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작곡/ 정재선 ㅡ 채보/ 루디아 안 ㅡ 편곡ㆍ연주/ 다니엘 정


[Dembo's Unforgettable Essay ㅡ SamPaRam]
[삼파람 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3-2] '여보시요, 주인장, 거기 빈 방하나 없소?'


글/ 정재선 목회자


인간은 진실(眞實)을 알면 발언을 하게 되어 있다. 아무리 과묵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심약(心弱)한 사람이라도 진실을 알면 참지 못한다. 진실은 인간의 양심(良心)을 움직이는 근원(根源)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과거향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내다보는 '창'(窓)이다. 비록 지난 날의 우리 역사가 암울한 시대였다고 해도, 그 역사를 되새기지 않으면, 그 역사는 언제라도 반복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그리고 역사는 기억하고 아는 것만큼 전진한다...

'어둠 속에 앉은 그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리고 죽음의 그 땅과 그늘 속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The people which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 and to them which sat in the region and shadow of death light is sprung up.) 
(마태복음 4:16, KJV화중광야역)

'한국교회에서 지금 종교는 성경의 지식, 하나님 그 말씀, 바로 그것이 이 백성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는 힘이라고 하는 그런 소망과 확신을 주는 방향으로 실천하고 있다.'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 1884)

"美 예일대 교수인 도널드 케이건(Donald Kagan)의 '전쟁과 인간'의 한 대목이 새길 만하다. (원제는 ‘On The Origin of War and The Preservation of Peace’인데 직역하면 '전쟁의 기원과 평화의 보존에 관하여' 정도가 되겠다.) 케이건은 이 저서에서 어느 연구를 인용하여 '지난 3,421년 동안 전쟁을 치르지 않은 기간은 불과 268년'이라고 적시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은 일상사였으며 평화로운 시기가 오히려 예외적이라는 얘기다." (조갑제닷컴 인용)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의 양위(讓位)


[대한제국의 황혼 '100년전 우리는'] 고종밀서를 특종 보도한 英國 기자 (조선일보/2010.4.16) <조선닷컴/자세히보기>.

◆더글러스 스토리(Douglas Story) 기자의 이 책 원본은 지금 고서점에는 고가(80만원)로 나와 있다. 그 만큼 가치가 있는 희귀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황위에서 물러나는 고종을 풍자한 일본측 만화. 고종태황제는 보따리를 등에 짊어지고 한손에는 인삼, 예금통장, 열쇠, 담뱃대를 들고, 또 한손으로 엄비(영친왕 모)의 손을 잡고 궁중을 떠나고 있는 모습. <자료/團團珍聞> (1907.7.27)

영국 런던의 일간 '트리뷴'(Tribune) 기자인 '더글러스 스토리'  (Douglas Story)는 100여년 전 아시아와 중동에 관하여 연구 관찰한 영국인 전문 종군기자이며, 홍콩에 있는 일간지의 편집인이었다. 그의 저서 'TO-MORROW IN THE EAST'는 1907년 런던 소재 'George Bell & Sons'에서 발간하였다. 인도와 영국령에만 발간이 허락되었기 때문에, 그 동안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 속에는 '고종황제의 밀서'는 영국의 국왕이 신임하는 한 대사가 '일본은 조약에 대한 의무를 모두 이행하였다'는 내용을 서두로 시작하여 일본이 한국, 중국, 러시아와 그리고 영국과 맺은 조약들을 어떻게 이행하였는가를 스토리 기자가 조사하여 결국 일본이 조약의 의무를 전혀 지키지 않았음을 밝히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특히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되어졌던 그 날의 일들을 고종태황제로부터 전해 듣고 가감 없이 자세히 기록하고 있으며, 황제의 인장과 참정대신 한규설의 인장이 없이 체결된 불법적인 조약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조약이 맺어진 후, 한국 내에서 분개하는 한국인들의 상소와 민영환을 비롯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의 이어지는 자결과, 그리고 일본인에게 자기 땅을 빼앗겨 항의하던 한국인들을 '나무 십자가'에 매달아 살해하였던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다.


1906년 1월 초 서울에 왔다. 을사늑약 이듬해였고 통감부가 설치되기 직전이었다. 궁중에는 고종을 감시하는 정탐꾼들이 들끓고 있는 가운데 스토리는 고종의 측근이 한복 바짓가랑이 속에 감추어 가지고 나온 밀서를 전달받았다. 붉은 옥새가 찍힌 밀서는 여섯 항목으로 되어 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은 황제가 조인하거나 동의한 일이 없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의 내정을 통제하는 일도 부당하다. 한국 태황제는 세계열강이 한국을 집단 보호 통치하되, 기한은 5년이 넘지 않도록 하기를 바란다'는 요지였다. 일본의 침략을 공동으로 막아주고 중립화를 보장해 달라는 외교방침을 밝힌 내용이었다.

밀서(하단 왼쪽)는 1906년 1월 29일자로 작성되었다. 스토리는
일본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서울을 빠져나와 제물포에서 노르웨이 선적의 배를 타고 2월 7일 가까스로 중국 '즈푸'(Chefoo/芝罘=옛지명은 '煙台')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밀서의 내용과 자신이 취재한 한국의 실정을 기사로 작성하여 런던 본사에 송고했다. 또한 즈푸 주재 영국영사 오브라이언 버틀러(O'Brien Butler)를 찾아가서 북경주재 영국대사에게 밀서를 전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북경 주재
영국 공사 어네스트 사토(Ernest Satow)는 영국 외무성에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영국은 이미 '제2차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하여 일본의 한국 침략을 실질적으로 인정한 상태였다.

1906년 2월 8일은 '을사늑약'이 고종태황제의 재가 없이 이뤄졌다는 소식이 영국 신문 '트리뷴'(Tribune)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날이다. 스토리 기자가 타전한 첫 기사는 '트리뷴지' 2월 8일자 3면 머리(하단 오른쪽)에 게재됐다.


