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작곡/ 정재선 ㅡ 채보/ 루디아 안 ㅡ 편곡연주/ 다니엘 정


[Dembo's Unforgettable  Essay ㅡ SamPaRam]
[삼파람 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2] 호레이스 알렌이 한국을 떠나면서 남긴 말
ㅡ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 ㅡ

글/ 정재선 목회자


'부디 이제는 이 나라 대한민국이 적어도 기개가 곧고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나라로 바로 세워지길 바라면서...
더 이상의 끌려다니는 굴욕적인 자세는 버려야...'

카아(E. H. 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와 인성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자신이 다루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인물의 사생활에 대해 역사가가 도덕적 판단을 내릴 필요가 없다는 것은 오늘날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 헨리 8세는 나쁜 남편이었을 수 있지만 훌륭한 왕이었다. 그것이 역사적 사건에 영향을 미칠 때에만 역사가는 그의 그런 (도덕적) 자질에 관심을 갖는다.

카아의 말은 역사적 인물의 도덕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한 인물의 인성에 좌우되어 그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조선을 떠나면서 'I fell with Korea(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는 말을 남긴 알렌은 조선을 배반하지 않고 신의를 지킨 선교사이자 외교관이며 제중원(濟衆院) 의사였다.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의 전신(前身)인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 설립자 호레이스 알렌(Horace Allen/1858-1932)의 유품(遺品)이 10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세대 홍보대사인 'M' 씨가 지난 1월 9일 '한국에서 공사(公使)와 의사 겸 선교사로 활동하다 1905년 6월 9일 미국으로 송환된 알렌의 유품 10여 점을 최근 미국에서 입수했다'며 유품을 공개했다. 알렌의 유품이 공개되기는 처음이다. 그런데 그 분이 공개한 한 통의 서류가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바로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한국의 고종 황제에게 보낸 알렌 선교사를 귀국시킨다는 소환장이었다. 그 소환장에는 'Emperor of Korea, Great And Good Friend'(가장 선한 친구 한국의 황제에게)라는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2010.3.24/밤/정재선 쓰다) (2010.5.3 보완하다)


[외교관 알렌]
1887년 알렌은 3년이 채 못 되는 선교사 생활을 마감한다. 주미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미국으로 떠나게 된 것. 이후 15년 가까이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특명전권대사 등 외교관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일본이 호시탐탐 한국을 식민지화하려던 당시 알렌은 반일(反日)을 주장했고,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려 했다. 1903년 미국에 도착한 알렌은 동년 9월 30일, '대한정책관계'(對韓政策關係)에 대해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격론을 벌였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알렌은 1882년 '조미수호조약' 대로 한국을 보호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1905년 3월 29일, 알렌을 주한 미국 전권공사의 직위에서 해고하고 미국으로 송환한다. 송환이유는 현지 대사로서 미국의 국익에 반대되는 주장을 하기 때문이다. 알렌은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I fell with Korea)'는 말을 남기고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905년 6월 9일이었다. 알렌은 다시는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드디어 1905년 7월 29일, 일본에서 미국 육군성 장군 테프트와 일본수상 가츠라 사이에 맺은 '테프트-가쓰라 밀약'에 따르면,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대신 일본이 한국에 들어오는 걸 묵인해 주기로 한다. 이후 미국이 일본을 묵인함에 따라 '을사조약'(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는 비극을 맞는다!!


◆노재연, '재미한인약사' (상권).

다음은 '재미한인약사'(상권)에 수록된 알렌 선교사 관련 일부 기록이다:

한국(韓國)의 교회 성적(敎會成績) <1904년 4월 5일>

    4월 5일에 호놀룰루 미국인 유년 교회에서 부인 전도회로 모여서, 하와이 군도와 기타 지방의 전도 사업에 대한 담화가 있었는데, 그 중에 원동(遠東)의 정치적 관계로 중요성을 가진 한국내의 전도 사업에 대한 기록을 라버트 캠벨 부인이 낭독한 바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1873년에 만주에 설립한 스카치 합동 장로교회의 목사 제이 매킨타야 씨와, 진 로스 씨가 한국에 예수교를 전파하려고, 만주 동편(東便) 지방에서 한인과 중국인이 물화를 교역하는 의주 책문을 심방하였는데, 우연한 성공이 계속한 결과로, 《누가복음》의 일부를 한·로(韓露)어로 번역하여 소형 책자를 만들어 한국에 수입하였었다.

