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작곡/ 정재선 ㅡ 채보/ 루디아 안 ㅡ 편곡연주/ 다니엘 정

[Dembo's Unforgettable  Essay ㅡ SamPaRam]
[삼파람 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1] 점점 가시화되어가는 안티-그리스도교의 물결!!

글/ 정재선 목회자


우리 한민족의 역사의 흐름 속에는 자칫 망각하기 쉬운 한 줄기가 있습니다. 200여년전 이 강토 속으로 스며들었던 한 물줄기의 그 흔적은, 지금도 우리 곁에 생생히 남아있는데, 어찌 그냥 스쳐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 역사의 흐름의 흔적인 '국치(國恥)100주년'을 맞은 2010년 오늘...지난 날의 그 치욕 앞에 그 흔적을 지워 버리는(예/광화문거리 신단장/인사동거리 재개발) 일에 비겁하게 웅크리지 말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이 민족 속에 흐르고 있는 그 아픔의 줄기가 지워지겠습니까?)...이 글은 2009년 9월부터 10월까지 2개월에 걸쳐서 올린 필자의 <호국스페셜 제1부>  [저녁 무렵에 빛이 있게 되리라]에 이은 <호국스페셜 제2부>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로 연결될 것입니다.  아울러 저 웅대한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는 우리 700만 한민족 동포 앞에 떳떳하게 이 작은 글 '삼파람'을 바칩니다!! 샬롬. (2010.3.18/밤/정재선 쓰다)



근대 한국 그리스도교의 전래에 있어서 다음의 세 분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칼 귀츨라프, 로버트 토마스, 그리고 존 로스.  [한글성경의 뿌리를 찾아서 ㅡ 한국 최초성경 전래지 마량진(馬梁鎭)에 뿌려진 <킹제임스성경>]
(자세히보기).


   

◆칼 귀츨라프 (1803-1851)
선교사 <Charles Gutzlaff, A Sketch Of Chines History, 1834, p.6>

  ◆로버트 토마스 (1840-1866) 선교사 <사진제공/ 한국컴퓨터선교회>   ◆존 로스 (1834-1915) 
선교사 <John Ross, Mission Methods In Manchuria, 1903, p.193>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78년전 1832년 7월 23일, 충청도 홍성군(오늘날 보령군) 소재 '고대도' 앞바다에 영국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 소속의 1천t급 군함 '로드 암허스트호'(The Lord Amherst)가 나타났다. 당시 고대도 사람들의 눈엔 어마어마한 크기의 배로 보였으리라!! 영국과의 통상에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고, 그 지방 관민(官民)의 통상에 관한 관심을 살필 목적으로 중국 연안을 거처 한국까지 온 이 배에는 독일 출신의 영국선교사(네델란드 선교사로도 불림) 칼 귀츨라프(Karl Gutzlaff/郭實獵)가 통역겸 선의(船醫)로 동승하고 있었다.

귀츨라프의 한국에서의 복음사역은 가시적 성과는 없었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한 땅에 복음이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는 그의 믿음은 오늘날 바로 1천만 한국 기독교인의 믿음의 뿌리인 것만은 사실이다. 암허스트호의 조선방문 목적에서 볼 때, 한 개인으로서의 귀츨라프는 본의 아니게 서구의 동양침략 전위 역할을 일부 감당했다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인 귀츨라프가 아닌 복음사역자로서의 귀츨라프의 염원은 오늘날 여전히 귀기울여 볼 만하다.

한편, 쇄국을 내세운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은 한국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해로,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번 쯤 더듬어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연대이다. 우선 이 해에는 천주교 대박해 사건인 '병인박해'가 일어난다. 병인년 새해 벽두부터 종교적으로 '혹세무민'하고, 정치적으로 '모반의 우려'가 있다 하여 숱한 천주교인들이 무차별 체포ㆍ투옥ㆍ고문ㆍ학살당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그리스도교 수용은 1870년대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의 로스(John Ross/羅約翰)와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 선교사들을 만나 밥팀례(Baptism)를 받은 한국인들에게서 비롯되었다. 로스 선교사는 조선 청년들을 모아서 성경의 한글번역을 추진하여 <누가복음>과 <요한복음>부터 간행하였고, 이 쪽복음서들로 인하여 서간도에 '한국복음화의 그루터기'가 태동된 것이요, 여기로부터 진정한 애국적인 '그리스도인들'이 태어난 것이다.
[불어라, 삼파람 5 ㅡ 한국복음화의 그루터기 ㅡ 우리의 간도!!] <자세히보기>.

선교사들은 직접선교에 앞서 학교와 병원으로 집약되는 간접선교활동에 진력하였다. 카톨릭교와는 달리 정부의 승인 하에서 입국한 그리스도교는 재정적으로도 간접선교활동이 가능하였던 것이다. 알렌이 갑신정변 때 중상을 입은 민영익(閔泳翊/민비의 친정 조카)을 치료함으로써 국왕과 왕비 및 정부측 인사들의 신임을 얻었고, 1885년 4월 '광혜원'(廣惠院)이라는 왕립병원을 세웠다가 12일 후에 다시 '제중원'(濟衆院)으로 그 명칭을 바꿨다. 1885년 9월 감리교의 스크랜튼(William Scranton)은 민간진료소를 시작하여, 다음 해 6월 에 '시병원'(施病院)으로 불린 정식병원을 설립하였다. 1888년 4월에는 여성전용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이 설립되었다.