<한국의 호소/ 트리뷴지에 보낸 황제의 성명서/ 일본의 강요/ 열강국의 간섭요청>이란 제목의 기사는 글 첫머리에 '한국의 황제는 실질적으로 포로의 신세다. 일본군은 궁중을 둘러싸고 있으며, 궁중에는 일본 스파이들이 가득 차 있다. 을사늑약은 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았다'고 썼다. 이어 '을사늑약' 체결의 경위와 한국의 정치 실정을 소개하고 고종의 밀서 6개항을 영문으로 번역 게재했다.

고종 황제의 밀서-을사늑약 반대한 조항
(총 6조항)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일본이 작성한 조항
(총 5조항)

1. 조항 : 1905년 11월 17일 박제순과 하야시(Hayashi)가 서명한 조약에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동의하지도 않았고, 또한 서명도 하지 않았다.

2. 조항 :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일본의 언어로 공포된 조약의 조항들을 반대 한다.

3. 조항 :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한국의 주권을 선언하였고, 그 주권이 외국 강대국에 넘겨지는 어떤 조치도 반대한다.

4. 조항 : 일본에 의해 공포된 조약에 관련된 조건은 외국 강대국들과 외교권에 관한 것이었다.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한국의 내정을 지배하는 일본의 장악을 결코 공인한 적이 없다.

5. 조항 :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일본으로부터의 통감 지명을 결코 승인한 적이 없고, 한국에서 황제의 권한을 행사 할 일본인의 임명을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6. 조항 : 한국의 황제 폐하께서는 다른 강대국들이 한국의 외교 업무를 성의를 가지고 관장하는데 5년을 초과하지 않는 기간 동안 공동보호로 활동하기를 초대한다.

    한국 황제 폐하의 손과 인장하에서 마쳐짐.

    1906년 1월 29일 을사늑약 반대할 것을 증명한다.

 

1. 조항 : 일본 정부는 이제부터 동경에 있는 외무성을 통해 한국의 외국과의 관계와 업무들을 지휘, 감독 할 것이며, 일본 영사나 외교관은 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이익을 책임질 것이다.

2. 조항 : 일본 정부는 한국과 다른 나라 사이에 존재하는 조약을 이행할 의무가 있으며, 한국 정부는 이제부터 일본 정부를 중개로 하지 않고는 국제적 성격을 가진 결의나 조약을 체결하지 않기로 약속한다.

3. 조항 : 서울에 주재할 통감이 한국의 외교업무에 관계된 사항들을 지시하고 담당할 목적으로 한국 황제 폐하 어전에서 일본 정부를 대표 할 것이며, 그는 한국 황제 폐하를 비공식 또는 개별적으로 알현할 권리를 가질 것이다. 일본 정부는 각 열린 항구와 필요할 경우, 다른 지역에도 이사관을 둘 권한을 가질 것이다. 이사관들은 통감의 지휘 아래서, 현제까지 한국에 있는 일본 영사가 소유하고 있는 권한과 기능을 행사 할 것이며, 이 조약의 조항을 완전히 실행하기 위해서 필요로 하는 모든 의무를 시행할 것이다.

4. 조항 : 한국과 일본 사이의 현존하는 모든 조약과 협정의 조항들은 이 조약의 조항들과 모순 되지 않는 한 효력이 지속될 것이다.

5. 조항 : 일본 정부는 한국 황실의 안녕과 위엄을 유지할 것을 약속 한다.


◆고종태황제가 스토리 기자에게 건넨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는 1906년 1월 29일자 밀서. <더글라스 스토리 지음/권민주 옮김, '고종황제의 밀서', 서울: 글내음, 2004, 속페이지>. (Douglas Story, To-morrow In The East, p.71)에 삽입됨. 일제의 상엄한 경계와 차단 속에서 내관을 통하여 스토리 기자에게 건넨 이 한 통의 밀서가 2월 8일 영국 '트리뷴지'를 통하여 '을사늑약'이 무효임이 온 세계에 알려진다.


스토리 기자의 기사는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트리뷴' 기사는 로이터 통신을 타고 거꾸로 동양으로 되돌아와 한국, 일본, 중국의 신문에 다시 실렸다. '대한매일신보'와 헐버트 박사가 발행하는 '코리아 리뷰'도 한국 태황제가 '을사늑약'의 신빙성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밀서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1년 동안 계속되던 논란은 1907년 1월 16일자 '대한매일신보'가 밀서를 사진판으로 실으면서 다시 확산되었다.

밀서가 가짜라고 주장했던 일본 외무성과 이토 히로부미는 밀서의 실물이 신문에 실리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밀서 사진은 고종의 진의가 무엇인지를 국민들에게 알리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는 밀서의 존재를 부인했다.
'고종은 밀서를 수교한 일이 없으며, 이는 불순한 자들이 한일 양국의 우의를 해치려고 날조한 것'이라는 내용을 만들어 한국 정부의 '관보'(1907.1.21.)에 게재했다. 그리고 1904년 7월 18일에 양기탁(梁起鐸)과 함께 공동으로 창간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코리안 데일리뉴스'(Korean Daily News)를 폐간하여, 어네스트 베델(Ernest T. Bethell/한국명:裵說)이 반일 활동을 못하도록 하고, 그를 추방하려는 공작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그는 1908년 6월 신문사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병을 얻어 1909년 5월 서울에서 세상을 떠나니, 이때 그의 나이 서른 일곱이었다. 그의 유언에 이르기를, '나는 죽되 대한매일신보는 길이 살아 한국 동포를 구하기를 원하노라' 하였다. <베델의 묘비에서>

◆1904년 7월 18일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코리안 데일리뉴스'(Korean Daily News)를 공동으로 창간한 어네스트 베델(E.T. Bethell)과 양기탁(오른쪽). <자세히보기>.

