠'가 살던 마을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현 일본총리의 이름 중 '晋'자는 '다카스기 신사쿠'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만큼 아베 가문에서 존경했던 인물이다.

막부와 싸운 '다카스기 신사쿠'의 쇼카손주쿠 후배들이 이후 메이지 시대를 주름잡는다. 대표적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그는 역사대(씨름꾼으로 구성된 부대) 대장이다. 기병대 본대의 군감이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는 일본 육군의 대부가 된다. 조선 공사를 지낸 '미우라 고로'(三浦梧楼/명성태황후 암살 주모자)도 포대장으로 참전한 바 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내각을 장악하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일본 군부를 장악해 <메이지시대>를 이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와의 악연이다. 쇼카손주쿠를 중심으로 한 조슈파벌은 조선침략에도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명성태황후 암살>의 기획자인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와 이를 시행한 '미우라 고로'가 바로 이곳 출신이다. 그리고 초대 조선 통감(이토 히로부미)을 비롯해, 2대(소네 아라스케/曾禰荒助)와 3대(데라우치 마사다케/寺内正毅) 통감이 모두 조슈번 출신이고, 한·일병탄 이후 초대 총독(데라우치 마사다케)과 2대 총독(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도 모두 이곳 출신이다.우리가 무관심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아울러 이 <메이지유신>의 본 배후세력이 <영국>임을 절대로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筆者)의 소신임을 다시 한번 전한다!!

그 이유는 누누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밝혀듯이, '예수회'의 마지막 목표는 '러시아의 정교'를 장악함에 있다!! 이 종교적 장악은 지금 진행중인 <뉴월드오더>의 귀결이 되는 것일 게다!! 이를 위해 <나폴레온>도 내세웠고...<히틀러>도 내세웠건만...모두가 실패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그 이전에도 '예수회'는 16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예수회신부들>을 이용해서 일본을 점령해 들어갔고...급기야 1592년에는 <임진란>을 일으켜서 한반도(조선 선조대왕) 점령을 시도했지만(임진란에 예수회 신부의 참전이 입증)...천하의 용장 <이순신 장군>의 전술과 헌신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이러한 내용은 순교하신(독살당하신) 예수회 신부 출신의 <알베르토 리베라> 선교사님의 간증록이 뒷받침해주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러한 일본과의 지난 역사의 흐름에 대항하는 어떠한 민족적인 전략이 있는가??' 2015년 8월 23일(남북고위급회담 중) 오후 2시경(??)에 <광화문광장> 한복판에 <2014년 교황시성식 기념돌판>을 묻어놓았으니...이토록 내부적으로 침투, 파고들어온(2008년부터 2015년 오늘 아니 내일까지도) 이 <암약>(暗躍)을 무엇으로 막아낸단 말인가?? 앞으로 이 대한민족(大桓民族)을 이끌어갈 중년층 세대에게는 <고의성 높은 월세와 집값>으로 인하여 은행빚을 갚는데 '매여있기'(??) 때문에...지금 이 나라꼴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궤뚫어 간파할 기회가 점점 협소해지고 있기에...다시 말해서, 대한민족적(大桓民族) 최대위기를 맞고 있기에...감히 깨달음을 묻고자, 이 필(筆)을 든 것임을 밝힌다!! 샬롬!! (2015.9.21/한낮에)


[편집자] 다음 글은 김동기님의 <120년전 명성태황후 암살사건과 강탈당한 광화문광장>입니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특히 김동기님은 본 자료를 인터넷이 없어서 현장에서 '스마트폰'으로 작성해서 보내주셨습니다!! 샬롬!!

글/ 김동기

본 필자(筆者)는 얼마 전에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이종각 지음, 메디치미디어, 2015)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을 읽고나서, 120년전 <명성태황후 암살사건>과 최근에 <광화문광장에 돌판>을 박아버리고, 한반도를 강탈해버린 예수회의 음모의 하나인 <한반도역사적사실>을 전하지 않을 수 없어 필(筆)을 들게 되었다!!

