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작곡/ 정재선 ㅡ 채보/ 루디아 안 ㅡ 편곡ㆍ연주/ 다니엘 정

 

[Dembo's Unforgettable  Essay ㅡ SamPaRam]
[삼파람 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3-1] 동양(東洋)의 삼국지(三國地)는 한국(桓國)이라

거짓말 하지 말라!! 언젠가는 다 들통이 난다!!
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만이 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글/ 정재선 목회자


Follow peace with all men, and holiness, without which no man shall see the Lord: (Hebrews 12:14, KJV)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하며, 거룩하여지도록 힘쓰라.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하리라.
(히브리서 12:14, KJV화중광야역)


역사학은 일종의 재판과 같은 것이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아는 진실이 있더라도, 그 진실을 입증할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심증만으로 그것을 '역사학적 사실'로 인정할 수 없다. 기록이나 유물로 입증되는 것만 '역사학적 사실'로 인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학적 사실'이란 '실제 있었던 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료에 의해 입증된 일'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에서는 '역사학적 사실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인정된다. 이는 재판에서 사건 당사자가 알고 있는 진실과 판사가 인정한 사실이 다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100년전 1910년 일제는 '강제병탄'이라고 하는 '한일병합'이라고 하는 민족 말살정책으로 한민족을 절망에 빠뜨렸지만, 그 절망 한복판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복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100년전 한국은 불결하고 질병이 많은 나라였다. 집 대문 옆에 퇴비를 만들려고 오물과 인분을 쌓아놓고 우물가에 시궁창이 있었다. 매독과 머리부스럼, 안질, 천연두가 성행하였다.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성들은 질병을 쫓아내기 위해 굿을 하였다. 알렌 박사의 증언이다:

    이러한 무당굿은 오랜 관습을 나타내고, 그 굿의 효력에 대한 신앙은 서민 계층에서는 아주 보편화되어 있으나, 그들의 고객(손님)은 단지 평민들만은 아니었다. (These Mootang represent a very ancient institution and belief in the efficacy of their methods is very general among the lower classes but their patrons are not all of the common people.)

    병자로부터 병마(病魔)를 몰아냄은 별도로, 이 무녀들은 한 사람이 물에 빠져 죽은 그 우물을 깨끗케해야 한다는데도 불려왔다. 이 경우에 무당은 물에 빠져죽은 자에게서 혼령이 떠나가도록 유도한다. (Aside from driving away the spirit of disease from an afflicted person, these women are also called in to purify a well in which a person had been drowned, in which case she induces the spirit of the drowned person to leave.) <The Korean Repository, Vol.III, March 1896, p.69-71>.


다음은 노블(Mattie Wilcox Noble) 여선교사의 증언이다:

    [1899.5.28. 무서운 천연두] 천연두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나는 이렇게 많은 병자들의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천연두. 홍역과 열병들. 매일 새로운 환자들의 소식을 듣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어제 아침과 저녁 우리 그리스도교 선교사 아이들을 장사지냈다. 나는 우리 집에 오는 방문객들이 두렵다. 앨든은 이제 막 접종을 마친 상태다. 그 때문에 아이는 약간 아프고 온몸에 발진이 돋았다. <'노블일지 1892-1934', 2010, p.109>.

    [May 28th, '89] The smallpox is just raging here. I neve heard of so much sickness. Smallpox measles and fevers. Every day we hear of new cases & there are many deaths. Two funerals of our Christian children, one yesterday morning & another in the evening. I am fearful of any visitors coming to our place. Baby Alden isabout over his vaccination. it made him a little sick & gave him aneruption all over his body. <The Journals Of Mattie Wilcok Noble 1892-1934, 2003, p.77>.


하지만 사회개혁의 원동력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교회'는 가정윤리를 세우고 여성의 사회적 신분을 보장하는 가치를 전파하였다. 그러면서 '주초(술담배)금지운동'을 벌이고 우상과 미신을 타파하였다. 학교와 병원을 세웠으며, 고아를 구제하고 노비와 백정을 해방시키는 이념을 전파하였다.

개화기 때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한마디로 '메신저'였다. 그들은 한국에 그리스도교 뿐 아니라 서양의 문화와 문명, 사상과 윤리까지 함께 전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역할도 다양하였다. 목회자이면서 교사나 의사였고, 때로는 국왕이나 대신의 정치적 자문을 맡았으며 외교관 노릇도 하였다. 유망한 청년들을 지도하거나 해외로 유학시킨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어떤 이는 무역이나 상업에 손을 대거나 이권에 끼어들기도 하였으며, 알렌 박사처럼 의료 선교사에서 외교관으로 바뀐 사람도 있다. 그러나 알렌의 경우, 선교사역에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님을 밝혀두고자 한다.

따라서 선교사는 그리스도인 교사 뿐만 아니라 개화기 한국의 정치사, 경제사, 외교사, 나아가 교육사, 의료사에까지 두루 얽혀 있는 복잡하면서도 중요한 존재다. 이에 관한 부정적이고 긍적적인 '상반된 평가'는 필자의 주제에 적합한 경우에 조금씩 인용하게 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역사학'이란 일종의 재판과 같은 것이기에, 섣불리 판단하여 평가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도 결국에는 대해(大海)라고 하는 종착지가 있듯이, 흘러 온 역사에도 분명 그 종착지가 있으니, 그것은 오로지 창조자 하나님이 계획하신 '카이로스 역사 시간' 속에서 진행된 것이요, 종국에는 '텔로스 완성의 시간' 속으로 합류될 때, 인류구속의 대파노라마인 '크로노스 시간'은 열리게 되어 있으니, 그 때가 머지 않았음을 성경을 읽고 상고하는 '성도들'은 이미 깨닫았을 것이다!! <2010.5.9>.

한편, 조선말 개항 이래 전개된 보건의료와 의학의 상황은 어떠하였던가? 얼핏 보아도 알렌(Horace N. Allen), 헤론(John Heron), 애비슨(Oliver R. Avison) 등 선교의사의 활동이 눈에 띄고, 마츠마에(松前讓/부산소재 제생의원장/지석영에게 우두법 전수), 다나카(田中) 등 일본인 의사의 이름과, 제생의원(濟生醫院), 생생의원(生生醫院), 인천의원(仁川醫院), 한성병원(漢城病院) 등 일본인이 세운 병원들도 보이고, 지석영(池錫永)과 같은 우리나라 사람과 제중원(濟衆院), 내부병원(內部病院/1899년 지석영의 제안으로 세워진 한의술을 기반으로 한 관립의학교. 1900년 광제원(廣濟院)으로 개칭) 등 조선정부가 세운 병원들도 낯설지 않다. 근대보건의료라는 서양문물을 둘러싸고 서양선교회, 일본 군부와 거류민, 한국정부 등의 활동이 서로 복잡하게 엉켜있는 모습은 이 시기 보건의료에 대한 해석이 그리 만만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게다가 한의학과 그에 바탕한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등의 제도를 고려할 때 그 복잡성은 더욱 심화된다. ①<奇昌德, '朝鮮時代末의 急慢性傳染病과 醫療機關: 3.痘瘡과 種痘司', 醫史學 제4권 제2호(통권 제7호) 1995, 101-111. 참조>. ②<신동원·황상익, '조선말기(1876- 1910) 근대보건의료체제의 형성과정과 그 의미', 醫史學, 제5권 제2호(통권 제9호), 1996, p.155-167. 참조>. <2010.5.12>

필자가 살펴본 바로는, 의료계 역시 선교계 처럼 복잡 다단하게 얽혀 있음을 간파하게 되었다. 본 글에서는 오늘의 한국의 서양의술의 터를 개척한 알렌 선교의사의 공과를 논함이 아니요, 일부에서 공격해온 그 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사업 브로커 등)에 관하여 논함도 아니다. 다만, 필자는 구한말 시대에 이 땅의 한국인들이 치유받을 수 없는 '질고와 병'을 고쳐주는데 그의 젊은 몸을 바쳤다는 그 점에 포커스를 두고자 하는 것이다. 왜 인간인데 허물이 없겠는가? 만일 그가 한국에서 의료선교를 접어두고, 오로지 외교관으로 전업하여 미국과 자신의 이권에만 전념하여서 '치부'하였다면, 그는 미국 본국에다 '비밀리에'(?) 거대한 재산을 축적해 두었고, 그것을 '후손에게 물려주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 보았다. 그런데 오늘에 나타난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의 손주 며느리가 생활고에 시달려 증조부 알렌 박사의 유품들을 1994년에 가와시마 교수(2년전 이미 시망)에게 넘겼다'는 소식을 접한 한국인이 있었다. 그가 바로 HB그룹의 'M' 회장이다. 그가 그것을 입수하였고, 지난 4월 9일 세브란스병원 개원 125주년 기념식날 기증하였던 것이다. <자세히보기>. 이러한 일은 엄밀히 말하면,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대사(大事)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필독관련자료/알렌 박사 유품, 105년 만에 한국 왔다/자세히보기>.

[호러스 알렌 ㅡ HORACE N. ALLEN] (1858-1932)

젊은 26세에 1884년 9월 20일 가을 제물포에 도착, 한국에 입국하여 47세에 한국을 떠날 때까지 호러스 알렌이 한국에 머문 기간은 20년 6개월!! 그 가운데 4년 정도는 선교사로, 의사로, 공사로 혹은 대사 등 외교관으로서 분주히 그리고  눈부시게 활동하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한국을 향해 일본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가 겨루고 있는 정치적 압력을 교묘히 헤치면서 한미간의 국교를 두텁게하는데 공헌하였으며, 또한 미국교회로 하여금 선교의 길을 이 땅에서 펴게하여 한국 선교의 출발을 여는데 큰 공헌을 세운 인물이다...그는 한국에 관해, 'Things Korean'(1908), 'Korean Tales'(1889) , 'A Chronological Index'(1901), 'Supplement'(1903), Korean facts And Fancy', 'Korean-American Relations'과 같은 책과 논문을 남겼다.

'나는 오늘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一郞/Takezoe Shinichiro)와 일본공사관 의사를 방문하였다. 일본공사관 건물은 서양식 설계로 건축된 훌륭한 건물로서, 이곳에 비치된 가구 집기류도 서구식이었다. '내 나라 그대의 것'(My country, 'tis of thee)이란 찬송가를 부르며 예배를 집전하였다.' <1884.11.27(木) 추수감사절. 김원모 역, '구한말 격동기비사', 알렌의 일기, 서울: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p.29>


[찬송가미니해설 ㅡ '내 나라 그대의 것'] '…나를 보내사…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전파하며' (이사야 61:1)

1832년 어느 추운 겨울날 사무엘 프랜시스 스미스(Samuel Francis Smith)라는 젊은 신학생이 매사추세츠 주 앤도버의 앤도버신힉교 기숙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보내준, 유명한 찬미가 작사 작곡자 로웰 마손의 어린이용 독일 노래 묶음을 살펴보며 감상하고 있었다. 해지는 서녘엔 온 수평선이 자줏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침대에 편안히 누웠다. 공부에 시달린 날들이 그를 지치게 하였다. 친구가 보내 준 음악으로 아주 평온한 순간을 보내며 푹 쉬려는 참이었다. 차례차례 곡조를 따라 허밍하고 있을 때 그 중 한 가락이 주의를 끌었다. 그는 몇 번이고 허밍해 보았다. 그 페이지 아래 있는 단어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독일어 실력으로는 그 말들이 애국적이라는 것밖에 그에게 별 호소력이 없었다. 불후의 음악인데도 영감이 들어오지 않았다.

사무엘은 직접 자기 말로 써 보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종이를 찾아 쓰기 시작하였다. 그 종이 위에, 대학생의 초라한 방에서 수백만을 감동시킨 노래가 탄생하였다. 단어들이 청산유수처럼 쏟아졌다. 사무엘의 펜이 그의 마음을 묶어놓기엔 역부족이었다. 그가 작사할 때 그를 인도한 어떤 신령한 손이 해낸 것 같았다.


'내 나라, 그대의 것, My country, 'tis of thee,
달콤한 자유의 땅, Sweet land of liberty,
그대를 노래하노라. Of thee I sing.
아버지가 돌아가신 땅! Land where my fathers died!
순례자의 가슴서린 땅! Land of the Pilgrim's pride!
산에서 산으로 From every mountainside,
자유의 종을 울리자! Let freedom ring!'


어디 누구든 사람들의 가슴 속엔 자유에 대한 깊은 열망이 있다. 전체주의의 끈에 묶인 그들은 '달콤한 자유의 땅'과 같은 노래를 갈망한다. 또 다른 종류의 폭정이 있다. 그것은 그의 매혹적인 유혹에 굴하는 모든 이들을 지배하는 마귀의 포악한 정신이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며, 영원한 진리를 표출한다:
'너희 자신들을 종들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너희가 순종하는 자에게 그의 종이 되어, 죄의 종으로 죽음을 향하든지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를 향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Know ye not, that to whom ye yield yourselves servants to obey, his servants ye are to whom ye obey; whether of sin unto death, or of obedience unto righteousness?) (로마서 6:16).

사탄은 우리를 속박한다. 우리가 죄에 굴할 때, 죄는 우리를 지배한다. 우리를 속박한다. 우리를 찾아낸다. 우리의 영혼을 감금한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실 수 있다. 골고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울부짖으실 때, 그 분은 죄의 결박을 넘어 승리를 선언하셨다. 골고타산 위에서 그 분이 외치셨다: '자유의 종이여 울려라.' 예수님 안에 진정한 자유가 있다. 예수님 안에 참된 해방이 있다. 그 분 때문에 우리를 묶는 사슬이 풀렸고,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워졌다.


[용어상의 표기 일러두기] 근세 한국사를 읽는 중에 용어표기상의 혼란이 가중됨을 발견하였다. 마침 '서양인의 조선살이' 책을 구입, 읽는 중에 적합한 일러두기가 있기에 이를 소개한다:

1. 1945년 이전 시대를 언급하는 데 관습적으로 사용하던 '조선', '조선인'이란 단어를 '한국', '한국인'으로 바꾸어 쓴다.

2. '조선'이란 단어는 조선왕조, 조선시대 등과 같이 국호, 단체명와 같은 고유명사에 제한하여 사용한다.

3. 서을이란 명칭에 대해서는 1910년 이전에는 '한성부', 1910-1945년에는 '경성'이 공식 명치이었지만, '서울'로 통칭한다.

4. 중국이란 명칭에 대해서는 1911년 이전에는 '청'이 공식 호칭이지만 국호, 단체명와 같은 고유명사에 제한하여 사용하며, 그 외에는 '중국'으로 통칭한다.

5. '구한말'이란 단어는 대한제국이 수립된 1897년 이후부터 1910년 한일병합까지의 기간을 칭하지만, '조선시대 후기'도 포함하는 기간으로 사용한다.

그리고 근세 한국사의 주역들의 호칭이다. 이는 아들 '다니엘 정'의 제언임을 일러둔다:

1. 고종 황제는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로 바꾸어 쓴다.

2. 민 왕비는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로 바꾸어 쓴다.

3. 순종 황제는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로 바꾸어 쓴다.