    약간의 시일을 경과한 뒤에 로스 목사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일에 전도하던 지방을 다시 심방하니, 참 기쁘고 즐거운 것은 그 사람들이 다 예수교를 신앙하여 금번 심방에 세례를 받은 사람이 85인에 이르렀다.

    미국인의 선교 사업은 1884년에 장로교회에서
    의사 겸 선교사 호레스 엔 앨렌 씨를 파송하였었는데, 지금은 주한미국공사로 있으며, 그때에 한국은 은사국(隱士國)(편집자주/타국을 침범하려고도 않고 타국인은 입국도 시키지 않는 나라). 그리하여 외국인들은 제물포에 피난하였으나, 앨렌 씨 부처는 줄곧 서울에 머물러서 갑신 정변(甲申政變) 소동에 부상한 왕후 민씨의 장질 민영익(閔泳翊)씨의 이각 수술(耳殼手術)에 성공하여, 이로 인하여 궁정 시의(侍醫)에 서임되어, 이때부터 한국이 문호를 개방하여 태서 문명(泰西文明)과 예수 복음을 환영하게 되었었다. 이제 재류 한인들이 일로 전쟁에 관한 통신을 듣기 원하므로 호놀룰루 감리교회 목사 피어슨 씨가 복사판 신문을 인쇄하여, 송하며, 주일학교(主日學校) 과정도 기재하여 성경 공부를 장려하였다. (p.463-464)


미 공사 소환(美公使召還) <1905년 4월 5일>

    작년 4월 14일에 주한미국공사 앨렌 씨가 워싱턴 정부에 서한을 보내어, 한국 황제가 일본의 무리한 행동에 대하여 심히 우려하는 바를 말하고, 러일전쟁이 결말이 난 뒤에는, 미국 정부에서 한미조약(韓美條約)에 맹약한 바와 같이, 한국 독립에 대하여 진력 방조하기를 희망한다 하고, 또 금년 4월에는 한국에 있는 미국 선교사들과, 한인들이 일인의 불법 행동에 대하여 항의하는 글을 워싱턴 정부에 보냈더니, 일인이 탐지하고 미국 정부와 교섭하여 앨렌 공사를 소환하고, 이이 비이 모오겐이 신임되었다. (p.467)


[한국에서의 봉사] 3년간 의료선교사로 ㅡ 15년간 미국 외교관으로

조선 정부는 1882년 서양 국가 중 최초로 미국과 상업 및 우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조미통상수호조약' 이후 조선에는 미국 공사관이 생겼고 알렌은 의사의 신분으로 1884년 조선에 왔다. 그는 1884-1905까지 근대 조선에서 22년간 생활하였는데, 그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의사, 선교사, 외교관, 조선 관료 등 다양하다. 알렌은 다른 국가의 외교관들과는 달리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외교관이 아니라, 의사와 선교사로서 활동하다가 '갑신정변'을 계기로 하여 쌓은 조선왕실과의 친분을 바탕으로 주한 전권공사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1887년 주한 미국 공사로 발령받은 알렌은 7년 8개월 동안 재임하면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런데...

    'If other Powers deal unjustly or oppressively with either government, the other will exert their good offices on being informed of the case, to bring about an amicable arrangement, thus showing their friendly feeling.' <Horace Allen, Things Korean, New York: F. H. Revell Co., 1908, p.8>. 본서의 한글번역서 ㅡ [H.N.알렌 지음, 신복룡 역주,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참조.

    第一款 嗣後로 大朝鮮國 君主와 大美國 伯理璽天德(大統領) 및 그 人民은 各皆 永遠히 和平友好를 지키되 萬若 他國이 不公輕侮하는 일이 있게 되면 一經照知에 必須相助하여 從中善爲調處하므로 以示友誼關切한다.