[무장 '미우라'의 서울부임]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의 경복궁 기습점령으로 청일전쟁(1894년 7월-1895년 4월)이 시작되었다. 예상을 깨고 작은 섬나라 일본이 초전부터 육전과 해전에서 압도해 나가자, 노대국 청나라는 개전 8개월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1895년 4월17일, 시모노세키에서 조인된 청일전쟁 강화조약의 주요 내용은 랴오둥반도와 타이완 등을 일본에 할양하고, 배상금 2억량(일본 화폐로 3억엔)을 지불하는 등, 수천 년간 동양의 맹주로 군림해온 청으로선 굴욕적인 패배였다.

이 기간에 남하정책을 추진 중이던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과 연대해 일본에 랴오등반도 영유권을 포기하도록 압박하였다. 일본은 삼국의 압력에 어쩔 수 없이 굴복해, 같은 해 5월 5일 랴오등반도 영유를 포기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삼국간섭>이다.

한편, 조선에서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약점이 드러나자,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물리친다는, 이른바 '인아거일'(引俄拒日) 전략이 외교의 대세를 이루어 나간다.

같은 해 8월말 단행된 '제3차 김홍집 내각'은 친일파와 민씨 세력 일색으로 바뀌었고, 친일내각이 추진하던 각종 개혁정책은 폐기되었다. 이같은 노골적인 '인아거일' 움직임으로 가장 곤혹스런 입장에 처하게 된 이는 한국(조선)에 체류하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 )였다. 그는 친일내각을 앞세워 내정개혁 등을 통해 조선 지배를 확립해 나간다는 대(對)조선정책을 가지고 있었으나 '인아거일' 전략으로 부딪힌 것이다.

'이노우에'는 조선왕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본국 정부로부터 확답도 받지 않는 채, 300만 엔이라는 거액의 기증금, 곧 차관 제공을 미끼로 던졌다. 그러나 반일친러의 흐름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노우에'의 기증금 약속은 그가 주한공사에서 면직되면서 결국 공수표가 되고 말았다.

난관에 봉착한 '이노우에' 공사의 대(對)조선정책에 대해서는, 일본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서울에 체류하고 있던 일본 낭인 등으로부터도 '청일전쟁으로 조선반도에서 흉포한 청국 세력을 물리쳤으나 그대신 보다 러시아세력을 불러들이는 헛수고를 한 결과가 되고 말았다'는 비판이 일고 있었다. <상게서, p.17-19 참조>.

그리하여 주한공사 '이노우에'를 교체하기로 결정한 일본 정부는 1895년 8월 17일, 그의 후임으로 '이노우에' 등이 천거한 예비역 육군중장 '미우라 고로'(1847-1926)를 임명한다.

◆[이미지/화중광야제공] [왼쪽] 속칭 '조슈5걸'이 영국에로 밀항해서 '밀지'를 받고 귀국하여 <메이지유신>을 일으킨다!! ㅡ [오른쪽] 메이지유신 이후 日本의 極東 征服의 主役들이다. <왼쪽끝에서 시계방향> ①總理大臣/하라 케이 ②候爵/오쿠마 시게노부 ③朝鮮初代統監/데라우치 세이키 ④陸軍元首/오야마 이와오 ⑤大公/이토 히로부미 ⑥海軍提督/토고 헤이하치로. (Arthur Judson Brother, The Mastery Of The Far East, Londom:G. Bell & Sons, 1919, p.8).


당시 일본 정계와 군부는 총리 '이토 히로부미'(1841-1909)를 비롯해서, 군부를 장악하고 있던 육군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1838-1922), 그리고 외상, 대장상, 내상 등을 거쳐 총리 임시대리를 역임한 거물 '이노우에' 주한공사 등, 조슈번(長州藩)과 사쓰마번(薩摩藩) 출신이 장악하고 있었다. 을미참변 당시 '오야마 이와오'(大山巌/1842-1916) 육군대신과 가와카미 소로쿠(川上操六/1848-1899 ) 육군참모차장은 사쓰마 출신이었고, '고다마 켄타로'(児玉源太郎/1852-1906 ) 육군차관은 조슈 출신이었다. 육군의 조슈, 해군의 사쓰마라고 일컬어졌듯이 조슈는 육군, 사쓰마는 해군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컸던 것이다.