4. 대원군은 '흥선대원왕'(興善大元王)으로 바꾸어 쓴다.



대한제국(大韓帝國) 1897-1910 [주요자료번역/ 샤리아 정]
1905년 전후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의 주권회복을 위한 투혼(鬪魂)!!

[고종태황제의 재발견]
작지만 큰 나라 '대한제국'은
'大韓帝國'이 아니라 '國'으로 표기했어야


해링턴(Fred Harvey Harrington)의 '개화기의 한미관계'가 떠오른다. 원제는 '하나님, 재신(財神) 그리고 일본인(God, Mammon and the Japanese)'이며, '알렌 박사와 한미관계, 1884-1905'란 부제가 붙어 있다. 한국근대사 연구자들 사이에 이미 고전이 되어버린 이 책은 이 땅에 온 최초의 그리스도교 의료선교사 알렌의 전기다.
<F.H. Harrington . God Mammon and the Japanese.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44>. 번역서도 있다: <李光麟 옮김, '開化期의 韓美關係- 알렌 博士의 活動을 中心으로', 일조각, 1973>.

 

◆대한제국의 고종태황제(1852-1919). 고종의 성격: '친절하고 상냥하며 자비롭다' <Korean Repository, Vol.3, No.11, October 1896>

 

◆젊음을 한국독립고취에 바친 미국 의료선교사 알렌(1858-1932) <Fred Harvey Harrington, God, Mammon And The Japanese,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44, p.3>


알렌 박사가 활동하던 그 시대는 한국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격동기였음은 공인된 사관이다.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달라지던 그러한 격변의 물결이 밀려들어오던 시기였다. 이 시대를 전문가들은 서구의 세력의 확장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였다고 단언해 버리는 글들을 읽어도 보았다.

'대한제국'(the Great Han Empire/大韓帝國=민족사관의 관점에서 '大桓帝國'이라 정했어야 한다고 판단됨)의 '광무황제'(Emperor Gwangmu/光武帝/종종 高宗皇帝라 칭하는데, 정식 호칭은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임)는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외교적인 접근 방법을모색하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일본 군사침략으로부터 보호하려 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제대로 인정되지 못한 것은, 광무 황제의 불운한 운명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때문이었다. 하나의 극단적인 평가는 미국 역사학자인 타일러 데넷(Tyler Dennett)의 관점으로서 한국을 배반한 것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아니라, 가장 추악한 속셈을가졌던 한국의 황제였으며, 그는 기질과 능력도 없이 20세기의 황제의 역활을 시도하려 하였다고 주제 넘게 주장한 내용이다. 그리고 데넷은 알렌 박사를 '한국인을 멸시한 인종주의자'<자세히보기>로 몰아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는 반대로, 많은 역사학자들은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을 비난하며, 그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과 미국 간에 1882년 5월 체결된 외교조약(조미수호조약)에서 당시 성장하고 있던 대한제국을 배반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넷은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를 비난하며 그러한 역사적 관점은 정당화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데넷은 고종태황제를 풍자했고, 나아가 자신의 제국을 팔아버린 배역자로 먹칠을 하였다. 이 점에 있어, 데넷의 주장이 유효성이 있는 것인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사실적 근거를 정확히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1882년 조약에 따르면, 다른 강대국들이 (일본과 러시아를 의미함) 서로의 정부의 주권을 침해하면, 나머지 다른 강대국이 자신의 정권을 활용하여 우호적인 조약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나와 있다. 이는 소위 '우호적 중재'(Good Offices) 조약으로, 외교 역사학에서는 논란의 이슈이다. 이 '우호적 중재' 조약의 의무를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 일치가 거의 없다.

아래와 같이 밝혀졌듯이, 한국의 황제는 이 조약을 문자 그대로 따랐고, 반대로 그의 상대방인 미국의 루즈벨트는 이 조약을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다. 그 결과, 일본이 대한제국을 흡수하는 것을 도와 준 것이다.

1906년 6월, 한국의 황제는 그의 친서를 조약에 가입된 9개 강대국에 보내, 그 강제 보호조약이 무효화 되었다고 국제사회에 선포하였다. 그는 그 조약에 대해 '강제'(forced)라는 단어를 선택하였으며, 국제법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양심을 갖고 있었고, 이를 통해 처음부터 불법적인 측면이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그는 또한 국제사법재판소(International Tribunal Court)에 이 사건을 상정하여, 한국 주권을 침해한 일본을 처벌할 의향을 표출하였다:

      대한제국 황제는 삼가 절하며 대러시아 대황제 폐하에게 글월을 올립니다.

      귀국과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지나오며 여러 차례 두터운 우의를 입은바, 지금 우리나라가 어려운 때를 당하고 있어서 모름지기 정의로운 우의로써 우리를 돌보아 주리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일본이 우리나라에게 불의를 자행하여 서기 1905년 11월 18일 강제로 늑약을 맺었습니다. 그 일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세 가지 증거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 정부 대신이 조인하였다고 운운하는 것은 진실로 정당한 것이 아니며, 위협을 받아 강제로 이루어진 것이며,
      둘째, 짐은 정부에 조인을 허가한 적이 없으며,
      셋째, 정부회의 운운하나 국법에 의거하지 않고 회의를 한 것미며, 일본인들이 대신을 강제로 가둔 채 회의한 것입니다.

      상황이 그런즉 조약이 성립되었다고 일컫는 것은 공법을 위배한 것이므로 의당 무효입니다. 짐이 우러러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결단코 응낙하지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이번의 불법 조약으로 국체가 손상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장차 어떤 나라가 짐이 이 조약을 응낙 운운하였다고 주장하는 일이 혹시 있더라도, 원컨대 폐하께서는 믿지도 듣지도 말고 그것이 근거 없는 일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짐은, 당당한 독립국이 이와 같은 불의스러운 일로써 국체가 손상당하였으므로, 원컨대 폐하께서는 즉시 공사관을 이전처럼 우리나라에 다시 설치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니면, 우리나라가 앞으로 이 사건을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공판소(현재의 국제사법재판소)에 공판을 부치려 할 때에 공사관을 우리나라에 설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독립을 보존할 수 있도록 특별히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는 진실로 공법상 당연히 옳은 일이 될 것입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각별한 관심을 쏟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일의 상세한 내용은 짐의 특별위원인 헐버트 씨에게 하문하시면 남김 없이 밝혀둘 것이며, 옥새를 찍어 보증합니다.
      귀 폐하의 황실과 신민이 영원히 하늘의 도우심을 받기를 엄숙히 축원하며, 아울러 성체 편안하심을 희구합니다.

      대한개국 515년 6월 22일
      1906년 6월 22일
      한성에서 이회(고종태황제의 이름) 삼가올림
      어새찍음



황제의 이 편지들은 1993년 김용중의 논문에서 처음으로 밝혀졌다. 중국어와 영어로 쓰여진 이 편지의 말미에는 황제의 이름이 그의 황제 봉인과 함께 적혀있었다. 황제의 특사인 호머 헐버트 박사가 9개의 편지를 수 년간 가지고 있다가, 그 후 재미조선사정사(Korean Affairs Institute in America) 의장에게 넘겨져, 김용중 박사가 소장하게 되었다. 1975년 김 박사의 죽음 이후, 김 박사의 아내인 메리 김(Mary Kim)이 1989년 컬럼비아대학교에 기증하기 전까지 갖고 있었다. 이것은 김기석 교수가 미국 컬럼비아대 도서관에 소장된 '한국교육사고소장'(韓國敎育史庫所藏)에서 찾아 낸 것이다. 황제가 영국 왕에게 보낸 편지의 원본과 나머지 편지들의 사본은 '서울대학교 한국교육기록 보관소'(KEA)에 전달되어 보존되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언제 고종태황제가 이 편지들을 외국의 열강들에게 은밀히 보낼 수 있었는지 등과 같은 자세한 배경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연구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그러한 자세한 내용은 황제가 보낸 편지들과 함께 발견된 헐버트 박사의 미발간 회고록 '동양의 메아리:극동에서의 삶의 회고'(Echoes of the Orient: A Memoir of Life in the Far East)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사'(History of Japanese Invasion in East Asia)에는 나와 있지 않다. 헐버트 박사는 1906년 4월 대한제국의 수도에 도착하자 마자 그 편지들을 받았다고 훗날 증언하였다.

황제의 편지 사건은 무작위적인 것도 하나의 개별적인 사건도 아니다. 오히려 광무황제(Emperor Gwangmu)의 치밀하게 짜여진 계획의 일부로서, 황제의 편지를 포함하여 다양한 종류의 편지와 문서들을 외국에 보내기 시작한 1905년 이전부터 착수한 것이다. 이는 한국의 주권을 절대적인 일본으로 부터 보호하려는 수단이었다. 고종태황제는 1904년 초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 바로 직전 부터, 1907년 강제로 퇴위되고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어 황제라는 실질 권한은 없는 명목상의 직위를 받을 때 까지의 격변의 시기 동안 군주제를 지키기 위해 절박한 노력을 기울였다. 고종태황제의 외교적인 움직임은 그 시기 동안에 걸쳐 너무나 정교하였으며, 내용상에서나 형식상에서 축적된 경험을 보였다. 그 결과, 문서의 내용에 있어서는 국제법에 관해 실제적으로 그 어떤 결함도 찾아 볼 수 없다. 특히, 1904년 이후 3년 동안 고종태황제의 외교 방법은 다음의 형식으로 진행 되었다: ①일본의 침략에 대한 선제 조치, ②강제 조약의 무효 선포, ③공개적으로 맹렬히 비난.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운동의 기폭제로서 순국한 민영환(閔泳煥/1861.7. 25-1905.11.30)과 그의 장례식이다. (사진공개/미국 코넬대학교도서관 제공). [미니해설] 민영환(민충공)은 흥선대원왕(대원군)의 처남이요, 내부대신, 학부대신, 외부대신, 참정대신 등을 역임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로 인해 민영환은 일제 및 친일 각료들의 배척을 받아 한직인 시종무관장으로 밀려나고,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각료들을 총칼로 협박하여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제 체결함으로써 국권을 강탈하였다. 비분강개(悲憤慷慨/슬프고 분하여 의분이 북받침)하여 통곡하지 않을 수 없던 민영환은 곧 서울로 올라와,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趙秉世)와 함께 11월 27일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어전에 나가 '을사늑약'에 서명한 이완용 등 5적을 처형하고 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와 위협아래 놓인 광무황제는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히려 일제는 헌병을 출동시켜 백관들을 해산시키고 민영환과 조병세를 잡아가뒀다. 평리원 감옥에 갇혀 있다가 11월 29일 저녁에 석방된 민영환은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바로잡을 길이 없음을 개탄하였다. 이제 남은 길은 스스로 목숨을 끊어 황실의 은혜에 보답하고, 국민들을 깨우쳐 나라와 민족이 자유독립을 회복하는데 초석이 되는 것뿐임을 자각하고, 11월 30일 오전 6시경, 45세의 한창 나이에 자결, 순국하였다.

1905년 11월 27일, '을사늑약' 강제체결 후, 제복차람의 일본 관리들(전면 중앙 이토 통감)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사진공개/미국 코넬대학교도서관 제공). [미니해설] 위 사진 전면에서 민간복장을 하고 있는 자가 '이토 히로부미' 초대 통감이요, 바로 그 왼쪽 옆에는 1910년 '한일병탄조약'의 원흉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앉아 있다. 사진에서 보듯이 데라우치의 오른팔은 일본 반란전쟁인 '세이난전쟁'(西南戰爭) 최대 격적지인 '다바루'(田原坂) 전투에서 부상당하여 불구가 되어 버렸다. 이 자와 한국의 이완용과 함께 '한일병탄조약'을 체결하는 장면을 찍은 사진을 '저작권'으로 묶어놓는 그 저의가 무척이나 의심스럽고 분노가 끓는다!! '국치'를 당한 피해국으로서 당당하게 한민족이면 누구에게나 활용토록 '저작권'을 풀어야 할 것이다. 작은 것 하나 하나부터 풀어나갈 때, 큰 고리가 풀어지는 법이 아니런가...남산에 자리하였던 그 역사적 산증인의 장소인 조선통감 관저가 5.16혁명이후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그 자리를 헐어버리고 '중앙정보부'가 들어섰다는 역사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다시 한번 역사의 아이러니를 통감하였다. 그러고보니 <5공화국> 때 '한일협정' 비준으로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일제 36년간 수탈의 배상금이 겨우 5%만이 본인들에게 지급되었고, 나머지 95%는 정부가 써버렸다는 말에 충격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러니 '민나도로모데스'(모두가 도둑놈)이라는 말이 떠돌았나 보다 싶다. 그리고 2010년 들어서 어느 종교 단체에서는 그 자리를 '평화의 자리'로 바꾼다는 명목으로 기부금을 모금한다는 신문광고를 본적이 있는데...이러한 중차대한 대사는 개인 혹은 단체가 주관할 일이 아니잖는가!!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국방이란 무기와 병기를 갖추고 국경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국경없이 외부로부터 밀려들어오는 갖가지 '음모와 술계'를 막아낼 대책을 강구하는 것도 국방의 한면이라 판단된다. 오늘 알고 지내던 'M' 집사님을 만났다. 그분은 야채랑 먹거리를 아파트장에서 장사하신다. 올 겨울 기후가 좋지 않아서 올봄 배추 값이 5,000원할 정도로 비싼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대뜸 거짓말이라 대꾸하신다. 그리하여 경상도랑 전라도를 돌아보았는데...작년까지는 강가(국유지)에 기르던 채소들의 비닐하우스들이 '4대강개발'을 빌미로해서 갑자기 전부 갈아엎어버린 바람에, 야채 공급이 딸렸음을 현장 각지에서 직접 확인하였다고 하신다. 방송말 절대로 믿지 말라고 하신다. (2010.5.13)


[호머 헐버트 ㅡ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 ㅡ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여기서 고종태황제의 주권회복을 위한 투혼 과정에서 한 인물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가 바로 호머 헐버트((Homer B. Hulbert)요, 한글 표음은 '흘법'(訖法)이다. '紇法/轄甫'로도 표기한다.

다음은 헐버트 박사의 저서 'THE PASSING OF KOREA'(한글번역서명 '대한제국 멸망사')에 수록된 '헌사'이다. 이 책은 윌리암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의 'COREA: THE HERMIT NATION'(한글번역서명 '은자의 나라 한국')과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의 'COREA AND HER NEIGHBORS'(한글번역서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과 함께 조선 말기 3대 외국인 기록으로 꼽힌다.

