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선-정동윤의 호국뮤지컬 '한울가(桓鬱歌) 이야기'] [1]

'시계바늘이야 하루에도 두 번씩은 가고 또 제자리에 돌아오지만, 인생에서는 가는 오늘이 그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2010년 4월 11일 소천하신 趙香祿 목회자의 '새해 기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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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민족은 '눈물이 많은' 민족이다!!

글/ 정재선 목회자



주님. 이제는 더 지체치 마시고...'뮤지컬'을 세우소서!!
이 강토가 온통 음란과 저주와 어둠으로 숨통을 죽여오고 있습니다.

'문화/엔터테인먼트'라고 하는 울타리를 걷우소서.
그리하면 그 안에 갇혀있던 '억업'과 '울화'가 자유로이 비상하면서
온 세계 만방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증언하지 않으리요.

주님의 사역자 다니엘 정을 기억하시고
그가 가는 길에...12년전 대학로 '총돌소극장'에서
그의 열손가락을 사용하셨듯이...

이제는 그 곳에 주님의 '작은 등불'을 올릴 수 있는 작은 '뮤지컬'을 올리소서!!
이름하여 '한울가 이야기'이나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갈길 몰라 방황하고 지친 그 혼들을 걷어 올릴  수 있는
추수꾼들을 불러 모으소서...

<2010.5.1/ 첫 아침에>


<'한울가'(桓鬱歌) 주제곡 ㅡ 편곡연주/ 다니엘 정>


주님...

너무나도 싱그러운 5월의 첫 아침에 주님 앞에 이 노래... '한울가'(桓鬱歌)를 바칩니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손가락 굴리는 것 밖에 없는
이 죄인의 이 천한 재주라도 사용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제 아비의 속사람이 울며 이 노래를 불렀나이다.
주님의 그 영님도 함께 울었을 것입니다.
주님, 그 눈물을 주님의 병에 담으시고, 마란아다 속히 오소서...

저들이 그 어떤 간계를 부리더라도
주님의 그 선하신 방법대로 저들을 막아 오셨음을 고백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그 섭리가 그저 경이로울 뿐입니다.

이미 승리가 확실한 전쟁 아니더이까?
대장 예수님 따라가면 반드시 승리할 줄 믿사오니...
모두들...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저 잠잠히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게 하소서.

특별히 제 아비를 주님께 의탁하나이다.
그의 순수한 그 영의 노래를 흠향하옵소서!!
그의 비상한 그 혼을 사용하옵소서!!
그의 쇠잔해가는 그 몸을 지켜주시옵소서!!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저 아버지의 그 섭리대로 하소서...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간절히 구하오며...
5월의 첫 아침에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그리스도 주 예수님의 그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2010.5.1/ 첫 아침에>


정재선-정동윤의 호국뮤지컬 '한울가(桓鬱歌) 이야기'를 펼치면서...


오늘 잠시 라디오 방송을 듣는 중에 필자는 귀를 쫑긋이 세웠다. 근래 '우울증'에 걸리는 환자들이 부쩍 늘어났다는 통계를 보도하고 있었다. 관련자료를 찾아보았다.

우울증(憂鬱症/ Unipolar Depression, Unipolar Disorder)이란 신체, 기분, 사고 및 행동의 모든 면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고 우울증은 식사, 수면, 자신에 대한 느낌, 사물에 대한 생각등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우울증의 변수는 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낮은 자존심이나 지속적으로 자신이나 세상에 대한 허무감을 갖는 사람, 혹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우울증에 잘 걸린다고 한다. 심각한 상실, 만성질환, 대인관계에의 어려움, 경제적 문제 혹은 일상 생활에 있어서 좋지 않은 변화가 역시 우울증을 유발시킨다, 결국 '생물학적, 심리적, 환경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우울증의 유발에 관련' 된다고 한다.

이대로라면, 우울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다.
우울증의 치료에는 '약물치료와 정신치료'가 있단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완전한 치유가 없다고 한다.

과연 저대로 믿어도 되는 걸까? 필자의 눈에 거슬리는 말...
'생물학적, 심리적, 환경적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우울증의 유발에 관련'...

반면, '우울'(憂鬱)이란 '슬프고 불행한 감정'을 말한다. 그러면 '우울증'은 '슬픔증'이 아니겠는가? 이는 슬프고 불행한 감정이 오래 지속되어 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가 되는 증상일 것이다.