한편, 미우라도 조슈 출신이었으나, 그는 조슈벌의 주류인 이토 총리 등과는 관계가 원만하지 않는 비주류였다. 미우라는 조선 공사로 발령 받자 3개안의 정책 의견서를 일본 정부에 제출한다. 그는 이 의견서에서 외교 문외한으로 부임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심하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때 미우라는 마음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다고 자신의 회고록에서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외교에도 조선문제도 문외한인 무장 미우라를 조선에 보낸, 이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와 군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그동안 이노우에 공사가 조선에서 추진해 왔던 회유공작의 문치적인 방식이 통하지 않는 만큼, 무단적인 방식으로 조선문제를 해결 할 수밖에 없다는 일본정부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무단적인 방식의 핵심은 바로 조선 내 러시아와의 연결고리의 정점인 명성태황후(속칭 '민 황후')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미우라가 회고록에서 밝힌 대로 임기응변할 수밖에 없다는 결심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성황후>(속칭 '민 황후')를 제거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와 다름없는 것이었다.

조선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미우라는 우익정치가 '시바 시로'(柴四朗/1852-1922 )와 사무라이(낭인)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1863-1911),
'스키나리 하카루'(月成光/1862-1910) 등 3명을 막료로 데리고 왔다는 점이다. 이들의 목적도 일본의 조선정책의 방향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을미사변에 관계한 경성수비대 중대장급 대위 이상 장교 명단]

    조선국공사관부 무관/ 구스노세 유키히코(楠瀨幸彦) 육군포병중좌
    후비보병독립 제18대대장/ 우마야하라 쓰토무(馬屋原務本) 육군보병소좌
    대대부 중대장/ 이시모리 요시나오(石森吉猶) 육군보병대위
    대대부 중대장/ 다카마쓰 데쓰타로(高松鐵太郞) 육군보병대위

    대대부 중대장/ 고이노보리 이쿠후미(鯉登行文) 육군보병대위
    제3중대장/ 마키 마사스케(馬來政) 제3중대장 예비육군보병대위
    제2중대장/ 무라이 우소(村井右宗) 제2중대장 예비육군보병대위
    제1중대장/ 후지토 요조(藤戶奧三) 제1중대장 예비육군보병대위 
    (상게서, p.35 참조)

공사 부임후, 경복궁 진입작전을 계획하고 있던 미우라 왕궁 수비하는 시위대 약 800명과 맞서기 위해서는 조선대 970여명 뿐만 아니라 일본수비대 약 600여명을 동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때문에 수비대를 임의대로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보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토 총리는 미우라 공사의 이같은 요청을 수용해, 10월 2일 '오야마' 육군대신에게 '미우라 공사가 주한 수비대 파견을 통지하면 언제든지 출병할 수 있도록 하라'는 각의 결정을 통보한다.
(상게서, p.39).

이에 따라 <대본영>은 10월5일, 미우라 공사에게 조선에 있는 일본군을 지휘, 동원하는 권한을 부여하는 훈령을 내렸다. 경복궁 침입 사흘전이었다. 이처럼 대본영의 '가와카미 ' 차장은 가장 가까운 후배 장교인 '구스노세' 중좌를 서울로 보내고, '이와오' 육군대신의 육군경 시절 약 1년간에 걸친 구미순방 동행 멤버이기도 한 '미우라' 공사와 호흡을 맞춰 <여우사냥>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9월말 조선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 훈련대 교관인 '미야모토' 소위 등 일본수비대 장교들에게 전해 준 <훈련대 열흘 내 해산>이란 정보를 바탕으로 <여우사냥 거사일>을 10월 10일로 잡았다.(상게서, p.40 참조). 이로써 '미우라' 거사 직전에 '위장극' 연출과 일본 군부와 하급 낭인들을 끌어들여 치밀하게 작전에 들어간다.

[여우사냥 최종안의 대강 및 행동지침은 다음과 같다]

    1 궁중의 간신을 제거하여 국정을 바로 잡는다고 제언하고,
    2 대원군을 괴뢰 영수로 추대, 옹위해 입궐시킨 뒤 시해하되,
    3 행동부대의 표면에는 훈련대를 내세워 조선인의 쿠데타처럼 기장하고,
    4 행동의 전위대로는 일인 낭인부대를 앞세우되, 그들을 위한 엄호 및 전투의 주력으로는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을 담당하고,
    5 대원군 호위의 별동대로는 일본 거류지의 경비를 담당하는 일본 경관을 동원키로 한다.
    (상게서, p.41 참조)

<여우사냥 거사팀>은 <명성태황후>(속칭 '민 황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가장 강력한 왕후 반대 세력인 대원군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판다하였다. 대원군은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경복궁을 기습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세울 때 권력을 잡았으나, 다시 실각한 이래 민씨 일파에 의해 마포 공덕리의 별장 '아소정'에 사실상 유폐된 상태였다. 대원군은 이때 만 75세의 고령이었다.

