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mbo's Unforgettable Essay] [7] [오늘이 오늘이소서]


◆<주제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ㅡ 작곡/정재선ㅡ채보/안연숙ㅡ편곡ㆍ연주/정동윤

타국에서 부른 조선 도공(陶工)들의 한맺힌 망향가(望鄕歌)

정리/ 정재선 목회자

<오늘이 오늘이소서>는 고려말에서 조선조 중엽까지 축가로 불리어온 시조입니다. 임란때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들도 명절이 되면 고향을 생각하며 이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지금도 일본 큐슈지방에서는 신사의 기도문으로 전승되어 오고 있습니다. 우리 선조들은 한많은 노래만을 불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거듭되는 고난의 역사속에서 즐거운 축가들은 모두 마멸되어 이 시조처럼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본 자료는 필자가 마무리번역 중인 <요안계시록 4:3>의 <비를 담는 그릇>(雨器)과의 연계성을 참고하고자 올리는 것입니다. <자세히보기>.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에 사쓰마번(薩摩藩) 영주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에게 이끌려 와서 '나에시로가와'(苗代川/가고시마 현 히오키 시의 옛 이름)에서 도자기를 굽게 된 조선 남원(南源)의 도공들은 망향의 한을 달래기 위하여, <다마야마궁>(玉山宮)을 지어 <단군>(檀君)을 모시고 8월 한가위에는 이곳에 모여서 제사를 지냈다. <다마야마궁>은 <고려신묘>(高麗神廟)라고도 불리웠다. 제사가 끝나면 조선의 노래와 춤으로 하루를 보냈다. 이 때 불리워진 노래가 바로 조선의 <심방곡>(心方曲)이었다. 이 노래는 일본에서 <신방곡>(神房曲) <신무가>(神貿歌) <학귀무가>(鶴龜舞歌) 등으로도 불렸다고 전한다.

'사메지마 사타로'(鮫島佐太郞)의 노래집 <나에시로가와의 생활>(苗代川の生活)에 채집되어 있는 노래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원가사

풀이가사

① 오놀이 오놀이라 오놀이라/날 놀 죠이믈/제물됴차 이즐/오놀이라 ① 오늘이 오늘이라 오늘이라/내 몸을 조이는 것도/차려놓은 제물조차도/잊을 오늘이라

② 오놀이라/ 회워 오놀이고 놀이나/못 노세로 못 노세로/오놀이라

② 오늘이라/ 그동안 헤아려 온 오늘이고 이 날이라/놀지 못할까 놀지 못할까/오늘이라
③ 이리도 노세 이리도 노세/제 이리 제 이리 올아반/노네난기 노네난기/하나가 하이치쟌아 ③ 이렇게도 노세 이렇게도 노세/제 일이 제가 하는 일이 옳거든/노는 일이 노는 일이/하나가 한 이치 아닌가

④ 하나가 하이치쟌아/고스래나 고스래나/ 죠나 새나/하나가 하이치쟌아

④ 하나가 한 이치 아닌가/고수레 고수레/조(오곡의 하나)가 새(풀)나 /하나가 한 이치 아닌가


노래의 전체적인 흐름은 애조를 띠면서도, 그 내용은 '오늘 하루 즐겁게 놀자'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동안 몸과 마음을 조인 괴로움도, 제대로 갖추어 놓지 못한 제물도 잊어 버리고 오늘 하루 즐기자는 것이다.

    오늘을 얼마나 기다리며 헤어왔던 것인가!! 그런데 못놀 것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렇게도 놀고 저렇게도 놀잔다. 제 각기 하는 일이 옳거든 이렇게 놀거나 저렇게 놀거나, 한 이치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한 이치인 바에야 제물도 내려놓고, '고수레, 고수레' 한 다음 음복하며 마냥 놀자는 것이다. 조의 잎이거나 풀잎이거나 세상 난 것은 한 이치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고수레'는 '고시례'(高矢禮),라고도 일러온 우리 관습의 하나였다. '여름지이'로 삶을 영위해 온 우리 조상들은 들에 음식을 내어 먹을 때나 무당들이 굿을 할 때 '귀신'에게 먼저 바친다 하여 음식을 조금 떼어 던지면서 '고시레'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필자의 어린 시절에 자주 목격하였던 장면이다.