다음은 필자의 비약일지 모르겠다. 진실로 어디서부터 말꼬리를 풀어내서 쭉 펼친후에 그것을 매듭을 지어야 할지...다만, 필자의 속 마음으로부터 솟구쳐오른 '느낌'이 사로잡았고, 그 느낌의 흐름을 입을 통하여 가락으로 발설되었으니, 이름하여 '한울가'(桓鬱歌)라 하였다. 우리네 한민족의 '그 한맺힘과 슬픔'을 영적으로 승화시켜내어 지난 날 보다 그리고 지금 겪고 있는 이 환난을 거울삼고 교훈삼아서, 앞으로 닥칠 이 보다 더 심한 '격랑(激浪)의 물결'을 막아내자 함이니...이 또한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강토를 오염시키고 있는 '보이지 않는 문화권력'에 대격(對擊)하고자 함이니...함께 힘을 모아야 하리라...(2010.4.13/저녁/정재선 쓰다)


끝으로 별담이지만...세계 어느 민족들 보다 우리네 한민족은 '눈물이 많은 민족'이다. 아울러 우리의 영화나 드라마 속에는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눈물이 많은 만큼 그 근간을 이루고서 잔잔히 흐르고 있는 '감정의 여울'을 회복시켜야 한다. 특히 지난 10여년전부터 주체를 이루던 미국 스타일의 블록버스터식의 배경음악이 사라지더니...근래 우리네 사극 드라마의 배경 음악은 거의가 '일본색깔'(예/ '하울의 움직이는 성' 작곡가 히사이시 조 등...)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네 한민족의 주체성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의 한국도 문화권력(文化權力)이 좌파 지식인들에 의해 장악되고 있다는 점에서 북송(北宋)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나라다. 우리 학계/예술계/언론계의 현실이 바로 그러하여 바른 소리를 하는 사람이 오히려 좌파의 포위 공격을 당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김일성-김정일주의'를 비호/동조하는 깽판 세력이 '진보'(進步)의 이름으로 횡행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독립한 150여개 나라 가운데 경제적 성공으로 G20에 진입한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이런 한국의 해방 '이후사'(以後史)를 실패한 역사로 경멸하고, 그 민족사적 정통성에 흠집을 내는 것을 마치 지식인의 사명인 것처럼 인식하는 풍토가 시정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의 건전성은 담보될 수 없다.


우리들 삶 속에서 '문학'이라는 장르를 빌어 소설 속에서 '우울증'이 여실히 잘 묘사된 작품들이 있다. 바로 어네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way)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헤밍웨이의 문체는 여느 작가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띤다. '하드보일드'(Hard-Boiled)라 불리는 그의 문체는 소위 우리에게 익숙한 문학이라 하기엔 건조하다 못해 거칠고, 간결함을 넘어 단조롭기까지 하다. 프로트를 전개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하고 필요한 낱말 전개 외에는 '곁가지'인 미사여구가 전혀 없다. 주요 맥을 전개시켜 가면서, 그 사건에 관한 전개는 독자로 하여금 판단토록 맡기는 '상관관계법'이다.

필자의 전공은 아니었지만, 재학 중에 배운 과목 중에서 필자의 삶 속에서 가장 영향력을 끼친 소설이 있다. 바로 헤밍웨이의 단편소설로 유명한 '노인과 바다'이다(The Old Man And The Sea)이다. 헤밍웨이 소설 속은 주인공들은 '무신론자'(I am not religious)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창조(자연) 속에 나약(무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허무주의' 내지는 '우울주의'을 여실히 묘사한다.

노인은 분명히 패배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건 노인조차도 받아들이는 진실이다. 그러니 노인의 모습을 인간 정신의 승리라고 말하는 건 허튼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위로를 건넬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이 다른 무엇보다 위대하고, 영원히 그들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지 않는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라면 인간 정신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 또한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살아남기 위해 투쟁한다. 그것은 의지나 정신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러니하지만 그들은 살아있는 한 살아있기 위해 그들의 모든 힘을 소진시킨다. 그리고 그 싸움에서 그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하지만 노인은 분명히 패배했다고 말하지 않았었나? 맞다. 노인은 패배했다. 하지만 그 패배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목표'라는 것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출어한지 84일 동안 허탕만 치다가 85일째 되는 날...노인 산티아고는 '참다랭어'를 낚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참다랭어를 죽임으로써(피를 흘림/인간의 욕심),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의 급습을 받았고, 참다랭어는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뼈들만 앙상하게 남았다. 인간끼리의 전쟁은 결국에는 '허무주의'를 낳고 만다는 교훈을 전해 준다. 그런데, 이 '허무주의'가 헤밍웨이 작품 속에서는 절망과 패배에로의 '부정적 허무주의'가 아니라, 삶의 희망과 꿈을 향하여 다시 비상하는 '긍정적 허무주의'에로 바뀐다. 이것이 헤밍웨이 작품의 '중심테마'이다. 삶의 활력소이다. 필자가 이 소설을 배울 당시는 무척이나 나약하였다. 조금만 체중을 뺐었으면, 군입대를 면제받을 정도로 나약했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미국소설을 강의듣는 중에, 헤밍웨이의 '스토이시슴'  (Stoicism/산티아고 노인의 손바닥 갈라지면서도 참다랭어와 사투하는 강인한 인내력)에 매료되었고, 결국에는 입대를 하였다. 훈련받는 중에도 힘들 때는 항상 이 소설과 주인공의 인내력을 연상하면서 이겨냈다.
<영화 'The Old Mand And The Sea'(Spencer Tracy 주연/1958) 영상캡쳐>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희망, 꿈, 목표가 없으면 삶의 의미가 없다는 듯이 아우성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삶을 조금 더 재밌게 살기 위한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할 뿐 삶의 본질은 아니다. 살아있다면 살아있음 그것이 삶을 이끌어 갈 것이다. 아무 희망이 없더라도 다시 바다로 나가는 소설 속의 주인공 산티아고 노인처럼...