 
◆스크랜튼 선교사가 세운 '시병원'(1886). '시병원'은 고종이 내려준 이름이다.   ◆스크랜튼 선교사 어머니가 세운 '보구여관'(1888). 한국 최초의 부인 전용병원이다.


1890년대 이후에는 지방에도 여러 교파 선교부의 병원들이 설립되었다. 1893년 북감리회의 홀(W. Hall)은 평양에서 의료활동을 시작하였는데, 청일전쟁의 평양전투가 끝난 후 환자들을 돌보다가 1895년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하였다. 1897년 2월 그를 기념하는 '기홀병원'(紀忽病院)이 평양에 세워졌고, 1898년 6월에는 홀의 부인(R. Hall)이 평양에서 '광혜여원'(廣惠女院)이라는 여자진료소를 개설하였다. 평양 이외에도 부산과 원산을 비롯하여 전국 주요 도시에 그리스도교에서 운영하는 병원들이 설립되었다. 그리스도교 의료기관을 찾는 한국인들은 소외당한 민중계층이 많았고, 의료기관은 그리스도교 전도를 용이하게 하였다. 결국 진료활동은 한국인들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우호적인 신뢰감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학교를 통한 교육선교도 의료선교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는 목회자였지만, 한국정부에 대한 공식적인 자격은 교사였다. 아펜젤러는 1886년 6월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설립하였고, 언더우드는 같은 해 고아원 형태의 학교를 시작하였다. 이 학교는 <원두우(元杜尤)학당·예수교학당·민로아학당·구세학당> 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 에 '경신학교'(儆信學校)가 되었다. 여학교도 설립되었는데, 감리교에서는 스크랜튼 부인(Mary Scranton)이 1886년에 '이화학당'(梨花學堂)을, 장로교에서는 엘러즈(Annie J. Ellers)가 세운 '정동여학당'(貞洞女學堂=貞信女學校의 발상지) 등을 들 수 있다.


[부록1] '제중원'(濟衆院) 스토리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은 미국인 선교사 알렌 박사가 조선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기 위해 왔다가 조선 왕실과 함께 설립한 병원으로, 주로 환자 진료, 전염병 예방 사업, 의학 교육 등의 의료 활동을 펼쳤다. 처음에는 '널리 은혜를 베푼다'는 뜻의 '광혜원'(廣惠院)으로 불렸지만, 후에 '일반 민중의 질병을 고쳐준다'는 뜻의 '제중원(濟衆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다음의 당사자인 알렌 박사는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던 민중을 치료해 줄 건물 하나를 요청하였으니, 갑신정변 당시 개혁파 자객의 검을 일곱 군데나 맞아 위독했던 민 왕비(명성황후)의 친정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정성껏 치료하여 낫게 해준 결과였으며, "이리하여 한국인들을 위한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 국왕에 의하여 '제중원'이라는 이름이 내려졌다."고 회고한다:

    That early success with the prominent native prince caused the natives generally to come for treatment for all sorts of ills, real and imagined. As a consequence I asked for, and obtained the use of a building in which to see and treat these people. This, the first modern hospital for the Koreans, was named by the ruler, Chai Chung Won, or house of civilized virtue. (이리하여 한국인들을 위한 최초의 근대식 병원이 국왕에 의하여 '제중원'이라는 이름이 내려졌다). It had been the home of one of the officials who was assassinated in the entente and some of the rooms were blood stained when we took it over. The house was put in good repair and the afflicted came in hundreds, over ten thousand being treated the first year. In time a better site was granted with a more commodious building, and long after my connection with the institution had ended and the hospital had lost its government connection and become purely a missionary enterprise, as was found to be much the best plan, a fine brick building with modern equipment, on an excellent site, was provided for the very capable physician in charge, through the munificence of an American gentleman, Mr. Severance, for whom the hospital is named. <Horace Allen, Things Korean, New York: F. H. Revell Co., 1908, p.188-189>


마침 조선정부 외교고문으로 와 있었던 독일의 뮐렌도르프와 미국 공사 폴크는 민영익을 응급조치한 후, 그의 집으로 옮기고 알렌 의사를 황급히 불렀다. 그 사이 14명이나 되는 한의사들은 민영익을 치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지만, 칼에 맞아 찢어진 상처와 끊겨진 혈관에 대해서는 동양의학으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만 있을 때 도착한 알렌은 명주실로 상처를 꿰매고, 약을 발라 외상을 치료해 주고 석달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아 주었다. 이로 인해 민영익의 외상은 놀라운 속도로 치유 되었고, 민영익은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알렌에게 돈도 주고, 고종의 허락을 받아 '정2품'에 해당하는 참판의 벼슬까지 하사하였다.