[양기탁 ㅡ 梁起鐸/1871-1938]

1871년 4월 2일 평남 평양 소천(小川)에서 부친 시영(時英)과 모친 인동 장씨(仁同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말의 독립운동가로서 아명(兒名)은 의종(宜鐘), 자(字)는 자명(子明), 아호는 우강(雩岡), 기탁(起鐸)이다. 어려서 한문사숙(漢文私塾/오늘의 사립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5세에 서울로 올라와 나현태(羅鉉泰)를 비롯한 여러 우국지사들과 접촉함으로써 그들의 애국사상에 감화를 받았다.

당시 외국과의 교섭이 점차 확대되자 한성외국어학교에 들어가 6개월 동안 영어를 배웠으며 기독교 사상도 접하는 한편 동학과도 관계를 맺었다. 1895년 영국인 선교사 제임스 게일(James Gale/한국명:奇一)의 '한영자전'(韓英字典) 편찬을 도왔다.

그리고 원산 일본 영사관원의 소개로 일본으로 건너가 '나가사키 상업학교'(長崎商業學校)에서 한국어 교사로 2년간 체류했다. 일본에서 귀국한 후 1897년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도총무(都總務)로 활동했다. 그 뒤,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 등과 개혁당 조직운동에 가담했으며, 일제가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이에 반대하는 보안회(保安會) 운동에 참여했다. 1904년 3월 궁내부(宮內府) 예식원(禮式院) 번역관보로 임명되어 영어 통역을 맡았다.

당시 일본이 러일전쟁 이후 민간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을 단행하자 일본이 군사동맹을 맺고 있었던 영국의 기자와 제휴하여 한영합작의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언론을 되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덴마크의 전무기사(電務技師)였던 뮐렌스테트(H. J. Muelensteth/한국명:彌綸斯)의 소개로 영국 특파원 베델을 만났다.

1904년 영국인 베델과 영자신
문 '코리안 데일리뉴스'(Korean Daily News)를 발간하고, 이듬해 국한문으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 주필이 되어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를 조직,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4년간 복역하였다, 1915년 2월 석방되었다. 1916년 만주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18년 12월 톈진(天津)에서 또다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된 뒤 약 2년 동안 거주지 제한의 유배생활을 했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 때 편집고문에 취임, 1921년 미국의회의원단이 내한하였을 때 독립진정서를 제출한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가(假)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의성단(義成團)을 결성하였으며, 오동진(吳東振)·김동삼(金東三) 등과 통의부(統義府)를 창설하고, 1925년 지청천(池靑天)·김동삼 등과 정의부(正義府)를 조직하여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이 때,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화성의숙(華成義塾)·동명의숙(東明義塾)을 세워 혁명간부양성에 힘쓰는 한편, 잡지 '전후'와 '대동민보'(大東民報)를 발행하여 재만한인(在滿韓人)계몽에 진력하였다. 1926년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결성하여 정의부의 무장투쟁을 지원하였다.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국무위원회에서 주석으로 선출되어 1935년까지 재임하였다. 1938년 정쑤성(江蘇省)에서 병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인터넷 검색 종합>.

● 純宗, 일본 천황의 병합 축하 조서를 받으며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아
● 嚴妃, 일본에 볼모로 잡힌 영친왕을 귀국시키려 데라우치 총독과 설전…영친왕은 장티푸스로 사망한 어머니 엄비(嚴妃)를 못 보고 일본행
● 高宗과 純宗, '不忠이 극에 달했다'며 李完用을 자주 경멸
● 高宗의 국장은 일본 신도(神道) 식으로 거행…한국인 조문객은 70여명에 불과
● 친일파 윤덕영, 고종을 47세 노처녀와 강제 결혼시켜



1905년 일제의 고종태황제 납치시도 보여주는 두 가지 외교문서


'러일전쟁' 중에 일제가 고종태황제를 '나가사키'로 납치하려 했다는 내용을 담은 독일의 기밀외교문서 2건이 7월 12일 공개되었다. <코리아헤럴드/자세히보기>


①위 이미지는 1905년 2월에 작성돼 독일 본국으로 전송된 서울주재 독일공사(German Envoy) 콘라트 폰 잘데른(Conrad von Saldern)의 기밀 전보이다. '일본인들이 고종을 일본으로 데려가려고 한다. 고종은 거절하였고, 다시는 귀국할 수 없을 것이라고 근심하였다.' (he Japanese are trying to transfer Gojong to Japan. Gojong refused, worried that he would not be able to come back.)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한겨례/독일 공사 콘라트 폰 잘데른의 보고가 담긴 외교문서/자세히보기>.



②위 이미지는 비엔나 주재 러시아 공사 레프 우르소프(Lev Urusov)가 1905년 4월 3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외무장관 아게노르 골로쵸프스키(Agenor Goluchowski)에게 보낸 서신의 사본이다. 밑줄친 부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본 외무부는 최근에 한 신뢰하는 정보원을 통하여, 미카도(일본 황제) 정부가 한국의 황제를 일본으로 납치하여, 나가사키 안에 한 궁전을 지어줄 의도를 알아냈습니다.' (The foreign ministry has recently recognized, from a reliable source, that the Mikado government had the intention to transfer the Emperor of Korea to Japan and install him at a palace built for this purpose in Nagasaki.)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을 맺기 훨씬 이전부터 나라는 완전히 결단나고 있었다.

1884년 겨울에 서울에 와서 고종태황제를 처음으로 가까이서 보았고, 최초로 고종태황제의 어진을 촬영한 외교관이자 천문학자인 미국인 퍼시발 로웰(Percival Lowell)은 이렇게 그의 인상을 묘사했었다:

    그의 얼굴은 뛰어나게 부드러워 보였다. 그것은 첫눈에 호감을 갖게 하는 그런 얼굴이었다. (His face was singularly pleasing, ㅡ one of those faces that  you like from the moment you first see it.)