    [전문 14개조]로 구성된 '한미수호통상조약'(韓美修好通商條約)의 주요 내용은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제1조), '양 체결국은 각각 외교대표를 상호 교환하여 양국의 수도에 주재시킨다'(제2조), '치외법권은 잠정적으로 한다'(제4조), '수출입상품에 대한 관세부과권은 조선정부에 속한다'(제5조), '거류지는 조선영토의 불가결한 부분이다'(제6조). '양국간에 언어, 문예, 법률 등 문화학술교류에 보호와 원조를 다한다'(제11조) 등이다.


알렌은 자신의 회고록 <Things Korean>(조선견문기)에서 미국은 한국이 위기 때에 양국 간에 맺은 조약대로 관심을 쏟지 못했다고 술회하면서, 한국인들을 향한 자신의 진심어린 동정을 보낸다고 말한다.



◆1882년 5월 22일 <한미수호조약> 체결후 향연. 본 체결 기념연회를 그린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미국 공사인 인물의 복장이나 모자등에서 상상으로 그렸다고 생각된다. 상상은 상상에 지나지 않고, 현실은 아니다. 安中植(1861-1919)의 작품.


주영(駐英) 서리공사 이한응(李漢膺)이 국가의 세력이 위축됨을 비분(悲憤)히 여겨 자결한지 꼭 석 주일이 지난 1905년 6월 2일, 서울에 있는 미국 공사 알렌은 자신의 해임 통보를 받았다. 그러나 그 해임 소환의 원래 날짜는 3월 29일이었다. 그 문서 배달이 선편으로 온 것이 확실하였다. 이는 선편으로 취임한 모건(Morgan) 공사가 직접 가져 온 것으로 보인다. 알렌은 '국서진정'(國書進呈)을 위해 고종의 폐견(陛見)(폐하/陛下의 접견을 이르는 말)을 요청하였다:

    大美特派漢城全權大臣安連 爲照會事 此胎呈卽召還本公使之國書膽本 而本公使擬於本月八日 離漢城 故玆備文照會貴大臣 請煩査照秦達天陛  俾蒙陛見, 幷行辭陛爲要
    <美公使召還國書進呈 및 陛見要請, '舊韓國外交文書, 第十二卷, 美案 III, (1905.6.2), p.753.>


루즈벨트는 자신의 '알렌 해임장' 국서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본인은 전권 특명대사 알렌이 한국을 떠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지금껏 귀 정부와의 친밀한 우정(closest friendship)을 증진시키는 데 힘써 왔던 알렌 씨가 폐하에게, 현재 한미간에 존재하고 있는 행복한 우정, 넘친 감정을 강화시켜려 하고 있는 우리의 진지한 소망을 전달하도록 지시를 하였습니다. <폐하의 선한 친구. 데오도루 루즈벨트>

    <민경배, '알렌의 선교와 근대한미외교',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1, p.407>
    <'舊韓國外交文書', 第12卷, 美案, 3, 光武 4年7月 - 光武 10年1月(1900-1906)>

    ◆루즈벨트 미대통령이 고종 황제에게 보낸 알렌 공사의 본국에로의 소환장 원본 복사본. <조선닷컴 동영상 캡쳐> 본 영상캡쳐 자체가 선명하지 않기에, 필자는 '본문'(사본) 입수를 놓고 기도중이다...


◆1895년 10월 8일(새벽 5시 30분부터 6시 30분 사이에 경복궁 안에 있는 건청궁 곤녕각), 민 왕비께서 일본의 '사무라이들'한테 시해당하시자, 위 선교사들(알렌/언더우드/헐버트)과 캐나다 선교사 애비슨은 고종을 피신시켜드렸다. <사진영상캡쳐/KBS스페셜>(2010.2.28 방영)