이 사건으로 알렌은 민영익과의 관계뿐 아니라 고종과도 원만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이 설립되게 되는 직접적인 전기가 되었다. 알렌은 1885년1월 한국 주재 미국 공관 폴크를 통해 한국에 서양병원 설립을 요청하고, 이것은 쉽게 받아들여져, 1885년 조선정부는 그해 4월10일에 최초의 서양 근대 병원 '광혜원'을 설립하게 된다.

이렇게 빨리 병원이 시작될 수 있었던 것은 정부에서 마침 큰 집이 하나 비어 있어서 그것을 알렌에게 주었기 때문인데, 그 집이 바로 갑신정변 때 살해당한 개화파의 지도자 홍영식의 집이었다. 그리고 '광혜원'이라는 이름은 '널리 은혜를 베푸는 집'(Widespread Relief House/House Of Extended Grace)이라는 뜻으로 고종이 직접 지어준 이름이었다. '광혜원'은 개설된 지 16일 만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왕실과의 유대도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1885년 4월 10일, '광혜원'이 개원되기 5일전에 한국에 도착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는 '광혜원'에서 화학을 가르치면서, 그곳을 선교기점으로 삼고 선교사역을 시작했는가 하면, 1885년 6월에 입국한 의료선교사 스크랜톤, 1886년에 입국한 엘러즈도 처음 '광혜원'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광혜원은 자연스럽게 한국 개신교 선교의 거점이 되어 선교의 효과를 극대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광혜원의 설립에는 최초의 의료선교사 알렌의 노력이 있었는데, 그가 한국에 들어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미국 장로교와 감리교에서 교단적인 차원에서 한국 선교를 위한 계획이 추진되고 있는 동안, 알렌은 이미 중국에서 북장로교 파송선교사로 있었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의 영웅 이탄 알렌의 후손이었고, 미 중부의 명문 오하이오의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하였고, 다시 신시내티의 '마이애미 의대'에서 의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그는 세계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1883년 봄에 북장로교 선교부에 중국 의료선교사로 지원했고, 그해에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중국에 입국하였던 것이니, 그의 나의 25세 때였다.

그는 중국에 도착하자마자 상해를 거점으로 선교사역을 시작했으나, 얼마가지 않아 실의에 빠지고 만다. 선교경험의 미숙, 어린나이, 동료선교사와의 마찰, 아내의 건강악화로 고전을 면치 못하다, 결국 그가 평소에 관심을 가지던 조선 선교를 결정한다. 서울에 도착한 알렌은 미국 공관의(公館醫)로서 그들의 건강을 책임지는 일을 하면서 선교의 기회를 보게 된다. 그는 선교사로 입국한 것도 아니고 공개적으로 선교가 조선에 허용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조선 사람에게 복음 전하는 일은 지양하고, 가정에서 가족과 조용히 예배를 드리던 중 입국한지 3개월도 되지 않아 갑신정변이 발생함으로 민영익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광혜원은 개원 후 1년에 약 1만 명이 치료를 받을 정도로 폭발적이었다. 당시 서울 인구를 약 15만 정도로 볼 때, 이는 대단한 수치임에 틀림없다. 이후 1899년에 '제중원 의학교'를 설립하고 학생들을 뽑아 의학교육을 실시하고, 10년이 지난 1908년 6월에는 처음으로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이것이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세브란스 의학교'의 시초였다.


[부록2] '제중원'(濟衆院/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에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1885년(고종 22년) 4월에  미국인 알렌(Horace N. Allen/安蓮)에 의하여 세워진 우리 나라 최초의 서양의학 의료기관 '제중원'.


[설립]

'제중원'의 처음 명칭은 '왕립광혜원'(王立廣惠院)이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의사였던 알렌은 중국에 있다가 1884년 9월 우리 나라에 입국하여 미국공사관 의사로 일하던 중 그 해 12월 갑신정변을 만났다. 이 우정국사건(郵征局事件)에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하여 준 것이 계기가 되었고, 우정국사건 3일 후 청·일 충돌에서 부상당한 100여 명의 청병(淸兵)을 치료하여 명성을 높이게 되자 곧 궁중의 전의(典醫)를 겸하게 되었다.

고종은 그의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혜민서'(惠民署)와 '활인서'(活人署)를 혁파(革罷)하여, 1885년 2월 29일 '광혜원'(廣惠院/House Of Extended Grace)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한성 재동에 설치된 '왕립병원'이었다. 건물은 이윤용(李允用)의 집(창덕여자고등학교 자리)을 쓰게 하였는데, 이 명칭은 그 사무를 담당하였던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오늘의 외교부)의 계(啓)에 의하여, 그 해 3월 12일 '제중원'(濟衆院/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으로 개칭되었다.