한편, 인천에서 급히 상경한 '오카모토'는, 자정 무렵 용산에 도착한 '아다치'가 이끄는 낭인패와 사복으로 위장한 일본인 순사 등 30여명을 인솔해 공덕리 대원군의 별장인 '아소정'으로 향하였다. 전 군부협판 '이주회'(李周會/1843-1895)와 훈련대 간부 '이진호'(李軫鎬/1867-1943), '구연수'(具然壽/1867-1925) 등이 도중에 이들을 만나 길안내를 하였다.
이 중에서 구연수는 을사오적 '송병준'의 사위로서 <명성태황후 시신>을 불태운 장본인으로 알려져 있다.

오카모토는 통역관 '스즈키'를 데리고 대원군의 방으로 들어가 입궐할 때가 왔다고 알렸다. 입궐할 시간이 2-3시간이나 지체 되었다. 이에 앞서 선발대 일본 순사 몇 명이 긴 사다리를 광화문 옆 담벼락을 걸어 담을 타고 들어갔다. 광화문을 경비 던 시위대 병사들은 놀라서 무기를 버린 채 도망쳤다. <상게서, p.44-47 참조>.


드디어 광화문이 활짝 열렸다. 이들은 함성을 지르며 대원군과 함께 궁궐로 진입하였다.

이때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이 경복궁 밖에서 대기 중이던 훈련대 1중대 병력을 겨우 설득하여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광화문으로 달려왔다. 홍계훈이 일본군의 진입을 제지하자 쌍방 간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홍계훈이 일본군 장교가 쏜 총에 맞아 전사하자, 총격전은 불과 10 분만에 끝났다.

이즈음, 궁내 야간 당직인 '다이' 장군과 '사바틴'은 '미야모토' 장교를 만나 영어로 못알아 듣자 알고 있는 일본어로 간단히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미야모토는 사바틴을 외면하였다. 왕비가 어디있냐는 것까지 물어보자, 그들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미야모토는 후궁으로 들어가 왕비라고 생각되는 자는 즉시 칼로 살육했는데, 수십명이 살해되었다. 관자놀이 부분에 점자국을 있는 것을 발견하자 왕비가 틀림없다고 판단하였다.

당시 주한 영국 총영사 '힐리어'는 네 명의 주요 목격자들로부터 들은 증언을 토대로, 궁녀 등을 살육하는 현장을 조선주재 겸 청국주재 영국공사 '오코너'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고 있다:

    건청궁의 앞뒷문을 통해 일본군의 엄호 아래 침입해 들어온 민간 복장의 일본인들에 대해 한 무리의(한국군 복장을 한) 군인들과 함께 일본인 장교와 사병들이 경비를 서 주었다. 그들은 곧바로 왕과 왕비의 처소로 가서 몇몇은 왕과 왕태자의 측근 인물들을 붙잡았고, 다른 자들은 왕비의 침실로 향했다.이미 궁내에 있던 궁내부대신 이경직은 서둘러 왕비에게 급보를 알렸고, 왕비와 궁녀들이 잠자리에서 뛰쳐나와 달아나 숨으려 하던 순간이었다. 그때 살해범들이 달려들자 궁내부대신은 왕비를 보호하고자 그의 두팔을 벌려 왕비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살해범들 중 하나가 왕비를 수색하고자 손에 왕비의 사진을 갖고 있었던 데다가, 그의 보호 행위는 살해범들이(왕후를 알아볼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궁내부대신은 그들의 칼날에 두 팔목을 잘리는 등 중상을 입고 쓰러져 피를 흘리며 죽었다. 왕비는 뜰 아래로 뛰어 내렸지만 붙잡혀 쓰러졌고, 살해범은 수차례 왕비의 가슴을 내리 짓밟으며 칼로 거듭 왕비를 찔렀다. 실수가 없도록 분명히 해치우기 위해 왕비와 용모가 비슷한 여러 궁녀들도 살해되고 있었는데, 그때 의녀가 앞으로 나와 손수건으로 왕비의 얼굴을 덮어 주었다. 한 둘의 시신이 숯더미 위에서 불태워졌지만 나머지 시신은 궁궐 밖으로 옮겨졌다.
    (상게서, p.76-77).