◆제중원(초창기 이름은 광혜원)은 고종황제 때 (道記15년 1885년 4월10일 고종 22년 2월25일)  직접 지은것으로 황제께서 친히 돌볼정도로 애정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 알렌은 제중원 운영을 책임지었다고 한다. 박서양(1885-1940 드라마 제중원 극중 : 황정,소근개 역)은 한국의 실존했던 의사이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8년 제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서울에서 백정(白丁) 박성춘(朴成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박성춘은 백정이었으나 의료선교사 애비슨(O.R. Avison:魚丕信)과 친교를 맺어 후에 은행가가 되었다. 아버지의 부탁으로 박서양은 에비슨이 맡고 있는 제중원의학교(후의 세브란스병원)에 입학하여 1908년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 후 오성학교·중앙학교·휘문학교 등에서 화학을 가르치고, 세브란스 간호원양성소의 교수로도 활동하였다. 1918년 이후 만주의 용정(龍井)으로 가서 구세의원(救世醫院)을 개업하였다. 또한 교회를 설립하였고, 소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독립군들의 의료도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위키백과제공). 박서양에 관한 전기는 2010년 2월 28일에 방영한 <KBS 스페셜/ 한국최초의 의사들 독립투사가 되다>를 필히 시청하기를 권한다.

◆그 동안 짬짬이 SBS드라마 '제중원'(2010.4.20 방영)을 보면서 한 가지 공로를 전하고자 한다. 바로 아래 장면이다:

    역관(김갑수 분): '오늘 입궐을 했을 때, 알련 공사를 만났습니다.'

    황정(박용우 분): '알련 원장님을 뵈셨다구요?'

    역관(김갑수 분): '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소환명령이 떨어졌다 하더군요. 일본 총리 가쓰라와 미국의 태프트가 얼마 전 밀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이 미국은 필리핀을 지배하고, 일본은 조선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황정(박용우 분):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정작 당사자인 조선은 배격하고, 자기들끼리 갖고 안 갖고를 따지다니요.'

    역관(김갑수 분): '그러기 말입니다. 그래서 알련 공사께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거세게 항의를 하셨나 봅니다. 그 결과 소환명령이 떨어진 것이지요.



그리고 위 '제중원'(2010.4.27 방영)에서는 알렌 공사가 일본 공사를 방문하여 '을사조약'의 무효화를 항변하는데...일본 공사가 '가쓰라ㅡ태프트 조약'(필자는 '태프트ㅡ가쓰라 밀약'이라 칭함)을 들고 나오면서 '서로에게 하는 일을 상관하지 말자고 한 것이 아니냐고' 반격해오는 것이다. 그러니 알렌 공사에게 잠자코 있으라는 일종의 협박성 대답이었다.

필자가 영화나 드라마를 본 중에서 본 드라마 처럼 비밀 속에 싸여졌던 '한반도침탈의 기초석'인 '태프트ㅡ가쓰라 밀약'을 다룬 것은 크나 큰 공로로서 전하고 싶은 것이다. 이에 관한 자료는 이미 올려 놓았으니, 필독을 다시 한번 권한다. <호국스페셜 제1부 ㅡ 어질지 않은 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오래 견디지 못한다/ 자세히보기>.



[알렌의 한국독립보장정책의 정신] 알렌 ㅡ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 (I fell with Korea)

2010년은 '제중원'이 개원한지 125년이 되는 해이다. 언어가 다르고 피부가 다른 외국 선교사들이 고진 박해를 받아가면서도 한민족을 버리지 않았다:

    '성경책이 던져진 압록강물은 한국인들의 생수요, 불에 탄 성경재는 한국교회를 자라게 하는 거름이 되리라.' (1883년 이른 봄/ 존 로스 선교사의 예언)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 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유와 빛을 주소서' (1885년 4월 5일, 아펜젤러 선교사의 방한 첫기도)


그들은 중국인들 보다, 일본인들 보다도 '특별한 인정'을 쏟았다. 알렌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토로한 고백이 뭉클하게 지려 온다: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 (I fell with Korea).