[선교의사의 활동]

알렌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하루에 최고 260여 명의 환자를 보게 된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환자의 수가 늘어나서 진료업무가 복잡하게 되자, 알렌은 한때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의 도움을 받기도 하다가, 곧 추가로 파견된 선교의(宣敎醫) 헤론(John W. Heron)과 함께 진료에 종사하였다. 188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여의(女醫) 엘러즈(Annie J. Ellers)가 파견되어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왕실 여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이렇게 '제중원'의 진료업무가 더욱 번창하자, 1887년에는 한성 남부의 동현(銅峴/현 을지로 입구와 2가의 중간, 한국외환은행본점 자리)으로 옮겼는데, 이곳은 갑신정변 이후 몰수한 홍영식(洪英植)의 집이었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朴定陽)의 수행원으로 떠나게 되자, '제중원'의 진료업무는 헤론이 전담하게 되었고, 부인부의 여의는 엘러즈(Annie J. Ellers)가 혼인하게 됨에 따라 홀튼(Lillias S. Horton)으로 교체되었다.

그 뒤 알렌이 돌아왔으나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으므로 병원진료는 하지 않았고, 1890년 여름에 헤론이 병사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빈튼(Charles C. Victon)이 의료업무를 이어 맡다가, 1893년 다시 추가로 파견된 애비슨(Oliver R. Avison/魚丕信)에게 인계되었다.

1888년 봄에 우리나라에 왔다. 그 여자는 북장로교 선교부가 '광혜원'에 2대 부인부 과장으로 파송한 여의사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서양인들이 '양귀자'(洋鬼子/서양 귀신/서양 도깨비)라고 불리며 온갖 억측과 소문에 시달리고 바깥 출입도 제대로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홀튼 또한 '광혜원'에서의 근무가 쉽지 않은 상태였는데, 언더우드가 곁에서 그 여자를 지켜주고 많은 것을 도와주었다. 결국 둘 사이에 사랑이 싹터, 그들은 1888년 가을에 정식으로 약혼하고, 민 왕비의 특별대우를 받으며, 1889년 3월 결혼했다. 민 왕비의 특별대우는 홀튼이 왕비의 시의(侍醫)로 지낸 덕분에 가능했고, 언더우드는 이때까지 드러내 놓고 선교사라는 것을 공언할 수 없는 처지였으나, 왕비의 시의와 결혼함으로써 일약 주목받는 유명인사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발전]

'제중원'은 1885년 왕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활동을 한 이래, 1894년 6월 갑오경장의 행정관제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여 종두(種痘) 및 의약전염병예방업무 등을 맡게 하면서 7월 18일 내무아문(오늘의 내무행정부)으로 폐합되었다. 이 후 선교사업기관으로 분리되어 의료업무를 계속하였는데, 병원운영을 맡은 관리들의 부패로 업무를 수행할수 없어 정부에 쇄신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권리를 에비슨에게 맡겨, 설립한 지 9년 만에 경영권도 완전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애비슨에 의하여 1899년 '제중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제중원'은 진료활동 외에도 1886년 3월에는 조수 양성을 위하여 16명의 학생을 뽑아 의학교육을 실시한 바 있는데, 고종은 이들 미국 의사들의 공로를 치하하여, 1886년 5월에 알렌과 엘러즈에게 각각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을 내렸으며, 그 해 9월에 알렌에게, 이듬해 11월에 엘러스에게도 각각 그 품계의 벼슬을 특별히 내렸다.


['제중원'의 진짜 정체는 무엇인가?]

'제중원'이 세워지기 전에 이미 조선에는 근대 서양 의술을 시술하는 병원과 의사가 여럿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 우리들은 어째서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그 병원들이 아니라 '제중원'을 최초의 근대 서양식 병원으로 꼽는 것일까?
<자세히보기>.


◆<사진/서울 주변의 모습> '제중원' 부녀부 담당 여의사 홀튼(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내)의 회고록 중에서. (Lillias H. Underwood(Lillias Horton), 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Or Life In Korea, Boston, New York: American Tract Society, 1904, p.13)


[부록3] 의학 사극 '제중원' 속에 비춰진 '민 왕비'의 모습!!

특히 필자가 드라마 '제중원'에서 여의사로 등장하는 의료선교사 홀튼(1888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혼인)에 관하여 깊은 관심을 두는데는 그 여자가 시의(侍醫)로서 민 왕비를 가까이에서 모셨기에, 그 어느 누구보다도 민 왕비의 용안을 잘 알고 있었으리라 판단되기 때문이다.