 

◆헐버트(1863-1949)의 저서 'The Passing Of Korea'(대한제국 멸망사)의 '속표지'와 '헌사'(하단 번역 참조). (화중광야소장)


우선, '헌사'의 원문과 번역문을 소개한다:

    [원문] <Homer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New York: Doubleday, Page & Co., 1906>

    Dedicated

    TO HIS MAJESTY THE EMPEROR OF KOREA
    AS A TOKEN OF HIGH ESTEEM AND A PLEDGE OF
    UNWAVERING ALLEGIANCE, AT A TIME WHEN
    CALUMNY HAS DONE ITS WORST AND
    JUSTICE HAS SUFFERED AN ECLIPSE

    AND

    TO THE KOREAN PEOPLE
    WHO ARE NOW WITNESSING THE PASSING OF OLD KOREA
    TO GIVE PLACE TO A NEW, WHEN THE SPIRIT OF THE
    NATION, QUICKENED BY THE TOUCH OF FIRE,
    SHALL HAVE PROVED THAT THOUGH
    "SLEEP IS THE IMAGE OF DEATH"
    IT IS NOT DEATH ITSELF

    [한글번역문] <헐버트 지음/신복룡 역주, 대한제국멸망사,경기: 집문당, 2006>

    비방(誹謗)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正義)가 점차 사라지는 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변함없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精氣)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기상'(假像)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대한제국의 국민에게

    이 책을 드립니다.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에서 태어난 헐버트는 다트머스대학을 거쳐 1884년 유니온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무렵 조선 정부에서는 근대식 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고, 미국 국무성에 교사 파견을 요청하였다. 당시 국무성의 이튼(J. Eaton) 국장은 다트머스대학 동창인 헐버트의 부친에게 아들의 파견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헐버트는 초빙교사 벙커(D. A. Bunker/房巨), 길모어(G. W. Gilmore)/吉模)와 함께 1886년 내한하였다.

'육영공원'에서 그가 한 첫 사업은 학교의 전반적인 운영 규정인 '육영공원설학절목'(育英公院設學節目)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학생들이 세계지리에 관심을 보이자, 1891년에는 한글판 천문지리서인 '사민필지'(士民必知)를 발행하였다. 그 해 12월 정부의 육영공원 축소로 일시 귀국했던 그는 1893년 목회자 안수를 받고, 감리교 선교사 자격으로 다시 내한하였다. 그 때부터 헐버트 선교사는 북감리교 선교부에서 경영했던 삼문출판사 운영의 책임을 지고 문서선교에 전념하였다. 영문 한국학 연구지인 'The Korean Repository'(韓國留記)'The Korea Review'가 그의 손을 통해 출간되었다.

1890년대 중엽에 조선은 일본제국으로부터 위협을 겪게 되는데, 헐버트는 일제의 이러한 침탈행위를 목격하면서 조선의 국내 및 국제 정치,외교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조선의 자주권 회복운동에 헌신하기 시작한다. 1895년 을미사변(명성태황후 살해사건) 이후 헐버트는 고종태황제을 호위하고, 최측근 보필 역할 및 자문 역할을 하여 미국 등 서방 국가들과의 외교 및 대화 창구 역할을 해왔다. 헐버트는 고종태황제의 신뢰를 가장 많이 받은 외국인이었다.

그러던 중 1905년, 일본 제국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는데, 헐버트는 을사늑약의 불법성과 무효성을 알리려 하였으며, 조선의 자주독립을 주장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을사늑약의 무효성을 알리기 위해 고종태황제로부터 친서를 받아, 1905년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밀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며, 미국을 비롯한 열강국가들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1907년, 고종태황제의 밀서를 받아 비밀리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장에 비밀 특사 3명들을 파견하는데 크게 일조하기도 하였다.(헤이그 특사 파견을 위해 통감부의 감시속을 피해 사전 작업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로 인해 헐버트는 '제4의 특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일제의 방해로 헤이그 특사들은 회의장에 입장조차 못하였으며, 결국 실패로 끝나자 이것이 일본제국에 알려지게되었고, 이를 빌미로 일본제국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던 헐버트를 대한제국에서 추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버트는 서재필, 이승만 등의 미주 독립운동가들에게 적극 지원하여 그들의 활동에 힘을 보탰으며,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미국 각지를 돌면서 일본제국의 침략행위를 비난하였고, 한국의 자주독립성을 호소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일본제국이 패망하면서 한국은 해방되고, 1948년 대한민국 수립 후 1949년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국빈으로 초대를 받고 42년 만에 내한하였다. 내한 이후 1주일후에 헐버트는 병사하여 8월 11일에 최초의 외국인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였고, 오늘날 양화진(楊花津)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그는 죽기 전에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1950년 3월 1일에 대한민국정부에서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하였다. 베델과 함께 조선 말기 조선을 구하기 위해 활동한 대표적인 서양인으로 손꼽히며,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인 1위로 꼽히기도 한다.


다음은 헐버트가 기울어가고 있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기록한 그의 저서 'The Passing Of Korea'(한글번역서 ㅡ '대한제국멸망사')에서 <제35장 ㅡ 대한제국의 장래(The Future of Korea)>에서 인용한 것이다:

    만약 이 지구상에서 미국민의 적극적이고도 참다운 도움을 받을 만한 민족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아닌 한국이다. 미국은 한국과 국교를 맺은 최초의 서방 국가이며, 그 자리에서 체결된 조약에서 미국은 한국의 안전과 이익을 존중하겠노라고 약속하였다.

    (If there is any nation on earth that deserves the active and substantial aid of the American people that nation is Korea. We were the first Western power to conclude a treaty with her, and in making that treaty we guaranteed to keep a watchful eye upon her safety and interests.)

    그러나 한국민에게 환난이 닥쳐오고 그토록 되풀이하던 공언이 순수한 것이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맑은 우의가 절실하게 필요하게 된 무렵에, 미국은 그토록 약삭빠르게, 그토록 차갑게, 그토록 심한 멸시의 눈초리로 한국민의 가슴을 할퀴어 놓음으로써, 한국에 살고 있는 점잖은 미국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But when the times of difficulty approached and America's disinterested friendship was to be called upon, to prove the genuineness of its oft-repeated protestations, we deserted her with such celerity, such cold-heartedness and such a refinement of contempt that the blood of every decent American citizen in Korea boiled with indignation.)

    기울어가는 조국을 건질 길이 없게 되자, 충성심이 강하고 지적이며 애국적인 한국인들이 하나씩 하나씩 스스로 목숨을 끊는 동안에, 한국 주재 미국 공사 모건(E. V. Morgan)은 이 흉행의 장본인들에게 샴페인을 따르면서 축배를 들고 있었다. 다른 어느 동양 민족에서도 맛보지 못한 정중함과 배려로서 미국 시민을 아껴 준 한 제국이 쓰러져 가면서 단말마적인 괴로움을 삼키는 모습을 그토록 무심한 채로...

    (While the most royal, cultured and patriotic Koreans were committing suicide one after the other because they would not survive the death of their country, the American Minister was toasting the perpetrators of the outrage in bumpers of champagne; utterly callous to the death throes of an empire which had treated American citizens with a courtesy and consideration they had enjoyed in no other Oriental country.)

    우리 미국 시민들은 이제까지 우리 미국이 주장하던 여러 가지 원칙에 배치되는 그러한 행동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것을 한국민에게 납득시키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는가? 그 길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그 길은 다름이 아니라 한국민이 하나의 민족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토록 흔하게 쏟아져 나온 한국을 비방하는 성명들이 일시적으로 나마 수많은 미국인들이 선의를 무시한, 진의가 아닌 것이었음을 한국인들이 알도록 시간과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 길은 곧 한국인의 교육에 미국이 참여하는 것이다.

    (How can we, the American people, prove to the Koreans that we were not accessory to this act which was contradictory to the principles we have professed to hold? There is only one way, by helping them to the one thing that will enable them to hold together as a nation, and give them time and opportunity to prove the falsity of the libelous statements that have been so freely circulated, and which have temporarily alienated the goodwill of so many of our people. That one thing is education.)

    미국의 국민 중에는 한국을 위해 몸바침으로써 이 거대한 민족운동의 핵심이 되고 구심력이 될 교육기관을 설립하는 영광된 기회를 차지하고 싶은 독지가는 없는가? 교육에 투자된 자본이 더 크고, 더 확실하고, 더 유익한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곳으로서는 이 세상에서 한국 밖에는 없다는 말은 한국인의 마음씨를 가장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제시할 수 없는 의견인 것이다. <헐버트 지음 · 신복룡 역주, '대한제국멸망사', 경기: 집문당, 2006, p.>

    (Is there any man or body of men who will seize the opportunity to found in the city of Seoul an institution of learning which shall be the nucleus, the rallying-ground, of a great national movement? It is the opinion of those most conversant with the feeling of the Korean people that there is no other place in the world where money invested in education will bring larger, surer or more beneficent results.) <Homer B. Hulbert, The Passing of Korea, New York: Doubleday, Page & Co., 1906, p.464-465>


[호머 헐버트 ㅡ 한국 최초의 '아리랑' 채보자]

본 자료를 정리해가던 중, 필자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호머 헐버트 박사가 우리 '아리랑'을 서양악으로 옮긴 최초의 '채보자'였다는 것이다. 이에 관한 증거는 그가 1896년 발간한 영문잡지 'Korean Repository'(韓國留記)에 실려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그 잡지에서는 그 부분이 빠져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필자와 동문인 심한보(沈漢輔) 선생이 본 잡지를 리프린트(영인본)을 인쇄하는 과정에서 빠뜨려진 것 같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의 자료를 근거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인덱스에는 'Korean Vocal Music'(p.45)라고 나와 있는데...

[가사] '문경새재 박달나무는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

인생 한 몸 도라가면 움이 나나 싹시 나나 아라렁 아라렁 아라리오 아라렁 띄여라 노다가셰

만경창파 둥둥 떠 가는 배야 거기 좀 닻 주어라 말무러 보자 아라렁 아라렁 아라리오 아라렁 띄여라 노다가셰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오난 날이나 일러주오 아라렁 아라렁 아라리오 아라렁 띄여라 노다가셰'

◆'아리랑' 채보 당시의 헐버트 박사(1896).

위 노래는 고종태황제가 즐겼고, 헐버트 박사가 채보한 아리랑인 '아라렁'의 가사이다. 아리랑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혁명가 김산은 말한다: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오랫동안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애창됐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로시작되는 지금의 '아리랑'은 1926년 단성사에서 개봉된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의 주제가가 일반적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운규가 어린 시절 고향인 회령 지방에서 철도 인부들이 부르는 '아리랑'을 듣고 기억해뒀다가 훗날 영화 주제가로 재현시키면서 크게 유행, 오늘날까지 그 멜로디와 가사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본 주제 '아리랑'에 관한 주제는 후에 아들 '다니엘 정'이 심도있게 다루어 줄 것이다!!

헐버트 박사는 한글의 독창성, 과학성, 간편성을 발견하면서 한글에 대한 많은 논문을 발표하고 한글애용을 적극 주장하였다. 1903년에는 미국의 '스미스소니안박물관'(Smithsonian Institute) 학회지에 한글의 우수성을 기고하면서 한글이 대중의 의사소통의 매개체로서 영어보다 우수하다고 극찬하였다. 헐버트 박사는 한성사범학교 교장을 지내고, '대한역사' 등의 교과서를 집필하는 등 우리나라 교육 발전에 큰 획을 그었다. 그리고 헐버트 박사는 우리나라 문화 창달에도 크게 기여를 하였다. 구전으로만 내려오던 한국인의 혼인 '아리랑'을 오선지에 음계를 붙여 '최초의 아리랑 채보자'가 되었다. 한민족에 있어서 음식 중에서 쌀을 빼놓을 수 없듯이, 그는 아리랑을 한국사람에 의해서 언제나 그리고 어디서나 불러질 노래라고 하였다. 아리랑이 오늘날 같이 다양하게 발전하고, 세계적으로 알려진 데는 이토록 헐버트 박사의 최초의 채보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헐버트의 채보는 우리나라에서, 우리 음악을 서양 오선보로 채록한, 그래서 재현 가능한 기록으로 최초가 된다는 점에서 돋보인다.

한편, 고종태황제의 시의(侍醫)였던 호러스 알렌(Horace Newton Allen) 박사는 1908년에 발간한 'THINGS KOREAN'(조선견문기) 속에 수록한 악보 역시 9년 전에 헐버트가 발표한 채보곡과 일치하고 있다. 알렌은 이 책 <제6장> '그림과 같은 풍경들'(Picturesque Surroundings)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서쪽으로 향하면 높은 능선을 옆으로 낀 소나무와 참나무의 숲이 훤히 펼쳐지는데, 저녁이 되어 서산에 떨어지는 해가 비추는 그 아름다운 모습은 어느 곳을 가 보아도 그리 흔치 않다. 조선에서도 가장 천한 나무 장수 소년들이 두 세 마리의 나귀를 끌고 서울에서 땔감을 판 다음 돌아가는 길이면, 그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경치인 줄울 모른다고 할지라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흥얼거리게 될 것이다. 그의 노래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리고 이 노래는 눈에는 보이진 않지만, 나무 사이로 들려오는 그 소리는 매우 음악적이다. <N.H. 알렌 지음/신복룡 역주, '조선견문기', 서울: 집문당: 1999. p.55-56>

    (Towards the west extends a wide plain with quite a growth of pine and oak backed by a high ridge, over which in the evening the declining sun spreads a colouring of rare tints such as is seldom to be seen elsewhere.Even the commonest Korean pony boy as he conducts his train of two or three ponies through these picturesque glades on his return from packing fuel to the city, will break into song, though he may not realize that it is the quiet beauty of the scene that so affects him. His song is apt to begin, and very musical it is as heard, unseen, through the trees.)
    <Horace N. Allen, Things Korean, New York: Fleming H. Rivell Co., 1908, p.55-56>


    한편, 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 여사의 저명한 저서, 'KOREA AND HER NEIGHBORS'(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한국의 음악과 시가'를 소개하는 중에 헐버트 박사가 채보한 '아리랑'에 관하여 소개하고 있다:

    '한국의 창 음악의 두 번째 양식은 하치(Ha Chi), 즉 '대중음악'이다. 이 양식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곡은 782소절의 '아라렁'(A-ra-rung)이다. 음식에서 밥(쌀)을 빼 놓을 수 없는 것 같이, '아라렁'은 한국 사람들에게(어느 장소에서든 언제나 조금식 불린다는 점에서) 음악의 밥(쌀)에 해당된다. <쌀의 노래 '아리랑'/보충자료보기>. 한 음표당 한 두 번씩 목청을 떨어야 하는 이 곡조는 헐버트 씨에 의해서 오선지에 채보되었다. 헐버트 씨는 이것이 악보로 정리한 것으로는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고 했지만, 여기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 이인화 옮김,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 경기: 도서출판 살림, 2009, p.197>

    (The second style of Korean vocal music is the Ha CKi or popular. The most conspicuous song in this class is the A-ra-rung, of 782 verses. It is said that the A-ra-rung holds to the Korean in music the same place that rice does in his food all else being a mere appendage. The tune, but with the trills and quavers, of which there are one or two to each note, left out, is given here, though Mr. Hulbert, to whom I am greatly indebted, calls it "a very weak attempt to score it.") <Isabella B. Bishop, Korea And Her Neighbors, Fleming H. Revell Co., 1898, p.166>


[일본의 침략에 대한 선제 조치]

1904년 1월, 러일전쟁이 임박함에 따라 고종태황제는 특사를 중국의 '즈푸'(Chefoo/芝罘=옛지명은 '煙台')로 보내 외무장관의 이름으로 한국의 중립성을 선언하였다. 주요 강대국들은 한국의 중립성을 놓고 한국에 대한 지원을 인정하고 표현하였다. 이 선언은 한국을 구슬려 일본의 동맹으로 만들려던 일본의 야망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고종태황제의 시기 적절한 움직임에 놀라긴 했지만, 일본은 이 선언을 단순히 무시하고 2개 사단을 한반도에 보내 러시아와의 전쟁을 촉발하였다. 무력에 의한 협박 외교로 일본은 1904년 2월 23일 대한제국과 '한일의정서'(The Korea-Japan Protocol)를 체결하게되었다. 본 의정서 <제2조>에는,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할 것.'이라고 확실히 나와 있지만, 동시에 <제5조>에서는 일본군을 한반도에 주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러일전쟁 기간 동안, 일본은 노골적으로 대한제국을 장악하려는 야욕을 내비췄다. 1904년 겨울, 불안해진 광무황제(光武帝)는 특사 조민희(趙民熙)를 미국으로 보냈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회하여 워싱턴에 들러 한국의 주권을 보호협조 요청을 하였다. 워싱턴은 한국을 도울 것을 간접적으로 내비췄다. 몇 달 후, 1905년 3월,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李漢應)은 대영제국과 유사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 한국의 독립을 확실히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2달 후 그는 일본 침략에 대해 저항하기 위해 런던에서 자살하였다. 그는 대한제국의 고위 관리 중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려 했던 광무황제(光武帝)에 동참하여 자신의 목숨을 희생하였다. 이용익(李容翊) 전 대신의 조언을 받아들여 광무황제(光武帝)는 비밀리에 전 특사였던 파블로프(Pavlov)데시모(Dessimo) 장군으로 하여금 1905년 3월 상하이에서 러시아 황제에게 편지를 전달하게 하였다. 이에 대해 러시아 황제는 데시모 장군을 통해 고종태황제에게 확인 편지를 전달하였다.