◆1905년 6월 9일, 갑자기 한국을 떠나게 되는 알렌을 위한 주한 각국 공사들과의 송별사진 (앞줄 오른쪽 세 번째가 알렌).
갑자기 귀국하라는 명령을 내린 루즈벨트 대통령과는 어떤 '반목'이 있었나? 혹여 일본의 한국찬탈 전초인 '을사늑약' 체결 전에 1905년 7월 29일 비밀리에 맺은 '태프트-가쓰라 밀약' 때문은 아니었는지...필자는 그 과정을 밝혀낼 것이다!! <호국스페셜 제1부> [어질지 않은 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오래 견디지 못한다] <자세히보기>

◆한국 관련 알렌 연보

1884.9.22   제물포(인천) 경유 서울 도착
1884.9   미공사관 공의(公醫)
1884.12.4   민영익(閔泳翊/ 민 왕비 친정 조카로서 깁신정변 때 치상을 입음) 치료
1885.4.14   광혜원(廣惠院) 설립
1885.4.26   제중원(濟衆院)으로 개칭
1887.8   주미한국공사관 참찬관(參贊官)
1889.6   임무 끝내고 귀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재임명
1889.9   부산에 정착 기도
1890   제물포 거주 의료활동
1890.6   제중원장(濟衆院) 재임명
1890.7.9  

주한미국공사관 참찬관(參贊官)

1890.11.12  

주한미국공사관 부총영사(副總領事)

1891 - 1895   주한미국공사 휴가중 임시대리공사(臨時代理公使)
1895.10.8  

을미사변(乙未事變/ 민 왕비 시해)

1896.2.11   아관파천(俄館播遷/ 고종의 러시아공사관에로 피신)
1896.4.6  

주한미국공사 대리(代理) 겸 부총영사(副總領事)

1897.7.27  

주한미국공사관 미국공사(美國公使) 겸 총영사(總領事)

1901.6.21  

주한미국공사관 미국특명전권대신(美國特命全權大臣)

1903.6.1   미국으로 떠남
1903.9.30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와 대한정책관계(對韓政策關係) 격론
1904.4.7   태극대수장(太極大章) 수여
1905.3.29  

주한미국공사관 미국공사(美國公使) 해임

1905.6.9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감

1905.9   미국 오하이오(Ohio)주 톨레도(Toledo)시 정착/ 의료사업 및 집필
1908.   뉴욕에서 'Things Korean'(조선견문기) 발행
1909.9   서울에서 개최된 미북장로교(美北長老敎) 한국선교 25주년 기념식에 축하논문 발송
1930  

병환악화(病患惡化)로 두 다리 절단

1932.12.11   알렌 톨레도(Toledo)시에서 서거/ 향년 74세

◆<민경배, '알렌의 선교와 근대한미외교', 서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91, p.425-427> 참조.


1905년 6월 9일, 호레이스 알렌은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I fell with Korea) 이 말을 남기고 한국을 영원히 떠난다. 그리고 그는 영영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한다. 그렇게 7년이 지난 1912년 10월 14일 밤 미국 위스콘신州 밀워키市에서는...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전직 미대통령 루즈벨트가 서 있었을 때 총격을 받은 자동차. 자동차 뒷자석의 '십자가' 표시는 루즈벨트 대령(대통령직 퇴임후 복직)과 저격자 슈랭크가 서 있었던 곳이다. 상단 좌측 원(圓) 안은 자동차 소유자 겸 운전사였던 조지 모스이다. <Oliver E. Remey, The Attemted-Assassination Of Ex-president Theodore Roosevelt, Milwaukee: The Progressive Publishing Company, 1912, p.90.> (화중광야제공)


[1912.10.14] 밤 8:10. 전직 미대통령 루즈벨트는 한 발의 총격을 받는다. 루즈벨트가 위스콘신주 밀워키(Milwaukee)시 '길패트릭호텔'(Hotel Gilpatrick) 정문에서 한 자동차 안에 서 있었을 때, 뉴욕 출신의 존 플래맹 쉬랭크(John Flammang Schrank)가 38구경 한 발을 루즈벨트 오른쪽 허리에다 쏘았다. 그는 편집증(偏執症/망상증) 환자였다고 하는데, 술장사하던 한 살롱의 주인이었다고 전한다. <위키피디어/자세히보기>.