◆<이미지프리제공/미의회도서관> In this cartoon, Valtman alludes to Ernest Hemingway's The Old Man in the Sea, which recounts the story of an old Cuban fisherman who catches a giant marlin. Despite his efforts, the fish is largely eaten by sharks before he returns to port with little more than the skeleton.


[미니 한마디...] 그런데 사람들은 헤밍웨이의 죽음을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규정짓기도 한다. 아니, 실제로 그는 '우울증'을 겪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정말 그럴 수도 있었겠다며 고개가 끄덕여진다. 헤밍웨이는 1961년 7월2일 의문의 '엽총사고'로 죽었다. 그런데 필자는 김병철 스승님으로부터 '노인과 바다' 미국소설강의를 듣는 중에, '헤밍웨이가 고혈압에 몹시 시달린 나머지...더 이상 쓸모와 가치가 없다는 자신을 판단한 나머지 엽총으로 자살하였다'고 들은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정확한 이야기인지는 모르지만, 헤밍웨이가 '구소련의 스파이'였다는 설(?)이 있는데...그 이야기가 진실이면, 그는 무거운 압박감 속에서 살다가 마지막 선택한 것이 '자살'(?)이 아니었던가 반문하고 싶다!! 그가 자살한 1961년은 이른바 2차 대전 후 미소 냉전으로 치닫는 중이기에...그 시대의 '속죄양'이 되지 않았나 싶어 안타깝다. 이처럼 필자가 젊음을 소진해가면서 오로지 세계 문학의 울타리에 도전하였었던 그 대상들은 한 때는 필자의 '우상'이었음을 이제는 진솔하게 고백할 수 있다. 그들이 지녔던 사상들...그들이 옮겨 놓았던 필적들(고전 작품들)을 밟아가면서...세계적인 석학들과 어깨를 겨루고 싶었던 그 야망이 있었다...그런데 그 작가들의 배후에는 '비밀결사 세력들'이 있었으며, 피치 못할 사정에서인지 몰라도(?), 일종의 '마인드 컨트롤'에 걸려들었다가 비참한 인생을 마감한 자들도 많이 있었음이 '하나하나씩' 드러나고 있음을 보면서...그들의 작품들을 '명작'이니 '클래식'이니 하면서 따라갔었던 그 발자국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어느 날 뒤를 돌아보니...필자의 그 발자국이 더 이상 보이질 않는 것이었다. 그것을 느끼는 순간, 필자는 필로 옮겨 놓을 수 있었다: '무흔족'(無痕足) ㅡ '흔적이 없는 발길'. 이 시(詩)도 다니엘 정에 의해 작곡되어 연주되기를 간구 중이다. 오늘의 다른 모습으로 서 있는 필자는 계속 걸어가고 있다...오로지 이끌림을 받으면서...예전에는 그토록 기고만장하면서 달려갔건만...필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다. '교만'해졌기 때문이었다...그런데 어느 순간 필자는 자신이 흙과 먼지 같은 존재임을 깨달았다. '겸손'해졌기 때문이었다:


6:18영님 안에서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항상 기도하고, 그것을 위하여 모든 성도들을 위해 모든 인내와 간구로 깨어 있으라.

6:18Praying always with all prayer and supplication in the Spirit, and watching thereunto with all perseverance and supplication for all saints;

6:19그리고 나를 위하여는 나를 향하여 말씀을 주셔서, 나의 입을 담대하게 열어, 그 복음의 그 신비를 알리게 하고,

6:19And for me, that utterance may be given unto me, that I may open my mouth boldly, to make known the mystery of the gospel,

6:20이 복음을 위하여 내가 사슬들에 묶인 한 사신(대사)이 되었으니, 이 일에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말을 담대하게 전하도록 하기 위함이라. (에베소서 6:18-20 KJV화중광야역)

6:20For which I am an ambassador in bonds: that therein I may speak boldly, as I ought to speak. (Ephesians 6:18-20. KJV)



<Created/20100412> <Updated/2010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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