비록 일본이 만주 일부 지역에서 군사 승리를 거두기는 했으나, 재정적인 부담으로 인해 전쟁을 계속 벌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일본은 러시아와 평화회담을 갖고 미국의 '거중조정'(居中調停/Good Offices)을 통해 전쟁을 끝내고자 하였다. 도움을 청하는 일본의 비밀요청에 응하며, 루즈벨트 대통령은 미국 동부의 작은 항구 도시인 포츠머스 군항에서 평화회담을 갖기로 자원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 행동은 외교에 있어 '거중조정'(居中調停/Good Offices)의 역활을 가장 잘보여주는 예이다. 양측의 동의로, 그는 깊이 관여했고 평화절차에 개입하며 스스로 국무장관의 역활을 하였다. 이 회담에 대한 소식을 듣고, 한국의 고종태황제는 성급히 대표단을 그 협상에 보내고 싶어하였다. 왜냐하면, 한국의 독립에 대한 운명이 그 회담 결과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민영환(閔泳煥)과 한규설(韓)의 주선으로 젊은 특사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에 보내어 졌다. 그러나 워싱턴은 회담에 참여하겠다는 한국의 요청을 그가 한국의 고종태황제를 대표할 충분한 자격이 없다는 구실로 거절하였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일본을 위해 아주 '거중조정(居中調停/Good Offices)의 역활을 아주 훌륭히 해 내었지만, 광무황제(光武皇帝)의 똑같은 요청에 대해서는 등을 돌렸다. 이것으로 루즈벨트 자신이 보이지 않는 배후 실세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었으며, 바로 그 실세가 '시온주의자들'이었으니, 이에 관하여 상세하게 밝히 드러날 그 날을 간구해본다!! (2010.8.24 보완하다).


[일본의 감시에 놓였던 대한제국의 외국 접촉망]

위 기사는 1905년 12월 4일, 헐버트 박사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려는 목적을 보도한 '뉴욕타임스' 기사이다.  헐버트 박사는 고종태황제의 밀명을 받고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전달하는 사명을 받았다. 그런데 미국무성은 의도적으로 대통령과의 면담을 지연시키는 등...아주 비인도적인 행위를 보였으니...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이 오히려 미국의 방해를 받았다고 하는 '캐롤 카메룬 쇼'(Carole Cameron Shaw) 여사의 증언이 필자의 가슴을 메이게 한다. 여사의 저서 'The Foreign Destruction Of Korean Independence'에는 보다 상세하게 기슬되어 있다. 조지 케넌(George Kennan), 라이먼 애봇(Lyman Abbot), 허버트 크롤리(Herbert Croly)와 하야시(Hayashi) 등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의 장애물을 바로 고종태황제의 '물욕'(금광, 벌목, 전답, 어업)으로 몰아세우는데 반하여, 쇼 여사는 루즈벨트 대통령이 J.P. 모건(J.P. Morgan)의 은행업자인 젊은 귀재 루트(Root)에게 국무성을 맡기는 등,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맴돌았다고 꼬집고 있다. 정치욕과 물욕 둘을 잡으려던 망상 속에서 세계를 '찌그러진 관점' 즉 '사시'(斜視)로 보았던 것이라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은 루즈벨트의 사시로부터 빗나가고 있었던 것이요, 그것도 모른채 고종 황제의 국운을 바로 세우려는 투혼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p.292 참조). [필독관련자료] <호국스페셜 제1부 ㅡ '이 새가 비록 날지 않지만...'/자세히보기>.

1905년 가을, 일본이 대한제국을 침략하는 것은 시간 문제에 불과하였다. 민영환 등 국제 정세에 밝은 대한제국의 충신들은 긴급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모임을 가졌다. 고종 황제에게 충신한 대신들은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어, 1882년에 맺은 '한미수호조약'의 <제1조>를 근거로 하여 미국 워싱톤에다 대한제국의 나약한 국권을 보호해주기를 바란다는 청원서를 보내도록 부탁하였다: '제3국이 한쪽 정부에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쪽 정부는 원만한 타결을 위해 주선을 한다'(제1조)

그렇지만 당시의 상황에서는 일반적인 외교채널을 통해서 그러한 보호를 요청하는 것은 불가능하였으니, 이는 서울에 주재하고 있는 주요 외국공사들이 1905년 '을사늑약' 이후로 일본의 감시와 통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비밀 외교접촉들만이 외부와의 접선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만일 대한제국의 고종태황제가 자기의 대신들에게 국서들을 전달토록 명을 내린 그 사실이 일본에게 알려지는 날이면, 그것은 대한의 대신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한 외국인 밀사를 파견히기로 결정을 보았던 것이다. 그 때는 이미 필립 재선(Phillip Jaisohn) 곧 서재필 박사와 전직 한미 전권대신 호러스 알렌(Horace Allen)이 미국에 가 있었던 지라, 대한제국 '육영공원'(育英公院)에서 가르치고 있던 미국인 교육가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박사를 한 밀사로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고종태황제는 헐버트 박사를 개인적으로 오랫 동안 알았다. 그는 한국 정부가 직접 초청하고 미국 정부가 추천한 대한제국의 초청인이었다. 그는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로 임명되었다. 구 조선정부는 근대 교육기관인 관립학교(Royal College)인 '육영공원'을 설립하고 미국 측에 교사를 초청하였다. 미국 공사 푸트(Foote)의 주선으로 국무성을 통하여 유니온신학교에서 벙커(Bunker), 길모어(Gilmore), 헐버트(Hulbert) 등 3인이 선발되어 1886년 5월 두 여성(앨러스, 길모어 부인)과 함께 미국 북장로회 교육 선교사로 1886년 7월 4일 내한하였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의 '사무라이들'(Gansters)에 의한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살해사건 이후, 헐버트 박사는 자원하여 다른 미국 선교사들과 함께 줄곧 고종태황제의 신변을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헐버트 박사는 고종태황제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정부는 국가의 위기 중에 그의 헌신을 치하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의 시호는 '효자원성정화합천홍공성덕명성태황후(孝慈元聖正化合天洪功誠德明成太皇后'이며, 이후부터 필자는 '민 왕비' 혹은 '민 황후'를 접어두고, '명성태황후'로 통일해서 부른다. 아직도 찾아지지 못한 명성황후의 실제 인물 사진 및 초상화. 격동의 세월 속에서 꿋꿋했던 조선 최초의 황비 명성태황후...외세의 침입으로 얼룩진 역사 속에서 명성태황후의 삶과 업적, 그리고 죽음에 얽힌 왜곡을 바로 잡았을 때, 비로서 잃어버렸던 명성태황후의 얼굴을 찾게되지 않을까? <화중광야 가족>은 이를 위해 계속 기도로서 간구중이다!! 지금 우리 강토는 온통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인조되고 조작된'(?) 대형 사고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천한함'이 폭침(爆沈)되던 3월 26일은 안중근 장군이 순국하신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저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저지른 이 치욕의 강탈 100주년이 되는 2010년에 들어와, 정중하게 진심으로 우리에게 '용서를 비는 것'(사죄/赦罪)이 아니라, 오히려 그 100년을 희석시키려고 갖가지 '잔꾀들'(?)을 동원시키고 있다. 이제는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기다리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언제일지는 모르나, 하나님의 간섭은 이미 착수되었으며, '삼파람'으로 저들의 '흉계'(?)가 백일천하에 드러나게 될 그 날도 머지 않았다는 느낌이 무시로 강하게 밀려오고 있다!! 그 속에서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의 '진짜' 어진(御眞)도 밝히 드러날 것이라 확신하게 된다. 1895년 10월 8일, 그 분이 살해당하신 그 날은 한민족(桓民族)의 울분이 승화되는 찬란한 1만년의 역사를 세워놓은 '대전환기'의 시발점이 되었음이 훗날의 역사가 입증한 것이다!!


여기서 잠시 방금 발표된 '브레이킹스토리'(Breaking Story)를 전한다. 2010년 5월 10일(월), 한일 지식인들이 '한일병합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방금 필자는 이같은 사실을 확인하였다. 양국 정부간의 공식 입장이 아니라 씁쓸한 마음이다. '한일병합조약'(韓日倂合條約/일본어: 日韓併合条約/にっかんへいごうじょうやく), 한일합방조약(韓日合邦条約), 한일합방늑약(韓日合邦勒約) 또는 경술국치(庚戌國恥)는 1910년 8월 22일에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合倂條約)이다. 국치 100주년을 100여일(정확하게 104일) 남겨둔 시점에서 발표되었다. 우리 보다는 일본의 반응이 어떻게 나올는지 경계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대표 지식인 109명은 5월 10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한일병합이 원천무효'라는 내용을 골자로 한 성명을 발표하였다. 일본 지식인 105명도 이날 도쿄 '일본교육회관'에서 같은 내용을 발표하였다. <과연 일본 정부는 한국 침탈을 둘러싼 문서들을 공개하겠는가? <화중광야 New World Disorder 20/ 자세히보기>


◆위 자료는 1910년 (융희 4년/ 메이지 43년) 8월 18일자 '뉴욕타임스' 기사이다. 일본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서울 주재 기자들에게 한국 강제병합에 대한 윤곽을 이미 설명을 마쳤으며, 한국 정부각료 대신들과 물밑 협상중이라는 기사이다. '은둔의 나라' 한국이 일본에게 병합되는 것은 시간 문제란다. 만일 고종태황제가 폐위되지 않았더라면, 이 상황에 까지 이르렀을까? 순종의 힘 만으로 이 '병탄음모'를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을 것이다. 진실로 이것이 '한민족'(桓民族)의 비극인 동시에 '한울가'(桓鬱歌)로다...


한편, 광무황제(光武皇帝)는 헐버트 박사를 밀사로 임명하였다. 에드윈 모건(Edwin V. Morgan) 공사의 도움으로, 그는 제국의 국서를 미국 우편행낭에 위임시켰고, 미국으로 떠났으며, 미국에 도착하면, 그것을 인수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가 훗날에 고백했듯이, 모건 공사로부터의 도움을 구한 것이 결과적으로 '하나의 실수'(a mistake)였던 것이다. 그 이유는, 모건 공사가 미리 미국무성에다 한 밀사의 파견을 보고한 것이다. 이 밀사와 그의 이무를 사전에 탐지한 워싱톤의 미국 외교원들은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반한(反韓/anti-Korea) 및 친일(親日/pro-Japan) 외교정책들에 만반의 준비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이 점점 군사력을 보강하면서, 고종태황제와 그의 신하들에게 외교협상의 이름으로 보호조약을 받아들이도록 강권할 것임이 분명해졌다. 황제와 그의 충신들이 일본의 무력시위와 위협에 강력하게 항거하니, 헐버트 박사는 급히 미국으로 건너가서 보호조약 사전에 워싱톤의 협력을 요청하려 한 것이었다. 가장 최악의 경우에는 워싱톤이 가능한 조인 절차를 연장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헐버트는 생각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헐버트 박사가 워싱톤에 도착하기 전에, 대한제국의 외무대신의 인장이 날치기당하여 문서 위에 찍혀 버렸으니, 이는 일본에 의한 임의적인 조작이었으며, 한일간의 '보호조약'이 강제로 조인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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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으로 입증된 100년전의 치욕의 '한일병탄조약' 조인의 현장이 저작권이란 굴레를 씌워 놓았다!! 일본 조선총독부가 찍은 사진이 누구의 저작권이란 말인가? 속히 저작권을 풀으라!!


그 당시 시어도어 루즈벨트의 아시아 외교정책은 극동지역 안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미국의 국익을 최대화시키려는 의도였던 것이다. 아울러 워싱톤은 한국과 필리핀 간의
'상쇄관계'(trade-off)를 통하여 일본과의 여하한의 군사적 마찰을 피하려는 의도였던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5년 7월 29일에, '태프트ㅡ가쓰라 밀약'(the Taft-Kasura Secret Memorandum)이 체결된 것이 아니던가!! 이 '밀약'에 관해서는 필자가 여러 차례 언급한 바, 한국은 일본의 손 안에, 필리핀은 미국의 손 안에 넘겨준다는 비밀조약이었다.

이 밀약은 일본에게는 한국에서 자유로운 손(지배)를, 미국은 필리핀에서 자유로운 손(지배)를 제공하였다. 2일 후인 7월 31일에 특사 태프트가 보낸 외교전문을 읽고 난 즉시, 시어도어 루즈벨트는 자신의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에서의 여름 캠프로부터 마닐라 안에 있는 태프트에게 보낸 회신에서
'Your conversation with Count Katsura absolutely correct in every respect. Wish you would state to Katsura that I confirm every word you have said...' (카쓰라 공(公)과 귀하(태프트)가 나눈 담화는 모든 점에서 절대적으로 정확합니다. 카쓰라 공에게 장관이 전한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확인하고 동의한다고 전해주시기 바랍니다.)'고 하여 태프트의 발언을 대통령 자신의 의견으로 인정하는 한편,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내용을 미국의 공식 견해로 재확인시켰다.

이 밀담 내용의 일부는 1905년 10월 일본 신문 '고쿠민'(國民) 지면을 통해 흘러나오기도 했으나,  회담의 전체 내용은 1924년 미국 외교사학자 타일러 데넷에 의해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대일 밀약'(Theodore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이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전문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었다.
[호국스페셜 제1부] <어질지 않은 자는 곤경에 처했을 때 오래 견디지 못한다/ 자세히보기>.