    <Percival Lowell, 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A Sketch Of Korea, Boston:Tickner & Co., 1886, p.159>


한 마디로 사람은 좋지만 매우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 같았다는 것이다. 황태자 시절의 순종에 대해서는 또 이렇게 말했다:

    그가 나를 접견했을 때 두 대신이 그의 양옆에 서 있었다. 그리고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 할 때마다 대신들이 허리를 굽히고 그의 귀에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가를 속삭여 주곤 했다. 그러면 그는 동상처럼 무표정하게 서 있다 앳된 목소리로 대신들이 속삭여 주는 말을 그대로 따라 외우는 것이었다.


1883년 5월 미국 특명전권공사 푸트가 한국으로 부임하자, 그해 7월 고종은 미국으로 '보빙사'(報聘使:답례사절)를 파견한다. 보빙사 전권대신에 임명된 인물은 24세 청년 민영익(閔泳翊/1860-1914)이었다. 한국이 서양으로 파견한 최초의 외교사절단 수반에 쟁쟁한 고관들을 제치고, 약관을 갓 넘긴 청년이 선임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민영익은 1860년 민태호(閔台鎬/1834-1884)의 독자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7대조 민유중(閔維重)의 딸이 숙종 계비로 책봉되면서(MBC 드라마 '동이/同伊'에서 '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폐비로 몰렸다가 훗날 복위됨)로 나옴) 중앙 정계의 핵심 세력으로 떠올랐지만, 고조부가 예조판서를 지낸 이후로는 권력에서 점차 소외되었다. (자세히보기). 민영익이 태어났을 때, 민태호는 동생 민규호(閔奎鎬/1836-1878)의 집에 얹혀살면서 콩죽으로 간신히 연명하는 처지였다.

민영익의 집안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그가 7세 되던 해인 1866년 민치록(閔致祿/1799-1858)의 딸(민자영/閔玆暎)이 고종의 왕비로 책봉되면서부터였다. 민왕후 책봉 이전 몇 안 되는 과거 합격자였던 그의 숙부 민규호는 일약 권력의 핵심으로 떠올랐고, 1870년 그의 부친도 과거에 합격해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민영익이 15세 되던 해, '민왕후'의 양오빠 민승호(閔升鎬/1830-1874)가 집으로 배달된 의문의 소포가 폭발해 사망했다. 민승호는 민치구(閔致閔致久/1795-1874)의 아들로 태어나 민치록에게 입양된 민왕후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민씨 척족의 수장으로 세도를 부리던 민승호가 폭사하자, 민씨 일족들은 자신의 아들을 민승호의 사후 양자로 세우기 위해 각축을 벌였다. 하지만 민왕후는 양오빠의 사후 양자로 민영익을 일찌감치 점지해둔 상태였다. 민태호는 아무리 일가라지만 하나뿐인 아들을 양자로 줄 수 없다고 버텼지만, 동생(민규호)과 민왕후의 거듭된 설득으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민태호는 품에서 아들을 잃은 대신 권세를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민왕후는 친정아버지의 제사를 받드는 유일한 혈육인 민영익을 끔찍이 아꼈다. 촌수로는 조카였지만, 나이 차이가 9세 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친동생처럼 대했다. 민영익은 민왕후의 후광을 업고 18세에 과거에 급제해, 이듬해 이조참의(정3품)에 제수되는 등 파격적으로 승진했다. 불과 약관의 나이에 병권, 재정권, 외교권을 장악해 명실상부한 민씨 척족의 수장이자 조정의 최고 실력자로 등극했던 것이다. <인터넷검색정리>.


◆1883년 9월 2일, 미국에 도착한 조선의 첫 외교사절 보빙사 일행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부터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종사관 서광범, 미국인 로웰.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자세히보기>.


1883년 7월, 고종태황제가 미국으로 보빙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자, 민왕후 척족과 개화파가 한목소리로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추천했다. 민영익은 외교의 실질적 수반이었던 데다 일본과 청국에 다녀온 경험이 있었다. 부대신에는 현직 영의정의 아들 홍영식, 종사관에 서광범, 수행원에 유길준, 최경석, 변수, 고영철, 현흥택, 통역으로 중국인 우리탕(吳禮堂)이 임명되었다.

중국인 우리탕은 미국 유학을 다녀온 후 '묄렌도르프'에게 발탁돼 조선해관 총세무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우리탕이 영어를 중국어로 옮기면, 고영철이 중국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식으로 이중 통역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리탕의 영어 실력이 신통치 않아 중국어를 매개로 한 이중 통역은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제물포항을 출발한 보빙사 일행은 일본에 들러 한 달간 머물렀다.

그동안
일본 주재 미국공사의 주선으로 미국인 로웰을 참찬관 및 고문으로 고용했다. 보빙사 내 서열은 서광범과 유길준 사이인 네 번째였다. 로웰은 조선정부에 고용된 최초의 미국인이었다.

보스턴 명문가 출신인 로웰은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1880년부터 일본에 머물면서 여행과 저술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의 형은 하버드 대학 총장이었고, 동생은 저명한 여류시인이었다. 로웰은 일본어를 조금 구사할 줄 알았고, 개인비서 미야오카(宮岡恒次郞)가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해 보빙사 일행의 통역은 주로 일본어를 매개로 한 이중 통역으로 이루어졌다. 1883년 9월 2일, 4개 국적 11명으로 구성된 보빙사 일행을 태운 태평양 횡단 여객선 '아라빅號'(Arabic)가 샌프란시스코항에 도착했다.
<자세히보기>.

'한국으로 귀국한 '보빙사' 일행 중 홍영식이 로웰의 노고를 고종태황제에게 보고하였으며, 고종태황제는 그를 국빈으로 초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왕실의 초대에 힘입어 로웰은 1883년 12월 20일 다시 한국을 방문하였다.

   

◆1883년 로웰이 고종태황제(31세/1852-1919)의 초청을 받고 3개월간 체류하면서 촬영한 최초 어진(御眞). (화중광야제공)

 

◆'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표지 (위기키미디어제공). 한글번역: '내 기억 속의 조선, 조선인들'(조경철 옮김)

 

◆퍼시발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의 하바드대학생 시절(1872- 1876년). 7년후 28세에 한국을 방문. (화중광야제공)


위 고종태황제의 어진과 로웰 사진은 '화중광야'가 소장하고 있는 <Louise Leonard, Percival Lowell: An Afterglow, Boston:The Gorham Press, 1921, p.10, 25>에서 각각 전재한 것임.