한편, 주한 미국 대리공사 '호러스 알렌'(Horace Allen/1858-1932)이 증언한다.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자세히보기>. 일본인들이 알렌 공사를 포박하였지만, 그는 왕비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궁전 안에서의 고함을 듣고 일본인이 그를 놓아주고 그곳으로 달려가는 것 보고 그 뒤를 따라가 보았다. 작은 방 안에 왕비인 듯한 시체가 뉘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일본인에 의해 밀려 나왔다. 얼마 후 일본인들이 죽인 왕비의 시체를 가까운 <녹원>(鹿園) 안에서 태우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그곳으로 달려가 화장되고 있는 시체에 감겨 있는 의복이 귀부인의 것임을 그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상게서 p.78 참조)

그렇다면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는 누구인가?

'미야모토 다케타로'는 일개 소위로 임관, 조선에서 <밀정>(스파이)로 밀약하였다. 그는 <명성태황후 암살>의 주범인데도, 재판에도 출정한 기록이 없을 정도로, 3일 만에 별다른 진전없이 참고인 조사로 끝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일본군 <대진영>의 직계로서, 미야모토 소위는 을미사변 이후 1897년 9월 27일자로 임명되어 타이완(대만)으로 파견된 뒤, 같은 해 12월 20일에 현지에서 전투 중에 전사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무명'으로 그에 관한 사진 및 신상자료가 거의 없다.

단지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이종각 지음, 메디치미디어, 2015)에서는 미야모토의 행위에 관해서 보다 상세하게 진술하고 있다. 다음 도표는 미야모토 다케타로의 각년도 <육군예비후보장교 동 상당관 복역정년 명부>이다. (상게서, 156-159).

위 도표를 통해서 두 인물은 별개가 아니요 동일 인물임을 저자 '이종각' 씨는 확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군부는 왜 그랬을까?? 고위직 군인들은 기록이 남아 있다는데...이는 후한이 생길 우려 때문에 그에 대한 증거를 없애고, 특히 야스쿠니신사에도 올리지 않았다는 것이 정론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로써 일본은 <명성태황후 암살>의 주범을 이렇게 숨겨놓고 있음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만 것이다!!

그렇지만, 이 어디 숨겨놓았다고 해서 <카이로스의 역사적사실>로서는 완전히 감춰워 둔 것처럼 보이겠지만, 예호바가 주관하시는 <크로노스의 역사적진실>로서는 반드시 온 천하에 밝히 드러나고 말 것임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미야모토는 조선(한국)에 파견와서는 동학당 정토에 참가하였고, 한국주재 일본 군부들과 내통하고 편지도 주고 받았다고 한다. 동학당 정벌에 나서 참혹하게 죽였다. 동학난 때 죽은 사람이 3만이라고 하고 부상자까지 합치면 5만까지 넘는다고 한다. 집단학살이다. 이런 자를 눈여겨 미우라 주한공사가 동향의 인연으로 특히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을미사변 당시 일본 경성 영사관의 일등영사로 근무하던 '우치다 사다쓰치'(内田定侈搥)가 있다. 그는 을미참변에는 배제 되었으나, 사건발생 후 뒷수습에 관여하였고, 사건에 관한 상세한 공식보고서를 일본 외무성에 제출한 장본인이다.

1895년 10월 8인 새벽, 남산 기슭의 영사관 숙소에서 요란한 총소리에 놀라 깨어난 우치다 영사는 경복궁에서 공사관으로 돌아온 낭인 등으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그는 당일 급보한 극비서한 제1보(10월 8일자)에서 살해범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지목하고 있다:

    살해당한 부녀 중 한 명은 왕비라고 하는바, 이를 살해한 자는 우리 수비대의 어느 육군 소위로서...