아울러 우리는 루즈벨트 외교방식의 특징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공적인 외교 채널보다 사적 채널을 중시한 이른바 '개인외교'(personal diplomacy) 방식을 선호했던 인물이다. 1905년 미국의 한국 외교에도 그 방식이 채택됐다. 태프트의 협상 임무에 있어 미국무성 관료들은 사실상 철저히 배제됐다. 어쩌면 루즈벨트 대통령은 한국 문제와 관련된 대일외교를 추진하는데 교묘하게 국무성을 배제했을 것이다. 국무성 관료들 일부가 가지고 있던 친(親)러시아적 정서를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국무성에는 그것에 관한 어떤 기록도 남아 있지 않으며, 루트(Root) 국무장관이나 주일공사 그리스콤(Lloyd C. Griscom) 까지도 뒷날까지그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두고 볼 때, 루즈벨트는 보이지 않는 세계지배의 배후세력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자였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인 것이다. '공개' 대신에 뒷구멍으로 '비밀'거래 방식이 영낙없는 '비밀결사'(Secret Society)의 수법 그대로 이기 때문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진실'을 전혀 알턱이 없었던 고종태황제의 몸무림이 있을 뿐이었다.
국호를 '조선'으로부터 '대한제국'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한민족의 역사를 더 깊이 파헤쳐 보면, '大韓'을 '大桓'으로 하정여 '大桓帝國'으로 불렀어야 옳지 않았나(?) 싶은 것이다. '桓'이 '韓'으로 축소되는 바람에, 한반도 위에 '고난의 역사'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리고 있음이니, 이에 관한 '역사적 진실'은 아들 '다니엘 정'이 <한울가 이야기>에서 이어 나갈 것이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경술국치 ㅡ 한일해저터널을 막아라!! 한 패거리이기 때문에 '지연 작전'으로 한민족은 우롱당하고 있으니...한반도 안에서 그 어떤 사태가 벌어져도 그 배후세력은 절대로 밝혀지지 않을터...지난 날의 '역사적 진실'이 그렇게 알려 주었고, 지금도 그러하고...앞으로도 그럴진대...그 누굴 믿을꼬...오로지 천지를 만드신 주 예호바 뿐이로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한미 양국관계에, 그리고 한국의 운명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승만의 전기작가로 잘 알려진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하단 사진)의 표현에 따르면, 그 밀약은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s death warrant)하는 행위였다. 한국의 국제 정치상 위상과 존립에 관해 미국과 일본의 고위층 사이에 합의된 의견이 교환되고 상호 확인됐다는 사실은, 미국 정부가 1882년의 '조미수호조약'에 명시된 '우호적 중재'(거중조정/Good Offices)라는 체약국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기로 이미 결정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미국이 1903년 친일 구도를 골격으로 하는 외교정책을 선택한 이후, 일본의 한국 문제 처리에 대해 보여준 행동 가운데 가장 명백한 의도를 담고 있는 행위가 '태프트-가쓰라 밀약'이다. 그런 사실은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마자,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최초의 국가가 미국이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태프트-가쓰라 밀약'의 내용을 외교적 실행으로 옮겼던 것이다.

<PacificUniversity>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1942년 워싱턴의 한 외교가 식당에서 처음 이승만 임시정부 의장을 만난 이후, 그의 실각에 이른 1960년까지 20여년 동안 한국 현대사의 전개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올리버는 2차 대전 당시 미육군성의 식량국 담당관의 직책을 가지고서 실제로는 홍보선전업무를 맡아 대국민홍보 전략을 주도하면서 실천에 옮긴 인물로서, 이승만과 그의 첫 만남 이후 올리버는 대한민국의 독립의 필요성과 미국의 동방외교 전략의 수정을 줄기차게 설파하였으며, 'The Korea Pacific Press'란 출판사를 설립하여 한국의 입장을 미국의 외교가와 미국 국민들에게 알리는 일에 앞장섰다.

이처럼 루즈벨트의 외교정책은 전적으로 '개인적으로 비밀리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미국의 외교가와 대중에게 그의 친일(親日) 및 반한(反韓) 입장의 변화를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소통의 통로가 막혀버린 것이다. 그리고 광무황제와 수 많은 그의 충신 관료들에게는 완전히 '왕따'(?)의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자기들의 국익을 보호한다는 미국과 일본의 두 세력의 제국적 야망이, 한국과 같이 작고 약한 국가들의 값비싼 희생을 날조한 '밀약'을 통해서 밝히 드러난 것이다. 1905년의 여름 이후,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외교관이었기 때문에, 극동에서의 외교정책을 수립하는데는 그의 관심사와 사상이 주요했음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강제 병탄은 무효임을 선언하다!!]

고종태황제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배반과 조약의 파기에 대해서는 모른 채, 1905년-1906년 겨울에 헐버트 박사를 파견하여 미국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실제적인 효력이 없었다. 데넷광무황제가 배역자라는 자신의 주장을 만드는 데 있어, '루트(Root/국무장관)이나 루즈벨트의 앞에 놓여 있는 사실들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논리에서 어떤 하나의 결점을 집어 내는 것이 정말로 어렵다'라는 사실을 인용하였다. 그러나 1993년에 떠오른 새로운 증거는 데넷의 주장과 일관되지 않는다. 정반대로, 루즈벨트 대통령이 한국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수 없이 많은 결점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미 국무부는 황제의 친서가 도착했던 것을 인정하였으며, 나아가 일본이 11월 17일 늦은 밤 강제조약을 맺기 전에 루즈벨트 대통령이 어떤 일을 하기를 광무황제가 원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11월 21일 주한공사 모건(Morgan)은 미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묘사하며, 그날 밤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보고하였다: '일본 최고 사령관(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후작(侯爵/Marquis) 이토 일본 수상과 직원들에 합류하였으며, 협상이 열렸던 그 건물은 일본 헌병대와 경찰이 둘러싸고 있었다. 내각의 의원들이 아무데도 얽매이지 않고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다고 볼 수 없었다.'

광무황제의 편지를 일부러 늦게 수령함으로써, 미 국무부는 한국 공사관이 아니라 일본 공사관에 의해 조약이 체결 되었다는 통지를 받을 때까지 1905년 11월 23일 즈음 워싱턴에서 헐버트 박사와 만나는 것을 거절하였다. 이틀 후, 미 국무장관은 헐버트 박사에게 미국은 1882년 조약에 근거하여 망해가는 제국에 '우호적 중재'(거중조정/Good Offices)를 빌려 줄 수 없다고 말하였다. 이 편지는 같은 날, 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씌여졌던 것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고종태황제의 친서를 '세세히 읽어 보았음'(read carefully)에도 불구하고 국무부에 한국에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것을 명령했던 것이다.

11월 말에, 광무황제
민영환(閔泳煥)의 사촌인 프랑스 대리공사였던 민영찬(閔泳瓚)에게 긴급히 미국으로 갈 것을 지시하였으며, 대한제국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워싱턴에서 외교적 조치를 강화하였다. 민영찬 대리공사는 루트 국무장관과의 회의를 요청하였다. 그 회의에서 루트는 민 공사가 '법적으로 자격이 없기'(legally entitled) 때문에 민 공사의 비공식적인 요청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절하였다. 헐버트 박사와 민 공사의 노력을 강화하기 위해 광무황제는 전보를 헐버트 박사에게 중국의 즈푸(Chefoo/芝罘=옛지명은 '煙台')를 통해 보내, '강제로 이루어진 조약이 전면 무효'임을 공표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전보가 미 정부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되게 하였다. 그 전보 메시지에서 고종태황제는 일본이 소위 '조약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더라도 그 조약은 일본군의 협박 하에 강제로 체결된 것이므로 무효임을 확실히 하였다. 고종태황제의 전보를 미 국무부에서는 12월 12일과 14일에 받았고, 국무부 차관도 그것을 읽었다. 전보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I declared that the so-called treaty of protectorate recently concluded between Corea and Japan was extorted at the point of the sword and under duress and therefore is null and void. I never consented to it and I never will. Transmit to American Government.

    The Emperor of Corea

    나는 한국과 일본 간에 최근 결론이 난, 피보호국의 소위 조약이라는 것이 칼날 끝과 협박 하에 왜곡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임을 선언하였다. 나는 절대 그에 동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미국 정부에 전송한다.

    한국의 황제


    구미위원부 (歐美委員部/Korean Commission To Europe And America) ㅡ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미외교업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미국 워싱턴에 설치한 외교담당기관이다. 다음은 본 구미위원회의 법률고문 '프레드 돌프'(Fred A. Dolph)가 1919년에 미국 하원 외무위원회에 제출한 한국관련 브리핑 자료이다. 1882년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의 한미관계와 '조일수호조약' 이후의 한일 관계, '을사늑약'(을사5조약) 이후 한국과 미국일본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일제의 강압적인 한국침탈, 경제수탈 과정 및 한국인의 정체성, 일본인과 비교되는 한국인의 우수성을 각 분야마다 예를 들어 설명하였다. 1919년 8월 18일에는 미주리 출신 스펜서(Spencer) 상원의원의 동의로, 대한제국의 고종태황제의 고문 헐버트 박사의 성명서를 외교위원회에 회부하고 속기록에 넣기로 하였다. 그리고 9월 19일에는 돌프의 '한국문제'(The Korean Question)이라는 성명서를 같은 방법으로 의회 속기록에 넣게 되었다.

    본 자료를 읽는 중에, 필자는 한 가지 놀라운 내용을 발견하였다:
    '일본의 야욕 추진에 반드시 필요한 일은 가장 높은 지위의 미국인이자 정정 당당히 겨루는 것을 진실로 용감히 믿었던  알렌 주한 미국 공사를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알렌 박사는 중국 전쟁 이후 왕위 찬탈을 시도하려 했던 때에도 한국에 있었습니다. 그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 알렌 박사는 제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이전 사건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건 씨가 지명되었습니다.' (It was necessary in furtherance of Japan's ambitions that Dr. Allen, the American minister to Korea, a man of the highest American type, a true and fearless believer in fair play, should be removed. He had been in Korea during the previous attempt at usurpation after the Chinese War. he knew too much. His removal was accomplished through some means, a Mr. Morgan was appointed to his place, a man wholly unfamiliar with previous happenings.) <Fred A. Dolph, 'The Korean Question', Congressional Record, (Sixty-Sixth Congress, First Session), September 19, 1919 , p.1> ㅡ 제66차 제1기 미의회록 (1919.9.19), p.1. (자료공개/미국 코넬대학교도서관 소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 대통령은 고종태황제의 절박한 전보 메시지를 무시해 버렸다. 루즈벨트는 태황제의 편지와 메시지에 대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2월 16일, 국무부는 외무대신 대행 이완용의 지시에 따라 워싱턴의 한국 공사관의 주인을 일본으로 바뀔 것임을 공식적으로 통보받았다.

3일 후, 국무부는 미국 정부가 더 이상 조약에 대해 '우호적 중재'(Good Offices)의 의무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와 있는 문서를 민영찬 공사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11월 24일, 강제 '조약'이 체결된 지 딱 일주일 후에, 국무부는 주한 미국 공사에게 철수할 것과, 고조태황제에게 공식적으로 통보하기 전임에도 한국에 파견된 모건 미 특사를 쿠바로 보낼 것을 명령하였다. 그 진술의 진실에 대해서는 광무황제와 상의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분명한 가운데 루즈벨트는 그 조약의 결론에 대한 일본의 주장이 유효하다고 인정하였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소위 그 조약을 '동아시아의 사실상 현실'로 만들었다. 이토가 소위 그 조약이 결론이 났다는 선전을 퍼뜨리고 난 지 일주일 만에, 미국 공사관이 철수하는 일이 발생했고, 한국에서 공사관을 철수하는 첫 번째 움직임을 보인 것은 바로 미국이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서양 강대국 가운데 상주하는 관료를 두고 한국에 공사관을 첫 번째 세운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 철수 당시에 한국의 외교 단체들은 미국의 사전에 미리 준비된 즉각적인 반응을 '난파선에서 달아나는 쥐떼'(runaway rats from a wreck)와 같다고 풍자하였다.

◆1903년 6월 23일자 '황성신문'에 실린 활동사진(영화) 광고.

본 조약은 일본의 협박의 강압 하에 불법적으로 체결된 것이었다. 미국 정부에 대한 모든 외교적 접근방법은 헛된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태황제는 '명망있는'(prestigious) 변호사들을 고용하여 상원 청문회에서 일본의 한국 주권 침탈에 대항하는 소송을 하려는 비밀임무를 조용히 시작하였다. 그 목적은 루즈벨트의 친일외교를 바꾸기 위함이었다. 1905년 11월 말, 고종태황제는 서울에서 '콜브란-보스트윅 개발회사'(Collbran And Bostwick Development Company)라고 알려진 미국 회사에 그의 가까운 측근 2명인 남 씨와 이근상을 보냄으로써 전 공사인 호러스 알렌(Horace Allen/1858-1932)에게 황제의 새로운 메시지를 보내려 하였던 것이다. 이 회사는 한국 '한성전기회사'(Seoul Electric Company)가 발주한 전차시설공사를 맡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비사(秘史) 한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903년 6월 하순부터, '콜브란-보스트윅 개발회사'는 미국이나 프랑스가 제작한 단편 영화들을 상영하였다. 영화관람 장소는 동대문 부근에 있던 '한성전기회사' 소유의  전차차고 겸 발전소 부지 안에 있던 빈터에 영화상영시설을 갖추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10전씩 받고서 유료상영을 시도하였다. 오른쪽 이미지는 그 당시의 신문광고이다: '동대문 내 전기회사 기계창고에서 보여주는 활동사진은 일요일과 비오는 날을 제외하고는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상영되는데, 조선과 구미 각국의 생명, 도시, 각종 극장의 뛰어난 풍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 입장료 구리돈 10전'. <자세히보기>. 이것이 오늘날 극장의 효시인 셈이다. 1903년 당시 유럽 전역에서는 두 편의 프랑스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다: ① 'Epopée napoléonienne' (Life of Napoleon/나폴레옹의 생애) (필림길이 430 미터/약20분), ② 'La Vie et la Passion de Jésus-Christ' (The Life and Passion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 (필림길이 1,425 미터/약60분). <자세히보기>.

◆1903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무성영화 ㅡ 'La Vie et la Passion de Jésus-Christ'(The Life and Passion of Jesus Christ/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에서 예수님이 위로 들림받으시는 장면이다. <이미지캡쳐/YouTube>.


한편, 같은 해에 미국에서는 아래와 같이 무성 서부영화 ③'The Great Train Robbery' (대열차강도)가 상영되었다. 위 두 편의 영화들이 한국에서 상연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본 영화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개봉된 외국영화로서 미국 서부영화의 효시라고 하는, 에드윈 포터가 만든 <11분 53초> 짜리 무성영화이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대사가 있어서 자막이나 더빙으로 처리하는게 아니라, 당시에는 영사기 옆에서 '변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분이 영화의 내용을 설명해주었다.
<자세히보기>. 이러한 광경은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1950년대에 있었던 진풍경이었다. 마침 필자의 집안 당숙께서 영화흥행업에 종사하신지라, 지금도 필자는 그 당시 보았던 무성영화 '논개'. '맹진사댁 경사,' '의자왕' 등이 기억이 난다.