로웰은 한국에서 약 3개월간 체류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서울에 머무르면서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 등을 백과사전 형식으로 자세히 기록하였다. 2년 뒤 1885년, 그는 이 기록을 정리하여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이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이 책에서 로웰은 풍물을 기록하는 것 외에도, 최초로 촬영한 고종태황제의 어진(御眞)을 포함한 당시의 조선 풍경을 찍은 사진 25매를 남겼다.

1910.8.22 ㅡ 한일병합조약 조인 ㅡ 대한제국(大韓帝國) 최후의 날


일본제국의 한국병탄은 야마가타 아리토모ㅡ가츠라 다ㅡ데라우치 마사다케ㅡ고무라 쥬타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 이토 히로부미ㅡ하야시 곤스케ㅡ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끄는 한국의 통감부와 주둔군.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ㅡ스기야마 시게마루ㅡ다케다 한시를 핵심으로 한 대륙 '사무라이들'(낭인들)의 합작품이었다!!


1910년 8월 22일도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이날 오후 1시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의 흥복헌(興福軒)에서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가 대신들과 함께 어전회의를 열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어전회의였다.

한참 동안 더위에 눌린 듯 침묵이 흐른 다음, 순종효황제는 다음과 같은 조칙(詔勅)을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 내렸다:

    짐은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일 양국의 친밀한 관계로써 서로 합하여 일가가 됨은 서로 만세(萬歲)의 행복을 도모하는 소이로 생각하고 이에 한국의 통치를 통틀어 짐이 매우 신뢰하는 대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도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어 순종효황제는 전권을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일임할 테니, 통감 데라우치를 만나도록 하라고 일렀다. 그러는 동안 대신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궁중에서 물러난 이완용은 오후 4시에 데라우치 통감을 만나서 다음과 같은 조약문서에 조인하였다: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는 두 나라 사이의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상호 행복을 증진시키며 동양의 평화를 영구히 확보하자고 하며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한국을 일본국에 합병하는 것이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이에 두 나라 사이에 합병 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한국 황제 폐하는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을, 일본 황제 폐하는 통감(統監)인 자작(子爵)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각각 그 전권 위원(全權委員)으로 임명하는 동시에 위의 전권 위원들이 공동으로 협의하여 아래에 적은 모든 조항들을 협정하게 한다.

    1.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준다.

    2.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항에 기재된 넘겨준다고 지적한 것을 수락하는 동시에 완전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3.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황후, 황비 및 후손들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서 적당한 존칭, 위신과 명예를 받도록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연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4.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의 조항 이외에 한국의 황족(皇族) 및 후손에 대하여 각각 상당한 명예와 대우를 받게 하는 동시에 이것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줄 것을 약속한다.

    5. 일본국 황제 폐하는 공로가 있는 한국인으로서 특별히 표창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경우에 대하여 영예 작위를 주는 동시에 은금(恩金)을 준다.

    6. 일본국 정부는 앞에 지적된 병합의 결과 전 한국의 통치를 담당하며 이 땅에서 시행할 법규를 준수하는 한국인의 신변과 재산에 대하여 충분히 보호해주는 동시에 그 복리의 증진을 도모한다.

    7. 일본국 정부는 성의있게 충실히 새 제도를 존중하는 한국인으로서 상당한 자격이 있는 자를 사정이 허락하는 범위에서 한국에 있는 제국(帝國)의 관리에 등용한다.

    8. 본 조약은 한국 황제 폐하와 일본국 황제 폐하의 결재를 받을 것이니 공포하는 날로부터 이 조약을 실행한다. 이상의 증거로써 두 전권 위원은 본 조약에 이름을 쓰고 조인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날은 이처럼 어이없이 저물어갔다.

그러나 나라가 망한 것은 이때가 아니었다. 1907년의 정미(丁未) 신조약으로 사법권과 행정인사권을 넘겨줬을 때, 우리는 이미 국권을 상실하고 있었다. 더 정확히는 1905년 11월의 을사늑약을 맺기 훨씬 이전부터 나라는 완전히 결단나고 있었다.

우리는 망국의 모든 책임이 마치 이완용을 비롯한 이른바 매국의 오적(五賊)에게만 있는 듯이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매국이 분명하다면 그들을 대신으로 만든 임명권자의 책임 또한 왜 묻지 않는 것일까? 일각에서는 고종태황제의 '무능함'을 성토한다.

그리고 어린 황태자도 그때 20대의 황제폐하가 되었다. 조금이라도 기골이 있었다면 마지막 몸부림이라도 칠 수는 있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역사책은 '순진하고 무기력한 순종이 매국의 대신들에게 놀아났다.'고만 적고 있다.

그 뒤에는 비록 퇴위한 다음이라 해도 고종이 있었다. 그러나 태황제(太皇帝)라는 어마어마한 칭호를 갖고 있던 고종태황제도 '병합은 천명(天命)이다. 지금은 어떻게도 할 수가 없도다.'며 탄식만 하고 있었다. 물론 고종태황제로서도 별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만약에 반세기 가까이나 왕위(王位)에 있던 그가 좀 더 영특한 임금이었다면, 나라의 운명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을사늑약 체결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도, 기진한 고종태황제는 그냥 궁내부대신 이재극(李載克)에게 '정부대신들과 잘 협의하라고' 분부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완용이나 두 임금 모두가 병합에 따르는 황실의 예우 문제와 친일 고관대작들의 처우에 대해서만 일본측과 흥정을 했을 뿐 만백성의 운명을 걱정하는 말은 없었다고 전한다. 우리의 불행은 이완용과 같은 매국의 대신들을 가지고 있었던 데 국한되지 않는다. 고종태황제, 순종효황제와 같은 무능한 최고 권력자를 모셔야 했다는 것이 우리의 다시 없는 불행이었다.