범인 쉬랭크는 현장에서 즉시 체포되었다. 전직 미대통령 루즈벨트 대령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데도, 밀워키市 강당으로 옮겨졌고, 9천명이 모인 청중 앞에서 8분간 연설을 마친다. 그리고나서 그는 즉시 '존스톤응급병원'(Johnston Emergency Hospital)으로 옮겨졌고, 거기서 수술을 받는다. 그리고 밤 12시 30분에 특별열차편으로 그는 시카고로 이동하여, '머시병원'(Mercy Hospital)에 입원한다.

[1912.10.15] 쉬랭크가 저격을 시인하다.

[1912.10.18] 전직 미대통령 루즈벨트 위기를 넘기다.

[1912.10.21] 루즈벨트 병원을 떠나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 소재 자신의 집으로 떠나다.

[1912.10.22] 루즈벨트 자기 집에 도착하다.

[1912.10.26] 루즈벨트 최초로 걸어서 외출하다.

[1912.11.25] 범인 쉬랭크는 위스콘신 주 오쉬코쉬(Oshkosh) 소재 '노던정신병원'(Northern Hospital for the Insane)에 감금된다.

<Oliver E. Remey, The Attemted-Assassination Of Ex-president Theodore Roosevelt, Milwaukee: The Progressive Publishing Company, 1912, p.11-13.>

Oliver E. Remey, ibid., p.150,190.


[1차 심문 진술 중에서] 존 플래맹 쉬랭크는 '길패트릭호텔'(Hotel Gilpatrick) 정문에서 즉시 체포되어, 밀워키 경찰서로 이송되어, 경찰서장 잰센(John T. Janssen)의 심문을 받는다:

Q.
'왜 루즈벨트를 그토록 찾아나섰는가?' ㅡ Well, what object did you have in following around and trying to meet Theodore Roosevelt?

A. '역사서를 읽는 중에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니, 이 사람 루즈벨트가 이 나라 미국의 오랜 전통의 하나를 파괴하려는겁니다. 대통령을 세 번씩이나 하려고요...그리하여 아무런 권리도 없는 그가 제3당을 창당하려 하잖아요...' ㅡ Well, because I have been reading history and following up history and I have seen that this man Roosevelt is trying to break one of the old established traditions of the country, calling it a third termer, which he has no right to ; he can create a third party and create all the offices, but to nominate himself it was absolutely out of the way and I think today that it is absolutely unnecessary to establish now and have the third tradition to exist and not to be violated by anybody.

<Oliver E. Remey, The Attemted-Assassination Of Ex-president Theodore Roosevelt, Milwaukee: The Progressive Publishing Company, 1912, p.117-131.>


[맺는말 ㅡ 알렌의 한국사랑은 '마치 비 온 후에 햇빛같이 위로를 안겨준다']

한 발의 총탄을 맞은 루즈벨트에 대한 계획적인 암살은 미수로 끝나고 만다. 이 사건을 알게되었을 호레이스 알렌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인과응보'라고 생각하였을까?

    러시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하여 새로 개통된 시베리아 대륙횡단철도여행을 수행한 후 워싱톤에서 루스벨트의 親日ㆍ反露政策을 비판 반대하는 정책토론 끝에 견책을 당하기도 했다. 일개 공사로서 대통령의 국가정책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일은 세계외교사에서 일찍이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알렌은 러시아를 도와주면 미국의 이권을 수호할 수 있고, 나아가서는 한국의 독립은 보장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을 도와주면 일본은 결국 미국을 배신, 문호개방원칙을 폐기함으로써 미국세력을 아시아대륙으로부터 영원히 추방, 한국을 식민지화하고 말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김원모 역, '구한말 격동기비사: 알렌의 일기', 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p.8>


기회가 주어지면 '대한제국(大韓帝國) <Greater Korean Empire 1897-1910>.
1905년 전후 고종 황제의 주권회복을 위한 투혼(鬪魂)!!'을 별도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고종은 너무 진솔하신지라, 1905년 7월 29일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체결한 루즈벨트의 음흉한 계략도 모르신 채, 9월 19일에 그의 딸 일행이 방한하였을 때, 그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을사조약에 얽힌 빌 ㅡ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자세히보기>.