'고시'(高矢)는 단군시대 백성들에게 '여름지이'를 가르쳐 준 사람이라고 했다. 이분에 대한 고마음을 표하자는 것이 '고시례'였는데, 이 말이 뒤로 내려오면서 '고수레'로 변한 것이다.

정유재란(1597-1598) 때 일본으로 끌려온 우리 도공(陶工)들은 이곳 일본에서도 우리의 습속(習俗)을 그대로 지키고자 하였음이 이 가사 <고수레>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노래 가사는 조선조 후기까지 <오늘이 오늘이라>의 노래로 하나의 유형을 이루고 있었고, 이 노래는 즐거운 잔치나 놀이마당에서 널리 불리웠다고 전한다. 특히 1991년 당시 '이어령' 문화체육부 장관의 착상에 의해서 <오늘이 오늘이소서>라는 노래는 녹음 테이프(대중가요/가곡/국악 형식)로 보급되기 시작하였는데, 가곡형식은 성악가 바리톤 <최현수> 씨가 새로운 곡을 붙여 부른 것이라고 전한다.

그런데, 이 노래를 가수 조용필 씨가 불렀다는 것이다. 1988년 여름, 일본 국제방송주식회사의 프로듀서 '다카바야시'(高林公毅)의 청에 의하여 조용필 씨가 작곡하여 불렀다는 것이다. 다카바야시는 이 노래를 넣어서 한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는데, 제목은 <한국, 사랑과 감동의 여행>이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영상물은 1988년 일본 NHK에서 방영하였으며,
제작자는 1988년 7월 26일, 남원시 <광한루원>에서 조용필 씨가 부른 이 노래의 봉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최승범, '일본기행 조선도공을 생각한다', 신영출판사, 1994. 참조>.

어찌하여 국내에서 일반 시청자들은 전혀 알고 있지 못하는가?? 수 일간 아무리 검색하고 찾아 보아도...제작자 다카바야시 씨 자체의 인적사항도 접근이 안된다. 하물며 한국 TV에서는 방영하였다는 근거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보다 1977년 8월 20일부터 방영된 MBC 드라마 <타국>의 주제가(신봉승 작사/ 백영호 작곡/ 이미자 노래)에도 바로 우리 도공(陶工)들의 이 한(恨)을 담고 있다고 전한다. 신봉승 작, 표재순 연출에, 오지명(심수관 역), 김윤경(아내 역), 이승현(아들 역)이 출현하였다고 전한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왼쪽>정유재란(1598) 때 일본 '사쓰마번'으로 끌려온 남원의 도공들이 정착하여 처음 도자기를 구운 '나에시로가와'(苗代川) 가마터이다. (경향신문/1984.2.21 발행). <중앙>드라마 <타국>을 부른 이미자 씨의 LP판 자킷이다. <오른쪽>1977년 8월 20일 첫 방영한 MBC드라마 <타국>의 실제 주인공들의 후손 '심수관'씨와 그의 딸 '심정자' 씨와 드라마 작가 '신봉승' 씨이다. (동아일보/1977.8.29 발행).


[일본인들의 꾸준한 역사인식 조명 ㅡ 우리가 배워둬야 할 역사인식 자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하여 저질러진 왜구(倭寇)의 조선 침략은 7년(1592-1598)에 걸친 참혹한 전쟁이었으며, 수많은 인명과 재산, 특히 문화재(文化財)의 손실을 가져온 우리 민족의 대재난이었다. 조선 전기의 찬란한 문화가 이 전란으로 초토화가 되었고, 이 때에 소실된 문화재와 기술자로 말미암아 조선은 전시대에 비하여 훨씬 낙후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반면에 일본에는 이 때에 약탈한 기술과 문화로 화려한 <에도>(江戶) 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은국(恩國)의 공덕을 망각한 채로...오늘날...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재점령하려는 '얄팍한 수작'(원숭이 공작)이 끊이지 아니하고 있음은...이제는 역사의 종말이 머지 않았음을 단적으로 예시해주는 것이라고...필자는 여러 차례 앞글들을 통해서 피력해 온 바 있다.