민영환(閔泳煥)으로 하여금 자결케 만든 것도 '충언(忠言)이 무익(無益)하며 상소(上疏)가 불용(不容)'이라는 절망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직접 국민 앞으로 유서를 썼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국민에 대한 채찍이기도 했다.

최린(崔麟)의 일기를 보면, 대한제국이 사라진다고 공포된 날에도 종로의 상인들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문을 열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겠다며 일제와 싸운 열사, 투사들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러나 일본에 예속되어 버린 친일파는 이들보다 몇 곱 더 많았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됐을 당시의 군대란 군악대(軍樂隊) 2백 명을 합쳐서, 서울에 5천명 지방에 2천명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그나마 몇 달씩 급료를 받지도 못하고 총탄이며 화약도 없었다. 그것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나라의 군대가 아니었다.

이처럼 우리가 너무나도 만만했으니까 일본이 감히 남의 나라를 제멋대로 삼켜먹겠다는 야욕을 가질 수가 있었다. 통치자의 뛰어난 지도력과 드높은 국민의식과, 그리고 강력한 국방력이란 나라를 지탱하는 세 개의 기둥이다. 그 세 개 중 어느 하나도 없던 대한제국의 운명에서...우리는 쓰라린 지난 날의 굴욕의 역사를 다시 배워야 할 것이다.


한편, 한일병탄이 성사된 8월 29일 일본의 '우치다 료헤이'는 이 날의 기쁨을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다:

    한의(韓衣)는 일본 옷으로 변하고
    오늘부터 압록강에서 목욕하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의 그림자를
    우러러 보리라.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1874-1937)는 20세기 초반 일본 우익의 거두 '도야마 미츠루'의 제자이다. 이들이 세운 '현양사'(玄洋社/겐요사)와 '흑룡회'(黑龍會)라는 정치단체는 그들의 국가주의를 아시아로 확장하는 기반이 됐다. <자세히보기>. 우치다 료헤이는 일본의 국가주의자, 우익운동가, 아시아주의자이다. 10-0년 대아시아주의와 천황주의를 표방하고, 흑룡회를 설립하였고, '천우협'(天佑俠)을 통해 이용구(李容九)와 결탁하여 '일진회'(一進會)를 움직여 '한일병합청원운동'을 일으켰다. 이용구는 1868년 경북 상주의 양반가문에서 났다. 12세 때 동학 교주 최시형의 문하로 들어갔다. 동학운동이 일어나자 전봉준의 참모로 참여했다. 공주 전투에서 일본토벌군과 싸우다가 오른쪽 발에 관통 총상을 입었다. 러일 세력이 각축하자 이용구는 지난날의 적 일본 편으로 기울었다. 반일(反日)의 손병희와 헤어져 송병준과 함께 일진회를 조직했다. 이용구를 친일로 돌리는 데 큰 영향을 준 것은 '다루이 도키치'(樽井藤吉)가 쓴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이었다. [호국스페셜 제1부] <되살아 난 한반도 강제병탄> (자세히보기).

◆현해탄을 넘나들며 한국병탄의 중심에 섰던 대륙 '사무라이'(낭인) 그룹 흑룡회 주역들, 왼쪽부터 우치다 료헤이, 이노우에 도사부로(井上藤三郞), 다케다 한시, 요시쿠라 오세이, 구주 요시히사(葛生能久).

'흑룡회'는 1901년 2월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의 '사무라이'(낭인) 집단인 '천우협' 소속의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요시쿠라 오세이'(吉倉汪聖), '타케다 한지'(武田範之) 등이 일본의 대외침략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만주·시베리아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무라이들'(낭인들)을 규합하여 조직하였다. '흑룡회'는 '대로개전론'(對露開戰論)을 열렬히 주창하는 한편, '한국병탄론'(韓國倂呑論)을 더욱 발전시켜 이른바 대아시아주의를 제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흑룡회 '사무라이들'은 한국강점을 위한 본격적인 이면작업에 들어가 그들이 수집한 정보와 책략 등을 일본 군벌 '야마가타'(山縣有朋)와, 수상인 '가쓰라'(桂太郎/1907년 '태프트ㅡ카쓰라 밀약' 주도), 육군대신 '데라우치'(寺內正毅/1910년 한일병탄조약의 주도자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죽인 장본인)에게 보고하여 즉각적인 한국강점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전국 각처에서 밀정 노릇을 하고 있던 '사무라이들'을 통해 민심의 동태, 현지사정, 지형 등을 정탐하는 동시에, 친일단체인 '일진회'를 조정하면서 '한일병탄'을 추진하였다.

'이토 히로부미'(伊騰博文)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장군에게 사살되자, 12월 4일 일진회 회원 100만 명의 이름으로 '다케다 한지'가 작성한 '병합에 관한 상주문 및 청원서'를 제출하고, 아울러 '한국인의 요청에 의한 합법적인 병탄'이라고 주장하면서, 즉각적인 병탄론의 여론을 일으켰다. 일제강점 후 '흑룡회'는 그 '공로'로 일본 우익의 대표적인 존재로 부상하였다. 한국강점 후 이들은 침략의 대상을 만주로 옮겼고,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 및 만주 등지에서도 독립운동 방해공작 및 한국인 학살에 깊이 관여하였다. 이들의 파쇼적 침략운동은 1930년대를 거쳐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국가적 차원의 파쇼 정책에 편입되었고, 초기의 목표였던 러시아에서 유럽과 미국은 물론, 에티오피아, 터키, 모로코, 동남아시아와 남아메리카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혔다. 그러던 중 '흑룡회'는 1946년에 미국 점령 당국의 명령으로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으나, 1961년, '우치다 료헤이' 작고 25주년제를 계기로 하여,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의 사상을 계승하고 보급한다'는 취지 하에 '다이토주쿠'(大東塾) 숙장 '가게야마 마사하루'(影山 正治/1910-1979)등을 제창자로 하여 '흑룡구락부'(黑龍俱樂部)가 재결성되어 '흑룡회'의 계보를 이어 왔다. 1973년 가게야마(63세)는 한국에 여행을 다녀간 적이 있으며(8.10-8.17), 1979년 5월 25일 69세를 일기로 자결하였다.