'을사조약 원본' ㅡ 규장각에 보관 중인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 당시 작성된 대한제국측 문서와 일본측 문서 원본. <자세히보기>.


그러나 막상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늑결(勒結)되자, 그제서야 속았다는 통곡으로 여러 채널을 이용하여 루즈벨트에게 읍소하였지만,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역사의 흐름들이었다. <호국스페셜 제1부> [어질지 않은 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오래 견디지 못한다] <자세히보기>.

    날씨가 맑고 달빛은 대낮같이 밝았다. 인적이 드문 거리는 너무나 조용하고 달빛에 비친 거리모습이 하도 아름다워서 나는 파니와 함께 달이 지기 전에 이 아름다운 서울거리를 산보하기 위해서 대문밖으로 나가 거닐었다.

    <김원모 역, '구한말 격동기비사: 알렌의 일기', 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p.29-30>


위 일기는 알렌이 한국에 도착하여(1884.9.22), 그 해 12월 5일에 기록한 일기이다. 그 날밤 달빛에 비친 서울거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아내 '파니'와 함께 산보하였다고 적고 있는데...이와 유사한 분위기가 SBS드라마 '제중원'(2010.5.3 방영)에서 나온다. 알렌은 제중원 의사 '황정'(黃正)에게 이렇게 술회한다:

    내가 처음 배를 타고 상해에서 조선으로 올 때, 그 때 배 멀미가 심해서 브롬화 소다수를 하루 세 번이나 먹었어요. 정말 오기 싫었지요. 그리고 조선에 도착해 남대문을 넘어오는데, 밤거리 달빛이 빛나는 조선 집들이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만 같았죠. 난 그 날 어렴풋이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느꼈던 것 같아요...인간은 누구라도 태어난 이유가 있고,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쓰여질 사명이 있는거죠...


'알렌의 일기'에는 이와 같은 알렌의 한국을 사랑하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그의 사랑은 '마치 비 온 후에 햇빛같이 위로를 안겨준다' (Love comforteth like sunshine after rain)...필자가 전에 인식하고 있었던 알렌 선교사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곧 '선교사' 혹은 '의사'로서 헌신하기 보다는 오히려 고종의 총애를 빌미로 해서 '사업가'(광산업)로서 한국에서 많은 이권을 챙겼다는 영문자료를 읽었던 것이다. 그것이 2009년의 일이었다. 그러다가 2010년 새해부터 방영하는 SBS드라마 '제중원'을 보는 과정에서...여러 다른 자료들을 섭렵하게 되었고...(지금도 계속 중이다)...특히 국력이 찬탈된 '올가미' 속에서도 굴하지 않은 많은 의병들 가운데...'제중원'의 양의(洋醫) '황정'이 드디어 의병대장으로 가담하여, 그들의 뒤를 돕는다는...실화에서도 '박서양'이 간도지방으로 가서 '독립투사'로서 활약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이 과정에서 '황정'에게 의병의 가담에 힘을 보태는 충언을 해준 장본인이 바로 알렌 공사인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한 가지 발견한 것은, 알렌 선교사(의사/공사)가 그 당시 세계지배의 산실이었던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는 '자료'나 '기사'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본 드라마가 대한제국의 이권 침탈에 앞장섰던 알렌을 지나치게 미화했다는 논란으로 시청률이 저조했다는데(자세히보기)...이는 마치 본과목(예/역사과목/한국근대사)을 다 배우지도 않고 시험예상문제들을 알려달라고 하는 '성급함'의 해악일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지난 날의 이 강토의 '침탈당함'을 어찌 일개 TV드라마에 의존하려 하는 것인지...시청률이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이 나라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젊은 세대들의 지대한 관심이 아쉬웠던 것은 아닐런지...?? 만일 알렌이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더라면,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주한미국공사관 '공사'(전권대신)을 해임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필자 나름의 '소견'(?)을 넌지시 전하면서...그리고 그 어느 한국 영화나 TV드라마에서도 언급되지 않은(아니 못하였던) '숨겨진' 이야기는 다음에 언급해야 될 것 같다...샬롬.


<Created/20100322> <Updated/201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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