필자가 <호국스페셜 제1부> [아, 저 하늘에도 슬픔이!!]<자세히보기>에서 밝힌 바 있둣이, 문헌상으로 밝혀진 민 왕비의 모습은 '우아하고 근엄했으며, 체형은 작고, 눈빛이 날카롭고 초롱초롱했으며, 수척한 볼에, 갸름한 얼굴의 여자'라고 전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민 왕비(명성황후)의 용안이라고 알려진 사진들과 초상화들은 '가짜'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다만, 아들 순종의 용안이 어머니 민 왕비의 용안을 많이 닮았다고 전하여, 이승만 씨가 그렇다면, 과연 민 왕비의 '진짜' 모습은 없는 것일까? 필자의 작은 판단으로는 그 분의 실제 모습이 담긴 그림이 이 하늘 어디인가에 있을 것이요, 다만 때가 되지 않아서 밝히 드러나지 않는 것 뿐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첫째는, 역사학자 문일평 씨가 쓴 '호암전집'을 보면,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기 위해 당시까지 살아있던 황후의 상궁들을 찾아가 사진의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한결같이 부인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라는 증언이다. 그리고 민 왕비(명성황후) 시해사건 후 고종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민 왕비와 관련된 자료를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결국 변변한 초상화 한장 찾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문일평 씨의 증언에 의하면, 민 왕비께서 시해당하시기 수 개월 전에 사진을 찍으셨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 사진(원판 포함)을 인화해서 민 왕비의 용태를 정확하게 분석한 후, 시해를 결행(?)했다고 판단된다. 그러기에 시해의 전권자인 일본 공사 '이노우에'가 민 왕비를 알현하지 않았겠는가? 일본의 궁내청(宮內廳) 어디인가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곳에는 조선총독부가 불법으로 유출해간 우리의 귀한 도서들이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2010.2.1/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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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사진이라는 것이 이미지를 담고 만드는 것이라 생각 할 때 존재의 유무조차 파악 되지 않은 사진의 진위논쟁 보다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바르게 정립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흔히 '민비'라 격하되고 비하되는 호칭, 권력에 집착한 여자, 민씨 세도정치의 주범, 투기와 질투가 심했던 여인 등 과 같은 부정적인 인식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및 조선 침략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식민사관에서 발생한 것이다.  민족사관에 기초해 우리 역사를 바로보고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 그렇게 바로잡고 정립된 이미지 그 자체가 눈에 보이는 사진 이상의 사진으로서 가치일 것이다.


필자가 의학 사극 '제중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렇다:

    1. 알렌의 한국 내에서의 위상과 그의 행적이 어느 정도 밝혀지는가? 그는 의사/선교사 이전에 '정치 로비스트'(?)로서 깊이 활동하였다는 기록 때문이다!! 민 왕비의 배려로 그에게 조선 광산 채굴권이 주어져서 '의료와 선교'는 뒷전에 두고서 '비지니스'에 몰입하였다는 이 이야기는 알렌에 대한 부정적인 것이기에, 필자는 양자를 밝혀서 정리해야 할 소명을 느꼈으며, 그 분에 관한 역사적 공적을 별도로 연구할 것이다!!

    2. 필자의 경우, 고향에서 태어난 동갑내기가 없다. 다 죽고 필자와 건너 마을 여자 동갑내기 하나만 생존하였다고 전해 들었다. 소위 천연두(마마/곰보병)가 휩쓸고 가버렸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우두(종두) 주사를 맞지 않았는데, 기적으로 생존하였다.

    3. 19세기 '조용한 은둔의 나라' 조선의 땅 안에는 서구의 열강들(미국/영국/프랑스/독일/러시아)이 직접 요구하거나, 일본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밀고 들어오는 '개화의 물결' 곧 침략주의(식민주의)에 맞서서, 열악한 상황에서도 '조국강토'를 지켜내려는 '수구의 물결'이 휘몰아쳐 역사의 한 장을 이루었다. '자전거'를 '자행거'(自行車)라고 불리웠던 옛날의 새로운 역사의 숨결을 되살려준다.

    4. 1863년부터 시작된 대원군의 섭정으로 '쇄국'이 강화되었고, 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이 전파되기는 힘들었지만, 1885년에 '목숨'이 살고 죽는 '의료기술'을 통하여서 하나님은 '그 복음의 기초'를 세우신 것이요, 숱한 우여곡절 끝에 1895년 민 왕비께서 시해당하신지 3년 후인1898년에 드디어 한국의 땅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자유로이' 전도할 수 있는 호조(護照/당시 외국인에게 개방된 곳 이외 지역으로 여행할 때 휴대해야 했던 여행증명서)를 스왈론(W. L. Swallon/蘇安論) 선교사에게 발행해 줌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화중광야 찬송가산책] 애니 로리 (Annie Laurie ㅡ 찬송가545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자세히보기)


[부록4] 의학 사극 '제중원' ㅡ 천민 백정신분의 벽과 외세의 억압의 어두운 역사 속에 꿈을 이룬 한 젊은이의 인간 승리 리얼리티!!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L. H. Severance)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애비슨에 의하여 1899년 '제중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드디어 102년 전 한국 최초의 의사가 배출됐다. 1910년 한일병합 2년 전인 1908년 조선 최초 서양병원인 세브란스병원의 학교에서 의사면허 1호부터 7호를 받은 7명의 의사들이 그들이다. 당시 조선에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가 이들에게 직접 졸업장을 수여했다.

그런데 이들은 의사가 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을 떠나게 된다. 조국에서 안정된 삶을 버리고 그들이 선택한 길은 독립투사의 길이었다.

신창희는 1910년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에 적십자 사상의원을 열어 독립운동을 전개했으며, 주현칙은 3.1 운동에 가담한 직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홍종은은 신창희와 함께 병원을 운영했고, 김필순은 서간도 통하로 망명해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하고 독립운동의 거점이었던 치치하얼에 '북제진료소'(北濟珍療所/북쪽에 자리한 '제중원'이란 뜻)를 열었다.