 

다이토주쿠는 1939년 4월 3일 가게야마 마사하루가 중심이 되어 결성된 일본의 우익 단체이다. 가게야마가 주도한 전국조직 '후지가도회'(不二歌道會)와 함께 묶여 '다이토주쿠-후지가도회'(大東塾・不二歌道會)로 알려져 있다. 대외적인 활동은 활발하지 않았으나, 월간지 '不二'를 발간하였고(위사진 오른쪽), 우익계와 정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히 컸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세히보기>.


다음은 1945년 일본이 패망하기 이전 '흑룡회'의 '명성황후살해'에 관여를 증거해준다:

    [暗殺朝鮮王妃]

    三浦梧樓到任後,便與朝鮮王宮內反對閔妃的'反後黨'取得聯繫,並秘密策劃,做好刺殺閔妃的準備。

    1895年10月8日,三浦梧樓暗中與朝鮮禁衛軍中的日本軍官約定,由他們留下入宮的門路,並在必要時將朝鮮禁衛軍阻于宮外。

    當天夜裏,40余名浪人突然沖進王宮的內室,閔妃的貼身侍衛沒來得及反抗,就被他們砍倒。浪人們將閔妃亂劍刺死後,並未就此罷手,他們接著將閔妃的侍女一齊殺死,然後把所有滿是刀傷劍痕的屍體拖至庭院中,澆上汽油,焚屍滅跡。

    這次暗殺閔妃的行動進行得很順利。但是三浦梧樓的妄為,使日本受到許多國家的責難,日本政府不得不將他召回國受審。

    刺殺閔妃的浪人,大多是玄洋社和紫冥會的成員。他們都是反對大隈條約修改案,主張侵佔朝鮮的人。他們的結局是和三浦梧樓住進了廣島監獄。

    <http://tw.myblog.yahoo.com/leuter8/article?mid=5488>

    <번역 작업중...>


위 글에서, 왕궁의 내실을 침입한 40여명의 '사무라이들' 중 대다수가 '현양사'(玄洋社) 회원이라는 증거이다. 이 진실은 방송 다큐멘터리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20세기 초반 일본 우익의 거두 도야마 미츠루(가운데 지팡이 든 자)와 그의 제자 우치다 료헤이(바로 왼쪽). 이들이 세운 '현양사'(겐요사)와 '흑룡회'라는 정치단체는 그들의 국가주의를 아시아로 확장하는 기반이 됐다. (KBS영상캡쳐/2007.8.18 방영). [日극우단체 흑룡회가 다보탑 본떠 세워 '한국민 자발적 합병' 거짓 선전도구 활용] <조선닷컴/자세히보기>.



다른 한편, 1910년 8월 3일 일본이 조선을 합방한다는 '합방령'(合邦令)이 전북 남원 군청을 거쳐 마을로 하달되자, 매천 황현(黃玹/1855-1910)은 8월 29일 한일병합체결을 통탄하였고, 9월 10일 칠언절구 4수를 남기고 아편을 먹고 음독자살했다. 그 중에 하나는 다음과 같다:

    鳥獸哀鳴海嶽嚬(새 짐승도 슬피 울고 바다와 큰 산도 찡그리고)
    槿花世界己沈淪(무궁화 이 나라 이젠 망했구나)
    秋燈俺卷懷天古(가을 등불 아래서 책 덮고 지난 역사를 생각해보니)
    難作人間識字人(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이 절명시(絶命詩)는 글자나 아는 사람, 즉 지식인의 책무가 얼마나 무거운 지를 통절히 읊어준 시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역사의식도 느끼지 않으며 살아가는 일반인들처럼 글을 몰랐다면 왜 죽을 이유가 있겠는가.

옛 성현들의 글을 읽어 인생이 무엇이고 역사와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나라가 위기를 당해서 괴롭고 아프다는 내용이 가슴을 떨리게 해주고 있다.
이 절명시는 지식인이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책무가 얼마나 무거운 지를 통절(痛切)히 읊어준 시다. 우리 조상들은 인생이 무엇이고 역사와 세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나라가 위기를 당해서 괴로워하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그 위기를 이겨냈던 것이 아닌가.

매천은 1862년(철종 13년)에 전남 광양군 봉강면 서석촌에서 태어나, 1888년(고종 25)에 생원시에 장원했으나 세상이 어지러운 것을 보고 구례 만수동(萬壽洞)에 은거했다. 성품이 강직해 불의를 참지 못했다 한다. 이러한 성품은 조상 중에 중시조인 황희(黃喜)의 청백리 정신, 임진·병자란 때 외적과 싸운 황진(黃進)·황위(黃暐)의 애국정신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더구나 동생 황원(黃瑗)도 1944년 2월 27일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역시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 형제가 사대부의 사기(士氣)를 살리기 위해 자결한 것이다. 국가에서는 많은 사대부를 양성했으나 나라가 망하는데도 항거하는 사람이 적었다. 이런 때에 국록도 먹지 않은 황현 형제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항거했다는 것은 지식인의 귀감이 될 만하다.

 
◆김규진이 1909년에 촬영한 황현의 자살 1년전의 모습이다.  

◆황현이 47년간 초야에 묻혀서 기록한 구한말의 역사서 '매천야록'(총6권 7책)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선언되던 날, 과연 한국의 민초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번역본이 입수 되는대로 정독할 것이다.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을 기록한 구한말의 참다운 애국자였다. '매천야록'은 1864년(고종 원년)부터 1910년(순종 4년)까지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기록한 책이다. 조선 말기의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의 상황들을 사실을 토대로 솔직하고 자세하게 편년체로 기록하였다. 유려한 문체와 다양하고 풍부한 내용,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예리한 눈과 비판정신 등 황현의 올곧은 선비정신과 높은 학문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걸작이다. 총 6권에 7책으로 되어 있다. 이에 관한 것은 차후에 기회가 주어지면, 별도의 주제에서 다루고자 한다!!