그런데, 지금 일본 NHK는 이러한 공작을 뒷받침 해주는듯(??),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공을 정당화시키려는 계획된 '의도하'(??)에서 그의 '군사'(책사/장자방)이었던 <구로다 칸베에>(黑田官兵衛)의 활약상을 펼치는 대하드라마 <군사 칸베에>(軍師官兵衛)를 2014년 1월 5일(매주 일요일) 방영중에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핵심은 임진왜란의 동기부여가 일본 자체가 아니라 바로 그 이면에서 암약중이던 이 장면을 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의 예상이 적중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河野逸人, '軍師官兵衛'., NHK出版, 2014> 참조. 포르투갈 출신의 예수회 신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입국한 지 28년이 지난 일본 전국시대 덴쇼(天正) 4년(1577년)에 이렇게 예수회가 활동 중이었을 즈음, 조선(한국)의 왕 선조(宣祖) 시대의 정황은 어떻하였는가?? [이미지설명] <왼쪽하단>'토요토미 히데요시'가 '구로다 칸베에'에게 보내 친필 서한이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본명은 '하시바 히데요시'(羽紫秀吉)이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중신(重臣)이었다. 칸베에 초상화 뒤는 그가 예수회에 가담, '돈 시메온'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도 '크리스투교'(기독교)라고 언급하고 있기에, 엄밀히 말해서 '카톨릭교'는 크리스투가 아니기에, 필자는 이 용어를 구분짓기 위해서 <개신교> 대신에 <개혁크리스투교>(Reformed Christianity)로 사용한다고 언급하였다. <오른쪽> 왜구의 침략으로부터 조선나라와 <대한민족>(大桓民族)을 구하신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이다!!


1549년 6월 24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예수회 사제는 중국인 선장이 이끄는 <대선>(大船)에 몸을 싣고 동남아 '말래카港'을 출발하였다. 이 날은 '성 세례 요안'의 축일이었다. 1549년 여름에 태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하였다. 7월 21일에 가까스로 '코친 차이나'(지금의 베트남) 남부해안을 통과한 중국 대선은 갑자기 불어오는 큰 너울을 만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선장의 딸이 익사하였다. 매일 죽음과 함께 하는 역경을 지나, 일본의 땅 최남단 '가고시마'(鹿兒島)에 도달하였으니 그날이 7월 27일이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일행은 8월 15일(天文 7월 22일/일본 전국시대)에 공식 입국을 허락받았다!! '말래카港'을 출발한지 7주만인 1459년 8월 15일, 이날은 '성모 승천 기념축일'이었다!!

당시 유명무실하였던 '오기마치 천황'(正親町天皇)을 대신하여 분할 통치하고 있었던 '다이묘'의 대부분 영주들은 카톨릭교 선교에 매우 우호적이었다. 아울러 큐슈 남단 사쓰마번(薩摩藩)을 통치하던 '시마주 다카히사'(島津貴久)는 예수회 선교사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일행(5명)을 환영하면서 카톨릭교(일본어 명칭=키리시탄)의 선교에 적극 협조할 것을 약속하였다고 전한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일본 '가고시마'에 도착한 하비에르 일행. <김상근, '아시아 선교의 개척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성사, 2000, p.229> 참조. ㅡ 1549년 8월 15일 일본에 첫 발을 디딘 '프란치스코' 사제의 의도는 565년이 지난 2014년 8월 15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한민국 수도 한복판(광화문)에서 시성식을 집전한다는 그 저의를 놓고 <참십일조들>은 구국기도에 힘써야 할 것이다!! <예호바여, 어디 계시나이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필자는 20여년 전에 오늘의 이 <가증함>을 내다 보았고...그 간구와 기도를 이렇게 테이프에 담은 것이다...<열어주소서/1992>(런타임 51분)

 
 
<Created/20140405> <Updated/201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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