◆1903년 미국에서 제작된 무성 서부영화 'The Great train Robbery' (대열차강도). 한국에서 최초로 상영된 외국영화였다. (러닝타임 11:53). <화중광야입수제공>


세계 최초의 영화는 1895년에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가 제작한 총 24초 짜리 '기차의 도착'이라고 전한다. 그리고 4년 후 1899년에 이미 한국에도 영화가 상영되었다고 전한다. 미국인 여행가 엘리아스 버튼 홈스(Elias Burton Holmes/1870-1958)가 고종태황제와 황실 인사들만을 상대로 상영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기록상 최초로 한국에 영화가 상영된 예이다. 그리고 한국이 자체로 영화를 제작하여 상영한 것은 1923년 1월 13일 서울 종로소재 극장 '단성사'(團成社/1907년 세워진 한국 최초 극장)에서 상영한 '국경'(國境/김도산 감독 작품으로 알려짐)이었다.
영화 줄거리는 한·일 남녀 간의 사랑이 주된 이야기다. 한국인 주인공 '봉이'(鳳伊)와 일본인 여대생 '테라오 에이'(寺尾 瑛) 두 사람의 무르녹는 로맨스의 가경(佳景)이어서 '국경'이라는 제목에 매우 걸맞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런데 한국인으로 등장하는 배우 '봉이'는 일본인 배우 '테라시카메오'(寺士龜尾)라는 인물이고, 일본 여대생으로 나오는 '테라오 에이'는 한국인 여배우 김신영(金愼令)이어서 퍽이나 오밀조밀하게 신경써서 만든 작품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영화는 단 하루만 상영되고 1월 15일에는 다른 영화로 대치되었다. <자세히보기>. 그러나 순수한 한국인으로 만드어진 최초의 개봉 영화는 역시 김도산(金陶山)이 감독한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를 꼽는다: '계모 슬하에서 불우하게 자라온 송산은 선친의 유산까지 탈취하려고 노리는 계모일파에게 온갖 박해와 고통을 받는다. 심지어 생명의 위험까지 느끼면서도 가문과 선친의 명예를 위해 은인자중하던 중, 송산은 마침내 의형제를 맺고 있던 죽산과 친구인 매초를 만난다. 그는 더러운 사회악을 뿌리뽑고 참다운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정의로 싸울 것을 그들로부터 권유받는다. 송산은 드디어 정의의 칼을 뽑아 계모일파의 무리들을 물리치고 가문의 평화를 찾는다.' <자세히보기>. 이 영화가 최초로 상영된 1919년 10월 27일을 기준 삼아 '영화의 날'이 제정된 것이라고 전한다. 김도산은 한국 최초의 영화인이었다. 영화의 발명자가 아니기에 한국의 '뤼미에르', 한국의 '에디슨'은 될 수 없었지만, 영화를 최초로 제작한 인물이기에 그 공로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잠시, 필자는 여기에서 글을 다른 방향으로 옮긴다. '레이몬드 크룸'(Raymond Krumm)과 그의 형 '윌리암 크룸'(William Krumm)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들 형제는 1896년 후반기 오하이오주 콜럼버스를 떠나 한국으로 왔다. 이들 형제는 이웃이자 당시 한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던 '데이비드 데슬러'(David Deshler)호러스 알렌으로부터 '은둔의 나라'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모험과 부(富)의 이야기를 들었다. 동연배의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크룸 형제도 집을 떠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험과 부를 찾고자 하였다. 당시 한국에는 서양의 많은 고급인력이 필요했고, 일부 미국인들은 기차와 전차를 부설할 수 있는 권한은 물론 대규모 금광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윌리암은 공학학위를 소지하고 있었으며, 레이몬드도 그 과정에 있었다. 따라서 이들 형제는 한국에서 많은 돈을 벌수 있다고 확신하고 떠난 것이다.

형 윌리암은 동생 레이몬드 보다 나이는 약간 위였고 머리가 좋았으며 사교성도 많았다. 그러나 동생 레이몬드는 사귀기 쉬운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성격이 급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며 복수심이 많았다. 거대한 체구를 지닌 그는 기술자로 체격이 단련되어 누군가가 건들면 쉽게 폭력을 쓰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미혼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레이몬드는 한국에서 사냥이나 운동시합을 하면서 여가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밤에는 노름도 하고 술에 만취해 간혹 평판이 나쁜 일본인들을 때려주기도 하였다.

당시 경인선을 운영하는 '콜브란-보스트윅개발회사'는 측량기사 레이몬드(한국명/ 巨廉)를 고용했고, 그는 주기술자인 칼리(W. T. Carley)를 도와 철로의 탐사와 건설을 도와주었다. 이 작업은 힘들고 위험한 일로 간혹 한국인 노동자들과 외국인 관리자들 사이에 사고도 나고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콜브란-보스트윅개발회사'에서 약 1년반 정도 일한 뒤 레이몬드는 칼리와 함께 회사에서 해고되었다. 아마도 당시 철로를 개설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고와 지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해고에 대해 레이몬드는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고 언젠가는 회사에 보복을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후 그는 미국으로 돌아가 워싱톤에서 이 회사의 불법 로비 활동을 의원들에게 고발하였다.

한편 레이몬드와 동향 출신이었던 알렌 박사는 데이비드 데슬러(David Deshler)의 요청에 따라 레이몬드를 한국정부에 기술자로 추천하였다. 당시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에서 근무하는 서양인들이 일반적으로 받는 급여수준이 월 50불에 불과한 반면, 레이몬드는 한국정부로부터 월 250불을 포함해 하인과 주택도 제공받아 상당히 높은 수준의 급료를 받을 수 있었다. <1898年(光武 2) 7月 14日 量地衙門에서 미국인 측량기사 巨廉(Raymond Krumm)을 한국 量地 首技師로 雇聘하기 위해 大韓量地衙門總裁官 沈相薰, 李道宰와 代辦 李采淵이 巨廉과 체결한 계약서 참조>. 돈을 벌면서 레이몬드는 한국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서양인들과 마찬가지로 부동산에 투기하였다. 부동산 투기는 일반적으로 서울 시내 궁궐 부근이나 한국인들이 민감하게 생각하는 지역의 토지를 비교적 저가로 구입해서, 이후 이 지역에 집을 지을 것이라고 위협해 한국정부가 전에 매각한 가격보다 휠씬 비싼 가격으로 부동산을 재구입하도록 강요하는 방법을 취하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묘한 사건이 있었다. 1899년 후반 알렌의 질녀 마벨 에베레스트(Mabel Everest)가 삼촌을 만나려고 서울에 왔다. 서울에 도착한 그 여자는 정동 서양인촌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다. 대부분의 미혼 남성은 그 여자와의 동반자가 되길 원하였다. 레이몬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서울에서 1년간 체류한 마벨이 서을을 떠나게 되자, 레이몬드가 그 여자에게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마벨이 자신의 청혼을 거절한 것은 무엇보다도 삼촌 알렌 때문이며, 알렌이 자기를 바보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알렌을 복수하겠다고 다짐하였다.

1903년 레이몬드는 한국정부와의 계약이 만료되었으며 더 이상 갱신되지 않을 것이라고 통보받았다. 이 때 한국정부의 한 관료였던 이용익(친러시아파)이 자신의 정적(政敵)이었던 레이몬드에게 서류 및 여행경비로 2천엔을 주면서, 만일 그가 알렌과 '콜브란-보스트윅개발회사'의 비리를 미 의회에 고발해준다면, 그와의 계약을 갱신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레이몬드는 이용익으로부터 이러한 조건을 수용하고는, 1904년 1월 유라시아 대륙과 대서양을 건너 1904년 1월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그는 워싱톤에서 체류하면 에드윈 모건(Edwin V. Morgan)을 만났고, 알렌과 '콜리반과 보스윅 개발회사'에 관해 제기된 여러 불만을 알려주었다. 모건은 이듬해 해임당한 알렌 공사의 후임으로 부임한 주한 미공사이다. 이 자가 바로 고종태황제가 밀사 헐버트 박사를 통해 자신의 밀서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되지 못하도록 방해했던 '방해꾼'이다.

1904년 3월 말, 레이몬드는 오하이오주 출신 두 명의 하원의원들에게
알렌과 '콜브란-보스트윅개발회사'의 비리를 조사해 줄 것을 요청하는 12페이지 규모의 청원서를 의회에 제출하였다. 청원서에는 알렌이 그의 직위를 이용해 한국정부를 압박해서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그의 친구들을 한국정부 내 요직에 근무할 수 있도록 부적절한 역할을 수행하였고, 이를 대가로 알렌은 많은 경제적인 이익을 얻었다는 등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레이몬드는 알렌을 '철저히 부패한 인물'이라고 요약하였다.

이에, 미의회는 조사를 실시하였고, 알렌이 결백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나아가 미의회는 레이몬드가 이 미국 공사를 계속 괴롭힌다면, 그를 검사하기 위해 즉각 정신병원 또는 요양소로 보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후부터 레이몬드는 알렌에 대해 더 이상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그리고 1905년 1월에 '러일전쟁'의 발발로 레이몬드는 후견인 이용익이 러시아로 도피하였기에, 더 이상 한국에 가지 못하였고, 마침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그의 가족도 사업에 실패하였지만, 그는 다시 사업을 해서 돈을 모을 수 있었고, 알렌 박사의 질녀 '마벨 에베레스트에게 청혼이 거절당함에 큰 충격'(?)을 받았는지도 알 수 없지만,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는 1948년 임종 직전에 그의 재산의 상당 부분을 고향인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 기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의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세운
'마틴 크룸 한국학생 장학기금'(The Martin Krumm Korean Students Scholarship)이였다. 초기의 기부금은 '3만4천97불'에 불과했지만 현재 '11만 1천5백불'로 증가했고 보통 일 년에 '7천-8천불' 정도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 기금의 반은 한국 출신 유학생에게 그리고 만약 한국 출신이 없을 경우 중국 출신 유학생에게 지원되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로써 레이몬드 크룸은 한국을 사랑했고, 한국을 위해 비록 작지만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조그마한 족적을 남긴 것이다. <정성화ㆍ로버트 네프, '서양인의 조선살이, 1882-1910', 서울: 푸른역사, 2010, p.161-169. 참조>


'콜브란-보스트윅개발회사'의 서울지점 소속 변호사인 엘리옷(E. A. Eliot)은 그의 상관인 셀돈(S. L. Seldon)과 상의한 후 11월 30일에 서울을 떠나서 상해로 가서 거기에 체류하고 있던 사주(社主)인
콜브란(한국명-高佛安/1852-1925)에게 밀지를 하명받은 사실을 보고하였다. 밀명을 받은 엘리옷과 콜브란은 곧 일본 고베로 건너 가서 '미국인'에게 그 문서들을 모두 전달하였으며, 문서를 전달받은 미국인은 다음 해 1월 4일에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해리 보스트윅(Harry R. Bostwick)에게 그 문서들을 직접 전달하였다. 보스윅(한국명-寶時旭/1870-1931)은 위 회사의 부사장이었고, 고종태황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비밀결사'의 하나인 '보헤미언 그로브'(Bohemian Grove)에 속한 자였다. <자세히보기>.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소재한 '보헤미언 그로브'는 지금도 해마다 여름에 자칭 '엘리트들'이 비밀리에 모여서 회합을 가지며, 특히 '부엉이'(미네르바)를 '제신'(祭神)으로 받드는 '인신제'(人身祭)와 연관된 가증스런 비밀단체인 것이다. 고양이에게 고기를 맡긴 꼴이었으니, 고종태황제가 이런 진실을 알리 없었을 것이요(?). 오로지 태황제의 투혼이 안타까울 뿐이다!!

고종태황제가 보낸 그 밀서는 기타 근거 서류들과 함께 알렌에게 즉시 보내어졌다. 이 때 알렌은 주한 공사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와 있었다. 다른 서류들은 다음과 같았다: 1) 그 협상의 자세한 설명 내용, 2) 한국 공사관에 대해 미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으로 보낸 암호화된 외교 지시사항과 황제 봉인이 찍힌 백지 편지, 3) 대한제국 외무대신 박제순이 미 국무부의 협조를 비공식적으로 요청한 내용 초안. 그 암호화된 메시지가 도착하는 각 국가별로 가서 해독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광무황제가 보스트윅에게 전신으로 보낸 37개 단어는 태황제의 메시지가 일본의 단일 보호국 체제가 아닌 미국, 영국 두 열강을 추가하여 공동 보호국 지위의 틀을 제안하고 있음을 암시하였다. 그리하여 보스트윅으로부터 서한을 전달받은 알렌은 황제의 밀지대로 곧 유능한 국제법 변호사를 물색했으나, 어떤 미국 변호사도 루즈벨트의 외교정책과 정면 충돌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4개월동안 밀명을 추진하던 알렌은 마침내 1906년 2월 19일자로 황제에게 '밀명 수행이 불가능함'을 알리고 활동을 중단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황제의 성격과 의사 결정 능력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던 알렌은 이 모든 비밀외교 노력이 실패했을 경우의 자신의 안전을 불안해 하였다. 그 업무를 위해 그가 받았던 1만 달러의 잔액을 되돌려 주었다. 그리하여 광무황제가 미국인들을 믿고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비밀 외교교섭도 모두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공개적 비난]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한국의 주권을 보전하려 했던 고종태황제의 비밀외교 노력은 1906년 초까지 거의 실효(實效)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태황제는 이제 일본의 침탈을 공개적으로 고발하여 강탈된 외교권을 되찾는데 그의 관심을 돌렸다. 이러한 노력에 대한 하나의 일환은 그 조약의 불법성을 주장한 1906년 6월 22일자 태황제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1907년에 태황제는 이상열과 이준 부사가 이끄는 대표단을 그해 여름 헤이그에서 개최된 '국제평화회의'(International Peace Conference)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 대표단은 일본인들의 교묘한 개입과 저지로 인해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국제 언론의 도움을 받아 한국 대표단들은 일본의 한국 침략을 공식적인 외교채널이 아닌 방식으로 공개적으로 고발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한국 대표단들의 투쟁은 현대 역사에 있어 가장 극적인 것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으며, 주권을 되찾기 위해 고종태황제가 취한 유일한 외교 조치로 기록된다. 이렇게 대의를 위해 전념하는 중에,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인한 이준 부사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의해, 일본이 저지른 부당 행위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표출되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헤이그회의'에 대표단을 파견 한 것은 국가 주권을 찾기 위한 고종태황제의 비밀외교 시도의 일환이었다. 헤이그에서 이상열이 이끈 특명 전권대사(Delegates Extraordinary and Plenipotentiaries)의 행동은 상대적으로 잘 홍보가 되었고, 심지어 사람들이 생생하게 기억까지 하고 있다.