박서양(朴瑞陽/1885-1940) 역시 북간도로 망명해 '구세병원'과 숭신학교를 건립했으며, 김희영은 1919년 3.1 운동의 연루자(105인사건)으로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1920년에 사망했다.
박서양은 백정 출신 박성춘의 아들로 알려진 인물로서 바로 의학 사극 '제중원'에 모티브를 준 장본인이다.

◆<사진캡쳐=KBS '스페셜'(2010.2.28 방영) 세브란스병원장 애비슨 선교사가 35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귀국 길에 오른다. 그런데 곧바로 귀국하지 않고 20년만에 제자 '박서양'을 만나려고 북간도 용정으로 간다. 그런데 때마침 급한 환자가 생겨서 의사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왕진을 갔다는 그의 아내의 전갈을 받고서, 애비슨은 '의사에게 환자를 돌보는 일 말고 더 중요한게 어디 있겠는가?' 라고 회고한다. (사진은 애비슨의 수술을 돕고 있는 의생 박서양).


박서양은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서양 의술에 눈뜬 선구자로 국내 최초의 의사이며 독립군 투사다. 바닥 청소와 침대정리 등 병원 허드렛일부터 의술을 배우기 시작해 1900년 8월 세브란스의 전신인 제중원 의학 정규반에 입학, 1908년 6월 한국 최초의 의사 면허장 '의술개업 인허장'을 받았다. 이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1917년 간도로 넘어가 의료활동과 독립운동에 전념했고, 1936년 귀국해 1940년 운명했다.

물론 '제중원'이 픽션을 다룬 드라마인 만큼 주인공인 황정과 박서양은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박서양이 백정의 아들인것은 맞지만 실제로 소를 잡는 백정의 일을 하지 않았고, 의사 공부도 알렌이 아닌 애비슨(Oliver R. Avison)에게 받았다.

하지만 백정 집안 출신으로 최고의 엘리트인 의사로 자수성가 했고, 이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간도로 넘어가 군의관으로 활동한 점 등은 역사적 진실이다. 정부도 이러한 박서양의 업적을 기려 2008년, '건국포장'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의 이러한 일대기는 드라마나 영화 속 파란만장한 주인공의 삶과 견주어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드라마 '제중원'은 신분의 벽과 어두운 역사 속에서 꿈을 이뤄낸 박서양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사진캡쳐=SBSTV '제중원'(2010.3.15 방영). 백정 '마당개'와 그의 아들 '소근개'는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고 그렇게 '제중원'을 떠났다. 발목을 절단한 아버지 '마당개'를 수레에 싣고 아들 '소근개'가 마차에 싣고 끌었다. 고향 친구 '작대'(정석용 분)가 뒤를 밀었다. 한 의녀가 재수 없다며 그들에게 소금을 뿌렸다. 한겨울에 질척이는 흙길을 그들은 그렇게 걸을 수밖에 없었다. 운명 앞에 그렇게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유석란'(한혜진 분)이 그들을 뒤쫓았다. 떠나는 '소근개'를 붙잡았다. 하지만 '소근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여자 앞에서 무릎꿇는 것 뿐. 그들은 더 이상 장래를 약속한 연인이 아니었다. 평민과 천민의 신분 차이가 그들을 그렇게 갈라놓았다. 지난 날 사랑으로 무릎 끓었던 '소근개'는 지금은 신분의 굴레 앞에 무릎꿇을 수밖에 없었다!! 이 민족의 아픔...서양 선교사들의 계속적인 간청으로 1894년 고종은 모든 천민의 계급을 철폐시킨다는 칙령을 내린다.


썩어들어가는 백정 아버지 '마당개'(장항선 분)의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서 지금까지 '제중원' 안에서 자신의 신분을 속여왔던 그의 아들 '소근개'(박용우 분)는 자신의 신분이 백정의 아들임을 토로하면서 자기 아버지의 다리를 치료해달라고 눈물범벅이 된 채로 간청하는 그 장면에서 필자는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본 의학사극 '제중원'이 낮은 시청률로 인하여 조기종영한다는 설이 돈다. 물론 상대적이다. 엄청난 제작비가 광고료에 의해 충당되는 현실이고 보면,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무력감을 네티즌들은 어디에다 호소하겠는가? 그러다가 시간이 지난면 금방 잊어 버리고 만다. 역사는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병존한다고 2009년 <제1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드라마의 경우, 그 배경의 역사는 '정사'로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그런데 그 드라마의 구성상(여러 조건들이 필요하다) '야사'가 주를 이룬다. 그리고 작가와 제작자측의 '픽션'이 한 몫을 단단히 한다. 본 드라라마 '제중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황정'(黃丁)은 실존인물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근대조선의 최초의 서양의사 탄생이라고 하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의 시대적 요구에 맞춰서 갖은 역경을 이겨낸 후의 값진 열매라는 한민족의 '자긍심'을 잊지 말자는 것이 필자의 바램이다!!