우치다는 을미사변에 관해 공문으로 외무성으로 보고하기 전, 하라 차관에게 먼저 보낸 이 사신에서 사건개요를 알리면서, '살해범을 우리 육군소위 즉 당시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경성수비대의 어떤 소위라고 특정한 것이다.' 우치다는 이 편지의 말미에 '이러한 사실은 공문으로 보고드리는 것도 결코 타당하지 않아 극비리에 보고드리는 바입니다. 부디 일람하신 후에는 태워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소각을 부탁하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당시 우치다가 하라에게 내밀히 보고한, 을미사변에 관한 극비 서신들은 외무차관 역임 후 주한공사, 중의원 등을 거쳐 1918년 평민으로서는 첫 총리가 된 하라가 소각하지 않은 채 잘 보관해 두고 있다.
(상게서, p.92-94 참조)

본 필자는 <미야모토 소위, 명성황후를 찌르다>라는 책을 간략하게 전한다. 이 책을 누구나 한 번 읽어 보라고 권한다. 아직도 해결 못한 최대의 주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일본이 이토록 야만적인 행동은 '예수회'로부터 전수 교육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마지막 목적은 <유라시아정복>인 것이다!!

120년전 ㅡ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참극현장>은 당일 오전에 일본군 승냥이들이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서 사다리를 타고 넘어가던 현장이고 시해사건이다. 그곳은 <명성태황후>가 참혹하게 피를 흘리던 장소요, 화장당하신 장소인 것이다.

120년후 ㅡ 2014년 8월15일은 로마의 전쟁여신 '미네르바의 축제일'(우리에게는 광복절)로서 로마 교황이 <123위 시성식>을 드린 장소이다...그리고 금년 2015년 8월 23일 에는 서울주교에서 <2014년 교황시성식 기념돌판>을 광화문광장 시성식 바로 그 자리에다 박아버렸다...참으로 가증스럽지 않는가??!!: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을 통하여 전해진 그 거룩한 곳 안에 서 있는 그 혐오스런 황폐함(황무함/가증스럼)의 그 징조를 보게 될 때마다, (읽는 자는 깨달아야 하나니), 유대 안에 있는 너희는 그 산들 속으로 도피해야 한다. (마태오經 24:15-16, 예호슈아증언 정재선역)

어찌하여 대한민국 정부(서울시청)는 <광화문광장>을 내어 주었는가?? 정부는 정신적인 외상을 입었는가?? 아무것도 모르고 돌판을 박으라고 허가해 주었는가? 이 사건은 간사한 '예수회'에게 우리 대한민족(大桓民族)의 수도 서울 한복판인 <광화문광장>을 강탈당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요...그리하여 대한민족은 '상징적으로'(??) 통째로 대적(예수회)에게로 넘겨졌다는 비통한 <역사적진실>인 것이다!!

아, <명성태황후>께서 울면서 통곡하고 계시진 않으실까??!!

두렵움도 없고 통곡도 없는 나라, 언제 마른뼈들이 소생할 것인가??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다!!
<'부활' - 진리와 종교는 결코 연합될 수 없다 [4-1] - [정재선 목회자의 제5차 KJB 세미나 강해(1999)><자세히보기>.

지금도 대한민족은 꼭두각시 놀음에 농락당하고 있다. 그것은 임진란때 부터 '예수회'가 주관해 오고 있는 것이다. 예수회 신부 '그레고리오 드 세스페데스'
(Gregorio de Cespedes/1551-1611)기  왜군들과 함께 조선을 침투해서 암약한 <역사적진실>이 존재하고 있으니, 다시 말하면, 오늘날까지 아니 내일까지도 아니 영구토록 일본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 한, '예수회'가 일본을 이용하고...또...이용할 것이다. 이제 일본은 <평화헌법>을 깨뜨리고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버렸기 때문인 것이다. <자세히보기>.

또 다시 우리 대한민족은 대환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옷이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찢어져야 할 대환난이 찾아 오고야 말 것이다!!

    <역사를 중요시하고 사랑하는 자 곧 그 민족은 멸절되지 않는다. ㅡ 정재선 목회자님의 가르침>


이제 우리 대한민족(大桓民族) 곧 민초들은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리라>... 곧 <그 말씀> 속으로 부터 예호바로부터 평안을 얻으리라!! 샬롬!! <2015.9.20/밤에>

 
<Created/20150920> <Updated/20150921><2015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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