미국과의 외교협상 과정의 실패 원인이 '공인되지 않은'(unauthorized) 특사라는 문제를 인식한 고종태황제는 헐버트 박사애게 외교 전권을 위임하고 그를 '특사'(Special Envoy)로 임명하였다. 이 사실은 황제의 편지 뿐만 아니라 위임장에도 기록되어 있다. 황제는 9개국 수반에게 이 특사가 일본의 한국침략을 그들에게 상세하게 전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고 호소, 국제외교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어떤 하자도 없었다.

그러나 그 문서가 등록되지 않은 황제의 옥쇄가 찍혀 있다는 점이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등록되지 않은 황제의 옥쇄에는 이유가 있었다. 1904년 말 한국 외무부는 외교 고문으로 일본 꼭두각시인 스티븐스(D. W. Stevens)를 고용할 것을 강요 받았기 때문에, 한국 외무부는 일본의 삼엄한 통제하에 있었다. 1905년 4월, 전신국은 일본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그 이후 우정국도 넘어갔다. 따라서 한국과 바깥 세상과의 소통(커뮤니케이션)은 일본의 감시를 받았다. 일본 관료들이 주요 정부 기관에 임명되었고, 황궁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관료가 정상적인 외교 채널을 통해 등록된 옥쇄로 외교문서 하나 보낸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록 그 편지의 형식이 문서 요건에 충분히 부합되지 않고, 등록된 옥쇄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동일한 외교 목적을 위해 쓰여진 편지에 사용되었던 다른 황제의 옥쇄들과 동일한 것이었다. 1906년 황제 편지의 진위를 입증하기 위해 단지 공식적인 요건들을 점검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 편지에 담긴 고종태황제의 의도이며 강탈로 이루어진 조약에 대한 그의 입장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 그 조약에 대한 태황제의 입장은 1906년 그의 편지에서부터 1907년 헤이그 한국 파견단 보증서에 이르기까지 그의 편지와 외교 문서에 완고하고 일관적으로 나타났다. 황제는 1905년 강탈로 이루어진 조약은 그의 동의나 비준 없이 이루어 졌기 때문에 국제 조약으로서의 적법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확실히 밝혔다. 따라서 국제법에 따라 그 강제 조약이 불법이었다는 것은 명확하고 처음부터 무효인 것으로 선언되었던 것이다. 순차적으로 뒤따른 소위 '외교권 양도'는 고종태황제가 동의하거나 비준한 적이 절대 없었기 때문에 불법이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침탈하였다는 것을 밝혀주는 가장 생생한 정보 중 하나는 1906년 6월 22일 태황제의 편지이다. 자국의 주권을 보호하려는 태황제의 외교적 투쟁은 일본이 무력외교로 한국을 병합시켰다는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반대되고 있다. 한국의 태황제는 절대 그의 제국을 일본에 팔지 않았다. 한국의 독립을 지키려 했던 외교적 접근에는 타일러 데넷이 잘못 증언했던 '가장 비도적적인 동기'(the most sordid motives)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영원한 충성심만이 제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릎쓰게 하였으며, 그의 헌신은 그때도 그렇지만 지금까지도 1941년 3월1일 헐버트 박사에 의해 공개적으로 증언된 것처럼, 다음과 같이 한국 국민들에게 전해졌다:

    한국의 황제는 일본인들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절대로 그의 왕실의 신성함을 자발적으로 동의하여 더럽히지 않았다. 그는 굽히기는 했으나 절대 부러지지 않았다.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그는 미국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그는 헤이그의 평화 회의에 접근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그는 유럽의 모든 관할 직원들에게 호소장을 보냈지만 강제 퇴위된 입장으로 그것이 전달되는 것이 방해를 받았다. (The Emperor of Korea never surrendered to the Japanese. Never did he soil the sanctity of his regal office by voluntary consent. He bent but he never broke. At the risk of his life, he appealed to US for aid—without effect. At the risk of his life, he approached the Peace Conference at The Hague—without effect. At the risk of his life, he sent appeals to every chancellery in Europe but enforced abdication prevent their delivery.)


자신의 제국을 지키려는 고종태황제의 외교적 투쟁이 단순히 지난 과거사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여러 외교적 접근법으로 국제법 전문가들이 1905년 강제 조약이 불법이었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사용하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그러한 법적인 평가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둘째, 주권을 유지하려 했던 고종태황제의 외교적 노력은 전세계에 걸친 한민족(桓民族)들 사이의 독립운동이라는 결실을 맺게 하였다. 퇴위 고종태황제가 1919년 초에 독약으로 암살된 사건은 3.1 운동을 촉발시켰다. 고종태황제의 독약 암살설 증거는 기회가 주어지면, 별도의 주제에서 다루겠지만, 개인적으로 찾아보도록 부탁드린다. <KBS 역사스페셜/ 광복절 기획 -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2009.8.15 방영) 참조해도 큰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이후, '3.1 독립운동'(Independence Movement)은 근대 한국을 만드는데 있어 정신적인 근간의 역할을 하였다. 일례로, 1905년 조약에 대해 'The Times of London'의 여러 뉴스 보도를 통해 알게 된 프랑스인 국제법 교수인 프랑시스 레이(Francis Rey)는 1906년 2월 초, 한 국제 저널에 '한국의 국제법상의 지위'(The International Legal Status of Korea)라는 자신의 글을 기고하였다. 그 기사에서, 그는 무효에 대한 2가지 이유를 분석함으로써 1905년 조약은 처음부터 '절대적으로 무효였다'(d’une nullite absolue =absolutely null)라는 아주 확고한 결론을 입증하였다. 그는 그 조약이 어떻게 결론이 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 11월 조약은 일본과 같이 문명화된 국가가 한국 정부에 강압적으로 가하였다는 점에서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수치스러운 행위였다. 그 조약은 한국 황제와 관료들이 이토, 하야시, 그리고 일본 하세가와 장군이 이끄는 일본 제국군대의 압박하에 체결한 것이었다. 한국 황제는 서양 강대국, 특히 워싱턴에 특사들을 보내어 강제조약에 대한 그의 강한 저항을 보였다. (The November Treaty was a physically and mentally shameful act (une violence morale et physique) on the part of a civilized country like Japan and was forced unto the Corean government. The treaty was signed by the Corean Emperor and Ministers under the pressure of Ito and Hayashi and the Japanese imperial army led by General Hasegawa. . .The Korean emperor sent emissaries to the Western Powers, especially Washington D.C., to demonstrate his strong opposition to the forced treaty.) (Rey 1906, 50).


그 이후로, 레이(Rey)의 법적인 논평과 해석이 도전을 받은 적은 한번도 없었다. 아래와 같은 2가지 조치가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끈다: 1927년, 미국 국제법 위원회는 하버드법대 교수진을 임명하여 국제법을 성문화 하게 하였다. 법대 교수진은 국제법에 명망있는 학자들을 한데 모아 그 과업을 수행하였다. 1935년, 그들이 성문화된 조약법을 발표했을 때, 전문가들은 그 어떤 조약이라도 '협박하에'(under duress) 체결되는 것은 무효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특히 '1905년 한일조약'(the 1905 Korea-Japan treaty)이 좋은 예라고 언급하였다.

레이 교수의 선구자적인 기사가 확실히 그러한 결정에 대한 법적 근거를 제고하였다. 이후 1963년에, UN에서 비슷한 프로젝트를 수행했을 때, 그들은 하버드팀이 성문화 했던 조약법을 수정하였다. '협박 하에'라는 용어는 '국가 대표들에 대한 개인적인 강압'(personal coercion against the representatives of state)이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교체되었으며, 전형적인 예로, '1905년 한일조약'이 다시 제시되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그러한 불법조약을 무효화 시키기 위한 모범적인 절차들이 한국 태황제가 취한 절차들과 일관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강제로 유학중인 왕세자 전하. 훗날 영친왕이다. 일본의 왕족 이방자와 정략적 혼인을 한다. <사진제공/미국 코넬대학교 도서관>.

요약하자면, 한국 주권을 보존, 보호하려 했던 광무황제의 정신적인 투쟁은 레이(Rey)의 조약법에 대한 논평과 하버드 법대의 성문법, UN의 성문법 개정에서 살아남았다. 현재에도, '1905년 조약'(1905 Treaty)이 불법이었으며, 나아가 '무효'(null and void)라는 사실은 국제법에 관계된 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1919년에 이르러서는 황제의 암살은 거의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종영과 함께 전 세계의 정치적인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였다. 그 결과 미국 윌슨 대통령의 이상적인 외교 정책인 '민족 자결권의 원칙(The Principle Of National Self-determination)이 국제 사회에서 큰 힘을 얻었다.

이 새로운 외교적 관점에서는 시어도어 루즈벨트 전 대통령의 힘의 균형을 근간으로 하는 현실적인 접근법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오히려 외교의 획기적인 반전이 나타났다. 미국 외교정책의 변화를 감지하며, 고종태황제는 제1차 대전 직후 '1918년 파리평화화의'(1918 Paris Peace Conference)에 특사를 보내려는 추가적인 시도를 비밀리에 강행하였다.

한편, 퇴위당한 고종태황제의 완고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왕세자를 일본 신부와 결혼시키려는 계략이 들끓고 있었다. 1919년 초, 국내외적인 정치적 환경의 변화는 일본 군대의 한반도 장악을 처참하게 끝내버리기에 충분하였다. 바로 이때, 고종태황제가 알 수 없는 암살자에 의해 갑자기 살해된 것이었다.

1919년 상해로 정치적 피난처를 찾아 떠나기 전, 광무황제의 둘째 아들인 이의(King Ui)는 그 사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우리 시대 가장 극악 무도한 일본인 악마의 손이 태황제를 독약으로 암살하였다.' 드디어 3월1일, 일본 식민 착취와 강압에 시달려 왔던 한국 국민들이 일어났다. 전 고종태황제의 암살로 촉발되어, 민중 봉기는 국내 정치적 지지의 결여로 성공하지 못했던 황제의 주권 외교 항쟁을 국가적인 독립운동으로 바꾸었으며, 지금까지 일본 통치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으로 만들어 놓았다. 광무황제의 애국적인 영원한 충성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살아 있다.


[에필로그]

알렌 박사가 활동하던 그 시대는 한국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격동기였음은 공인된 사관(史觀)이다. 자고 일어나면 하루가 달라지던 그러한 격변의 물결이 밀려들어오던 시기였다. 이 시대를 전문가들은 서구의 세력의 확장이 불러온 당연한 결과였다고 단언해 버리는 글들을 읽어도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견해와는 다른 각도에서 상고해보았다. 필자의 글을 처음 접하는 분은 전혀 생뚱맞은 '허설'(虛說)이라고 단언할 수 있겠지만, 필자의 이같은 진실이 '역사학적 사실'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모두의 글에서 언급하였듯이, '역사학적 사실'이란 '실제 있었던 일'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사료에 의해 입증된 일'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역사 전문가가 아닌 필자가 펼쳐가고 있는 이 글들은 '실제 있었던 일' 곧 '진실' 위에 전개해 가고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1905년 3월 21일 알렌 공사는 자신의 후임자가 선임되었음을 알고는, 미국무장관 루트(Root)에게 아내가 아프고, 7월의 더운 일본을 피하고자, 귀국을 늦춰달라고 청원한다. 그리고 3월 30일, 국무성 차관보 애디(Alvey A. Adee로부터 루즈벨트 대통령이 알렌의 주한 공사직을 해임시키고, 모건을 임명했음을 알려온 전문을 받고서 알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는 약 2개월 후 6월 9일 한국을 떠나면서 알렌이 남긴 말 '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I Fell With Korea)라는 여운이 주는 의미가 예사롭지 않다. 이에 관한 자료는 주문해 놓았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에, 입수 되는대로 다음 번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Scott S. Burnett  & George M. McCune, Korean-American Relations: Documents Pertaining to the Far Eastern Diplomacy of the United States: The Period of Diminishing Influence, 1896-1905, University Of Hawaii, 1993, p.258-259>

◆1905년 6월 9일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공사직'을 해임을 당하고 본국으로 떠나기 전 미국공사관에서 서울 주재 외교 사절단과 함께 찍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알렌 주한 공사이다. <Horace Allen, Things Korean, New York: F. H. Revell Co., 1908, p.224>. (화중광야제공)

◆정치욕에 눈이 멀었나...퇴임 후 대통령직 3기를 위해 창당준비과정에서, 1912년 10월 14일 밤 위스콘신주 밀워키시 소재 '길패트릭호텔' 정문 앞에서 총격을 받는다. 자세한 스토리는 <호국스페셜 제2부/나는 한국과 함께 쓰러졌다> (자세히보기)를 정독하시기 바란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이 사건으로 해서 그의 정치 재개는 위축되고 만다. 과욕이 부른 응보였다고 할까(?)...비밀결사 '프리메이슨' 회원으로서, 미국의 국익에 앞장선 루즈벨트는 소위 '태프트ㅡ가쓰라 밀약'을 이용해서, 미국은 필리핀을 찬탈하기로 하고, 그대신 일제가 한국 땅을 침탈하는데 결정적인 '다리역활'을 해준다. 일종의 바터(비밀거래)였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던 고종태황제는 루즈벨트의 큰 딸 앨리스가 한국에 도착하였을 때, 제물포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가마로 모신다. 그리고 궁궐에 초대해서 향연을 베푸는 등, 그 여자를 극진히 대접해서 보낸다. 그런데 그 여자가 한국을 떠나고 나서 약 2개월 후에 '을사늑약'이 체결된다. 결과론이지만, 이 여자가 과연 '태프트ㅡ가쓰라 밀약''을사늑약'의 음모를 사전에 몰랐을까? 필자의 예견으로는 그 여자가 약혼자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것은 한국의 정황을 살피려고 온 '스파이'(?)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 여자의 회고록 저서를 주문해 놓았다. 입수되는대로 살펴보고 읽어본 후 별도 주제에서 다룰 것이다. 참고로, 위 사진 상단 가운데 앨리스가 다른 동생들 보다 유난히 어른스러워 보임은 그의 생모 '마르다 블록 루즈벨트'(Martha Bulloch Roosevelt)가 그를 낳고는 2일 후에 갑작스런 '장티푸스열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섯 동생들은 계모 '에데스 캐로우'(Edith Carow)의 소생들이다. <이미지프리제공/위키피디어>


한반도 강토의 찬탈을 주모하였던 5적 곧 '조슈5걸'(長州五傑)에 관해서는 작년에 <호국스페셜 제1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조슈5걸'이란, 일본의 '에도막부'(江戶幕府) 말기에 조슈번(長州藩)으로부터 청나라 경유로 유럽에 파견되어(밀항하여), 주로 '런던대학 유니버시티·컬리지' 등에서 유학한 일본인 다섯 청년들, 곧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엔도우 킨스케(遠藤謹助), 야마오 요우조우(山尾庸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의 5명의 조슈번사(長州藩士/조슈 사무라이)를 가리킨다.

이들 중에서 한국주재 일본공사로 와 있다가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와 교체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 살해의 주범이다!! 아울러 한국 내에서의 크고 작은 변란들의 배후에는 '이노우에'가 버티고 있었다. 이러한 진실은 일반 '역사적 사실'과는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실제있었던 '진실'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자의 명확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필자의 본 글을 이해하는데 힘들 것으로 사료된다.