[그리고 125년이 지났다 ㅡ 점점 가시화되어가는 안티-그리스도교의 물결!!]

그런데 근래 이 땅의 서울 한복판에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을 거역하는 '반그리스도교'(ANTI-CHRISTIANITY) 단체가 본격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서울시내 일부 노선 버스에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내용의 광고물을 실었다. 그리고 서울시 버스운송사업조합측이 2월 8일 해당 광고물을 철거했다.

버스운송조합 관계자는 '반그리스도교 단체의 광고물이 버스 외부 광고에 올라 있다는 소식을 언론보도를 통해 접한 뒤, 이 광고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해 관련 광고를 모두 철거하도록 했다'라고 말했다.

광고물은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는 아인슈타인의 말과 사진을 실은 것으로,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리스도교계가 크게 반발했다. 이 광고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반기련)이 지난 2월 5일부터 서울 시내와 경기도 광명시 등을 오가는 4개 노선 버스 8대의 외부에 게재한 것으로 파악됐다.



◆<사진설명/최근에 '반기련'(反基聯)이 주도한 '반그리스도교' 광고 현장>. 광고 문구는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어록이다: '나는 자신의 창조물울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I cannot conceive of a God who rewards and punishes his creatures).


'아인슈타인' 그는 누구인가? 그는 천재요, 철학자요, 인도주의자요, 평화주의자요, 사회주의자요, 그리고 시온주의자였다. 그리고 예호바의 존재를 부정하는 진화론자들과 무신론자들의 '총애를 받는 자'(DARLING)였다. 안티-그리스도교 개인/단체 곧 무신론자들은 우주의 창조를 밝혀준 <창세기>를 엎어 버리고자 아인슈타인의 말을 곧잘 인용한다. 위 광고 문구도 그 중 하나이다.

이러한 무신론적 광고의 등장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2009년 1월 6일, 영국에는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의 저자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신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제 걱정을 멈추고 인생을 즐겨라.'(There’s probably no God. Now stop worring and enjoy your life.)는 내용을 영국 버스에 광고했다.
그리고 필자는 이런 상황을 직견하고서, 관련 자료를 업그레이드 해놓았다. [화중광야ㅡ眞理把持] 배도의 현장 17 ㅡ 리차드 도킨스. <자세히보기>.

그 후 1년 후에 우리네 삶 속에도 이렇게 하나님을 부정하는 무리들이 공격해 오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스피드스케이팅 결승 실황을 해설하던 'ㅈ' 씨가 우승의 결과를 '주님께서 시키셨습니다'라고 멘트를 하였다가 하차당하고 말았다. 지난 3월 12일에 우연히 '극동방송' 프로그램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여기에서 당사자 'ㅈ' 씨가 그 당시의 상황을 해명해준다. 참으로 타종교들이 이리도 배가 아픈가 보다. 그리고는 또 얼마 전에는 불교계에서 대한축구협회측에다, 축구 결승골 넣은 후 벌이는 선수의 '기도 세레머니'를 금지시켜 달라는 청원이 있었다고 한다. 기가 막힌 '종교간의 질투의 현장'이다.

이것은 작금 SBS TV에서 방영중인 '한국 근대병원의 태동/산실'을 드라마화한 '제중원'(濟衆院)의 방영에 영향을 받은 '반그리스도교'(ANTI-CHRISTIANITY) 무리가 그냥 스쳐지나갈 리 만무한 것이다.

'안티-그리스도교'(ANTI-CHRISTIANITY)를 주도하고 있는 저들은 '믿을 자유가 있고 전도할 자유가 있듯이, 자기들은 믿지 아니할 자유가 있고, 믿지 말라는 자유가 있다'고 항변하였다. 그런데 이는 저들이 진실로 그리스도교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교는 믿을 자유가 문제가 아니라, 택함의 문제인 것이다. (에베소서 1:4)

    1:4According as he hath chosen us in him before the foundation of the world, that we should be holy and without blame before him in love. (Ephesians 1:4)

    1:4하나님이 그 세상의 그 혼돈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해 놓으신 것까지도, 우리가 사랑 안에서 그 분 앞에 거룩해지고 흠없이 되게 하심이라. (에베소서 1:4, KJV화중광야역)


다른 종교는 믿음을 '믿느냐 믿지 않는냐' 하는 자유의 문제로 여길른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는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믿을 자유와 믿지 않을 자유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복받음'(Blessed)이요, 영(Spirit)과 혼(Soul)의 문제까지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THE LOVE OF GOD)인 것이다. 하나님의 그 사랑은 구속/매임(Binding)의 의지가 아니요, 자유의 의지의 제한도 아니고, 오로지 영원한 죄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인 것이다. 이런 면을 무신론자들이나 안티-그리스도교 단체들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둘째,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이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1:27)

    11:27All things are delivered unto me of my Father: and no man knoweth the Son, but the Father; neither knoweth any man the Father, save the Son, and he to whomsoever the Son will reveal him. (Matthew 11:27, KJV)