① [을미사변 ㅡ 1885.10. 8]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를 살해한 '을미사변'은 주한공사로 부임(1894..10.15-1895.8.18)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장악하여 '전결단행'(專決斷行)할 수 있는 권한으로 명성태황후의 시해 각본인 '여우사냥' 시나리오를 완성시켜 놓았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대로 이오누에의 후임자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가 실행에 옮겨 완성한 사건이다.

② [을사늑약 ㅡ 1905.11.] 한국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체결시켰다.

③ [한일병합 ㅡ 1910. 11.17] 한국 3대 통감(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체결시켰다.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현재의 야마구치현(山口縣)인 조슈번(長州藩)에서 하기가 가신인 사무라이의 셋째 아들로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성은 우타다(宇多田)였으나 어머니의 쪽의 양자로 입적하여 어머니 성인 데라우치(寺內)를 따랐다. 그는 '보신전쟁'(戊辰戦争)에 종군하여 막부(幕府) 세력과 싸웠고, 이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에 의해 새롭게 창건된 일본제국 육군의 소위로 임관하였다. 1877년 중앙정계에서 밀려난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가 자신의 고향인 사쓰마번(薩摩藩)에서 반란을 일으켜 벌어진 '세이난전쟁'(西南戰爭)에서 참전하였으나, 부상으로 오른팔이 불구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후에는 야전보다는 주로 후방의 보직에서 일하게 되었다. [호국스페셜 제1부] <전장에 휘날리는 정체 불명의 십자가> (자세히보기).

1993년 압록강철교 위에서 북한을 향하여 '열어주소서' 기도중인 필자. 필자의 뒤로 6.25전쟁 때 끊겨 버린 러시아가 놓은 철교가 보인다. (화중광야제공). [미니해설] 한국과 만주를 잇는 압록강철교는 1910년 12월27일 준공되었다. 이 공사는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원대한 계획의 일환으로 추진한 대역사(大役事)였다. 안중근(安重根) 장군의 사촌동생인 안명근(安明根)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가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반드시 참석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이토 히로부미(伊藤搏文)가 조선을 집어삼킨 원흉이라면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갖은 계략을 짜낸 원흉이었다. 안명근은 바로 그 데라우치 마사타케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준비했지만, 불행하게도 데라우치가 탄 특별 열차가 당도하기도 전에 체포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필자는 '이노우에' '이토' '데라우치' 이들 3적(三賊)에게서 한가지 공통점을 발견하였으니, 바로 조슈번(長州藩) 출신이라는 것이다!! 메이지유신의 주도권자들이 태어난 고향이다. 오늘날은 야마구치현(山口縣)으로 바뀌었다 한다.


이처럼 조슈번은 한국과는 악연이다. 그리고 저들의 '음계'(淫計) 곧 한반도 완전 침탈(完全浸奪)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미 필자의 <호국스페셜 제1부/ 역사기록에는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자세히보기>에서 언급하였듯이, 이노우에와 이토는 정체불명의 '국적없는 선교사'라는 별칭을 지닌 '귀도 베어벡'(Guido Verbeck)의 제자들이었다. 이들이 바로 한국을 강탈한 주모자들이며, 이들의 '역모'(逆謨)가 '역사적 사실' 속에는 누락되어 있을지라도, '실제 있었던 일' 곧 '역사적 진실'을 규명하는데 필자는 진력(盡力)하여, 기회가 주어지면 '베어벡의 정체'를 집중적으로 파헤쳐 볼려고 기도중이다. 결국에는 저들의 정체들은 '로스차일드가문'(The Rothchildes)과, '록펠러가문'(The Rockefellers)과, '국제유태자본'과, '프리메이슨'(Freemasonary)에다 결국에는 '예수회'(The Jesuits)와 직ㆍ간접으로 연결고리들로 얽혀 있으며, 그러한 고리는 백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형태만 바뀌었을 뿐이지, 그 속은 변함없이 '동양의 삼국지'(三國地)(?)를 펼쳐가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하면, 한반도와 관련된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르게 판단하게 될 줄로 믿는다!!

똑같은 우리나라 역사에도 신나는 장면과 우울한 장면이 따로 있게 마련이다. 고구려 역사는 역시 요동 벌판을 말달리며 수나라·당나라를 무찌르던 무렵이 최고다. 백제도 한강 유역을 호령할 때가 좋았다. 함경도·평안도 변방까지 세력권으로 꿰찬 조선 초기의 짱짱한 무골(武骨)을 보라. 후기의 찌든 문약(文弱)과 대비되지않는가? 따라서 오늘의 한반도 문제의 핵심에 접근하기 위해선 '장수적 직감'(將帥的 直感)이 절실하다. '퍼다주고 달래주면 북한이 달라질 것이다'하던 '강단서생'(講壇 書生)들의 낙관론과 환상론은 폐지되어야 할 때가 이른 것이다. 이는 같은 임진왜란이라도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보다는 이순신 장군의 연전연승 바다싸움이 훨씬 관심이 높았음이 입증해주지 않았던가!! 지난 3월 26일 연평도 근해에서 무모하게 죽어간 46명의
이순신 장군의 후진들의 희생에 보응의 때는 반드시 오리라고 믿어진다.

조상들께 죄송하지만 신나는 한국사와 안타까운 한국사, 인기 있는 역사와 묻어버리고 싶은 역사가 따로 노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게 인지상정이다. 이러한 역사의 두 흐름 속에서 안타까운 수준을 넘어 깊은 비애와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장면이 바로 대한제국이 망해 가는 과정이다. 여기에는 태평양 건너 괴물 '루즈벨트'가 있었고, 현해탄 건너 '이토'가 있었다. 안중근 장군의 이토 제거(1909.10.26)는 '하늘이 내리신 선물'(?)이요,한국의 주권회복을 위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항변하였던 주한 공사 알렌 박사를 해임시킨 루즈벨트의 '총격부상'(1912.10.14)을 어찌 '우연'(?)이라고만 매도할 것인가?

루즈벨트의 외교정책은 '부드럽게 말하지만 큰 막대를 들고 다닌다'(speak softly but carry a big stick)였다. 이 정책은 특히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러시아와 일본에 '우호적 중재'(거중조정/Good Offices)의 힘을 행사한 것에서 사실로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는 사실이 아니었다. 루즈벨트는 '비밀스럽게 말하지만 배반의 막대기를 들고 다닌다(speak secretly but carry a betrayal stick)'였다. 역사가 말해 주듯이, 아시아에서 힘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외교로 인해 그는 미국 최초의 노벨평화상 수상이라는 개인의 영광을 안게 되지만, 1941년 일본인들이 하와이 호놀룰루의 진주만을 이유없이 공격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어찌하여 세계 역사를 연구하고 상고한다는 전문가들은 세계 장악의 배후세력(로스차일드가문/국제유태자본가들/예수회)을 파헤쳐내지 못하고 있는가? 몰라서 그러는가 아니면 무엇 때문인가...? 저들의 '꼭두각시'였던 루즈벨트와 일본제국의 이토 히로부미의 '참다운 정체'(프리메이슨?)를 밝혀내지 '않는' 아니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을사늑약'의 주모자 이토 히로부미의 정체 밝혀지다] <자세히보기>. 결국에는 루즈벨트의 개입으로 일본이 동아시아의 평화를 망치게 되는데는 약 40년이 걸리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1905년 한국의 독립에 대한 희생이 있었음이 '역사적 진실'은 오늘도 살아서 자랑스런 우리 한민족(桓民族)의 귓가에 들려주고 있다.


이 무너진 동아시아의 평화의 균형 ㅡ 100년전에 대한제국의 안중근 장군이 제창하였던 '동양평화론'의 회복은 과연 누가 회복할 것인가? 우리 '대한'(大桓)의 민족의 손에 달려있지 않을까(?)...'동양(東洋)의 삼국지(三國地)'는 한국(桓國)이라...아픈 역사를 기억하는 민족만이 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조용히 앞날의 현실을 바라본다. 샬롬!! (2010.5.15/밤)


[부록]


[한일병합과정 약사(略史)]

    1. 청일전쟁 (1894.7).

    2. 러일전쟁 (1904.2).

    3. 한국에 일본군 파견 (1904.2).

    4. 한일의정서 체결 (1904.2).

    5. 제1차 한일협약(한일협정서) 강제 체결, 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 박탈 (1904.8).

    6. 일제 '가쓰라-태프트 밀약' 조인 (1905.7).

    7. 일제 제2차 영일동맹 (1905.8).

    8. 일제 포츠머스조약으로 러시아 한국에서 배제 (1905.9).

    9. 고종태황제의 국권회복 투혼 일환으로 호머 헐버트 박사 한국 특사로 미국 파견ㅡ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황제밀서 전달 실패 (1905.10).

    10. 헐버트 박사가 미국에 체류하는 동안, 일제 고종태황제를 협박, 제2차 한일협약인 '을사늑약'을 늑결 ㅡ 한국 국권상실로 국명만 가진 나라로 전락 (1905.11).

    11. 고종태황자 '을사늑약'의 무효화를 선언, 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코자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 회의장 참석에 실패 (1907.6).

    12. 헤이그평화회의에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 고종태황제를 퇴위시키고, 순종태황제를 즉위시킴 (1907.7.16).

    13. 일제 '정미칠조약' 체결로 한국의 내정권도 합법적으로 장악 (1907.7.24).

    14. 언론탄압을 목적으로 광무보안법을 잇달아 공포, 한국민의 항일활동을 한층 강화 (1907.7.27).

    15. 한국식민지화에 최대 장애인 한국군대를 강제로 해산 (1907.8.1).

    16. 일제 육군대신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3대 통감으로 임명, 한국식민지화를 단행 (1910.5).

    17. 데라우치 마사타케 통감이 비밀리에 한국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1910.8.16),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 (1910.8.22).

    18. 조약을 체결한 뒤 일제는 한국민의 반항을 두려워하여 당분간 발표를 유보.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도록 함. 8개조로 된 이 조약은 <제1조>에서 '한국정부에 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제에 양여할 것을 규정.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가 건국된 지 <27대 519년> 만에 망하니, 이 날을 가르켜서 '경술국치'라고 함. (1910.8.29).

    19. 그 후 100주년을 맞은 한일 양국의 지식인들이 '한일병합조약'이 무효임을 공식으로 선언함. 앞으로 양국간의 정부의 대응이 주목될 것임 (2010.5.10)

    19. 2010년 8월 29일이 '한일강제병탄' 된지 정식으로 100주년이 되는 날임.


[조선 왕들의 공식칭호 ㅡ 19세기 한국 주재 외국 선교사들의 정리]

제1대 태조강헌대왕(1392-1398) 제2대 정종공정대왕(1399-1400)
제3대 태종공정대왕(1401-1418) 제4대 세종장헌대왕(1419-1450)
제5대 문종공순대왕(1451-1453) 제6대 단종공의대왕(1453-1455)
제7대 세조혜장대왕(1466-1468) 제8대 덕종회간대왕(1475)(위경세자 1458년 죽음)
제9대 예종양도대왕(1469) 제10대 성종강정대왕(1470-1494)
연산주(연산군)(1495-1506) 제11대 중종공희대왕91506-1543)
제12대 인종영정대왕(1544) 제13대 명종공헌대왕(1545-1566)

제14대 선조선경대왕(1567-1607)

광해주(광해군)(1608-1622)
제15대 원종공양대왕(청원세자 1631 죽음) 제16대 인조헌문대왕(소현세자)(1622-1648)
제17대 효종종선대왕(1649-1658) 제18대 현종장효대왕(1659-1673)
제19대 숙종원효대왕(1674-1719) 제20대 경종선효대왕(1720-1723)

제21대 영종(영조)헌효대왕(1724-1775)

제22대 진종우양대왕(사도세자)

제23대 정종(정조)문송대왕(1776-1800)

제24대 순조손호대왕(1800-1834)
제25대 익종제문co-King(1827-1830) 제26대 헌종경문대왕(1834-1849)
제27대 철종대왕(1849-1863)

제28대 고종태황제(1863-1907)

제29대 순종태황제(1907-1910) <자료정리/ 'Korean Rpository'(1896-1897) 참조>


[필자 DEMBO의 제언] 본 글을 착수한지도 벌써 2주일이 지났다. 애당초 구상하고서 착필(着筆)했을 때의 의도 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글을 쓰게 되었다. 그 동안 필자가 알고 있던 그 한계를 벗어나서 숨겨져 왔던 자료들이 발굴될 때는 마치 '광맥의 노다지'를 만난 듯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하루 충분한 시간의 수면을 취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자료(?)를 얻을려고 인터넷 검색을 수 시간 동안 수 백번 클릭하는 일은 이제 필자의 일상 버릇이 되고 말았다 (컴퓨터 중독이 아니다. 오해 말라). 그리고 누구 혹은 어느 단체의 후원을 얻어서 하는 것도 아니요, '작은 가족 화중광야'의 헌심(獻心)이 있을 뿐이다. 오로지 주님이 내려주신 그 소명 따라서 '외로운 그 길'(세상 사람들이 볼 때)을 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필자의 속사람은 생수의 강물처럼 흘러넘치니 어찌 주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가 아니란 말인가. 진리 앞에 '비겁자'가 되지 말자는 것이다. 본 주제도 쓰다 보니 너무 길어지고, 그리고 아래와 같이 절실한 자료들이 아직 입수하지 못하였기에, 다음 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이만 여기서 줄인다. 끝으로 이 글을 읽는 분께 부탁의 말이 있다. 필자의 글은 한번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되어, 서너번 읽으니 이해가 된다는 중론(衆論)이다. 그리 아시고 박대하지 않으면, 그리 오랜 시간 투혼해 온 필자에 대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괜한 염려도 해 본다. 그리고 본 글의 기초는 김기석 교수님의 글이 많이 도움이 되었음도 밝혀두는 바이다. 샬롬. (2010.5.18/깊은밤)

1. Fred H. Harrington & Stuart  Bruchey, God, Mammon and the Japanese: Dr. Horace N. Allen and Korean-Amer Relations 1884-1905. (입수완료)

2. Richard Salvato, Horace Newton Allen Papers, 1883-1923. (microfilm ㅡ 가격이 너무 비싼지라 주문을 놓고 기도중).

3. Alice Roosevelt, Crowded Hours. (입수완료)


아직 여건이 허락치 못하여 알렌 박사의 마이크로 필림 자료는(2번) 입수치 못하였다. 그렇지만, 언젠가 반드시 주님께서 채워주시리라 믿으며, 오늘은 20세기 초에 우리 한민족(桓民族)이 당한 민족적 '트라우마'(정신적 상처)는 용병인 일본제국이 '시온주의자'의 세계제패의 '허망한 욕망'에 유혹받아 자행하였던 '꼭두각시 놀음'은 인류역사상 최대의 '죄익상'(INQUITY)이었음을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바이다!! (2010.8.24/밤)


<Created/20100504> <Updated/20100518><20100715><201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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