    11:27나의 아버지께서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하여 넘겨졌노라. 그러기에 그 아버지 외에는 그 아들을 아는 자가 없으며, 그 아들과, 그 아들이 밝히 드러내겠다는 자 외에는 그 아버지를 아는 자가 아무도 없나이다. (마태복음 11:27, KJV화중광야역)


그러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나는 신이 어떤 원리로 우주를 창조하고 변화시키는지 알고 싶다. 그 이외에는 하찮은 것이다.'고도 말한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그는 신(神)을 알고 싶어했지만, 물리학의 천재인 그가 신을 발견했다고 말한 적은 없다.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밝혀내겠지만,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소신을 마음껏 펼쳐 낸 것이 아니라, 그의 배후에도 '예수회'가 있었고, '록펠러'가 있었다는 역사적 진실이다. 이러한 진실이 공교육에서는 전혀 가르쳐지지 않는 다는 것이 인간이 직면하는 또 하나의 '혼돈'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셋째, 인간은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절대로 알 수 없다. (고린도전 1:21)

    1:21For after that in the wisdom of God the world by wisdom knew not God, it pleased God by the foolishness of preaching to save them that believe. (1 Corinthians 1;21, KJV)

    1:21따라서 하나님은 지혜로우시어 그 세상이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기에, 하나님은 복음전파의 그 어리석음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고린도전서 1:21, KJV화중광야역)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알 수 없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빌립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14:9)

    14:9Jesus saith unto him, Have I been so long time with you, and yet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and how sayest thou then, Shew us the Father? (John 14:9, KJV)

    14:9예수님이 그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이토록 오랫 동안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 왔는데, 네가 아직도 나를 알지 못했단 말이냐? 나를 보아 온 자는 그 아버지를 보아온 것이요,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말하기를, '우리에게 그 아버지를 보여주소서'라고 하느냐?'고 하시니라. (요한복음 14:9 KJV화중광야역)


만일 예수님이 그 아버지가 자기 안에  계시다는 그 말씀들을 그 제자들이 믿지 못하게 될 것 같기에, 그 분은 자신의 일들을 증명해 보이신 것이다. 만일 그 아버지가 자기 안에 계시다고 말씀하신 것을 그 제자들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할 것 같기에, 자기 안에서 그 아버지가 일하심을 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자기 제자들에게 믿도록 당부하신 것이다. 육적인 눈으로는 그 혼을 볼 수 없는 것인데, 여전히 그 제자들은 그 혼은 그 몸 안에 존재한다고 믿으니, 이는 그들이 그 몸의 일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그 혼이 그 몸 안에 내재해 있지 않으면, 그 혼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일들을 실행하는 그 몸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은 예수님도 단순한 한 인간이시면 행하실 수 없는, 곧 그 아버지가 그 분과 함께 그리고 그 분 안에서 행하지 않으시면 행하실 수 없는 이적들, 곧 초자연적인 일들을 보는 것이다.


[맺는말] 알렌 ㅡ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 (I Fell With Korea)

2010년은 '제중원'이 개원한지 125년이 되는 해이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가 다른 외국 선교사들이 고진 박해를 받아가면서도 한민족을 버리지 않았다:

    '성경책이 던져진 압록강물은 한국인들의 생수요, 불에 탄 성경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리라.' (1883년 이른 봄/ 존 로스 선교사의 예언)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 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와 빛을 주소서'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선교사의 방한 첫기도)



◆1905년 갑자기 한국을 떠나게 되는 알렌 송별사진 (앞줄 오른쪽 세 번째). 갑자기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는 어떤 '반목'이 있었나? 혹여 일본의 한국찬탈 전초인 '을사늑약' 체결 전에 1905년 7월 29일 비밀리에 맺은 '태프트-가쓰라 밀약' 때문은 아니었는지...필자는 그 과정을 밝혀낼 것이다!! <호국스페셜 제1부> [어질지 않은 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오래 견디지 못한다] <자세히보기>


그들은 중국인들보다, 일본인들 보다도 '특별한 인정'을 쏟았다. 알렌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토로한 고백이 뭉클하게 지려 온다: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 (I Fell With Korea.)


그리고 125년이 지났다. 저 선교사님들이 이 강토 위에 뿌려놓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의 씨앗이 또 다른 열매를 맺었고, 그 열매들이 다시 씨뿌려져서 지금 비공식집계에 의하면, 약 2만여명의 한민족 선교사들이 해외로 파송되었음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그리고 중국이나 일본 보다는 한국 인구의 약 1/4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현실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다. 일본은 겨우 1% 안팎이 그리스도인이요, 중국은 그리스도교가 금지된 채, 겉으로 생색내기인 '삼자교회'(중국 정부기관이 통제ㅡ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다시오심을 금지)가 있다지만, 진짜 '모임'은 지하로 숨어있다고 듣는다. 이런 상황은 북한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최근들어서 북한의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 같다. 저들이 내세우던 '2012 강성대국' 이전에 붕괴될 조짐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1907년 한민족 대부흥의 발상지였던 저 북녁 땅에도 '그 복음의 빛'이 찾아오는가 보다...삼파람을 타고서...


<Created/20100316> <Updated/20100320><201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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