시비(是非)의 전도야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냐 마는, 소인배들의 발호(跋扈)가 그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냐 마는, 하루도 쉬지 않는 극심한 '이념가치'(보수,진보,중도) 전도와 붕괴를 보니, 오늘따라 가슴이 먹먹하구나...*발호(跋扈/세력이 강하면 제멋대로 날뛰므로 제어(制御)하기 힘듦을 이르는 말) 권력이란 영원치 못한데, 요즈음 우리나라 국기(國基)가 왠지 심상치 않게 흔들리고 있는 것 같다. 소인배들 제 아무리 갈아 치운들...중심인 권력자가 변화하지 않는 한, 나라는 좌불안석(坐不安席)일 것이다. 어째, 우리의 앞날이 이리도 어둘까...'여보시요, 주인장, 거기 빈 방하나 없소?'


[맺으면서] 1910년 8월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사이에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제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같은 해 8월 한일외국인고문용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 1905년 11월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정미칠조약), 1909년 7월 기유각서 등 일련의 조약들을 차례로 체결했다. 그밖에도 한국군에 대해 군대해산을 단행하고 신문지법·보안법 등을 제정했으며, 1910년 3월에는 토지조사국을 설치해 토지약탈을 준비했다. 이런 조치들은 실질적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치밀한 준비 작업이었다. 1910년 5월 30일 데라우치가 3대 통감에 취임하면서 한일합병은 급속도로 추진되었다. 같은 해 8월 16일 데라우치는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통보했다. 8월 18일 한국정부 각의에서 합병조약안이 통과되었으며, 8월 22일 마침내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일제는 반발을 우려해 이를 한동안 비밀에 부치다가 29일에야 조인 사실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대치되고 데라우치가 초대 총독에 부임했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 건국 27대 519년 만에, 대한제국 성립 14년 만에 병합형식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일본정부는 '한국은 이후 조선이라고 칭'하고, '조선에 총독부를 설치'한다는 칙령을 동시에 발표했다. 이로써 독립 한국의 역사는 중단되었고, 36년의 식민지 통치와 항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치욕의 만화 한 컷]

위 오른쪽 만화는 한일병합과 인연이 깊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이토가 저승에서 만났다. 정한론(征韓論)의 창시자인 사이고에게 한국병탄을 완성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토가 조선을 상징하는 닭을 저승에서 사이고에게 선물로 전달하는 그림이다. <'한국병합완성'(韓國倂合完成) ㅡ '日本及日本人'(1910.8.29 발행)>. 필자가 이미 밝혔듯이, 사이고는 자신의 전투에서 정체불병의 '십자가기'를 사용한 장본인이다. 그의 배후 세력은 어느 '비밀결사'였는가?? [필독관련자료/호국스페셜 제1부] <역사기록에는 '만약'(If)이란 존재하지 않는다/자세히보기>.


[역사적 사실] 일본제국의 한국병탄은 야마가타 아리토모ㅡ가츠라 다ㅡ데라우치 마사다케ㅡ고무라 쥬타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정부. 이토 히로부미ㅡ하야시 곤스케ㅡ하세가와 요시미치가 이끄는 한국의 통감부와 주둔군. 그리고 우치다 료헤이ㅡ스기야마 시게마루ㅡ다케다 한시를 핵심으로 한 대륙 '사무라이들'(낭인들)의 합작품이었다!!

[역사적 진실] 그러나 이 모든 '역사적 사실'로서의 '한국식민지화'의 그 합작품 배후로서의 '실세'(實勢)에는 일본의 한국지배를 국제적으로 용인한 1905년의 '태프트-가쓰라 밀약'에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깊숙히 개입했다는 '역사적 진실'이 존재하였으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벌일 1904년 당시 일본의 전쟁 비용(약 7억엔/현재 14조원 상당)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의 사업가들(앤드류 카네기의 철강회사, 제이피 모건 등 미 대기업가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밝혀졌다. <자세히보기>. 그리고 이들의 배후에는 '국제유태자본'이 도사리고 있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말이다...여기서 한 가지 부끄러운 '역사적 진실'이 밝혀졌다. 일본의 '한국식민지화'에 앞장섰던 '공신들'(?)에게 '일왕의 은사금'(국제유태자본?)이 지급되었다는 것이다...

◆이완용, 이지용, 송병준(왼쪽부터). 이들에게 한일병탄의 공로로 거금의 은사금(恩賜金·임금이나 상전이 내려준 돈)이 주어졌다는데...이들의 인상들을 잘 기억해두자!! <국민일보/자세히보기>.


그러기에 이 밤이 지나고 내일이 오면, 또 어떠한 숨겨진 '역사적 사실'과 '역사적 진실'이 밝히 드러날지 그 어느 누구도 모르기에...다만 그 펼쳐질, 곧 하나님의 '카이로스' 역사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크로노스' 주권시간에로 옮겨질, 하나의 새로운 미래적 실재로서 그 역사가 펼쳐질 곳을 간구해본다...'여보시요, 주인장, 거기 빈 방하나 없소?'

    '어둠 속에 앉은 그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리고 죽음의 그 땅과 그늘 속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The people which sat in darkness saw great light; and to them which sat in the region and shadow of death light is sprung up.) (마태복음 4:16, KJV화중광야역)


'주 하나님, 이 땅의 온가지 숨겨져 온 그 어둠을 밝히 드러내실 줄 믿습니다. 아멘!!'
(2010.7.14/밤/정재선)



[필독관련자료]

1. 문서 변조되고 날인도 없었다 (이태진 교수 기고 '한·일 병합 조약이 왜 무효인가'[上]/국왕·대신들에 군사적 위협 가해 강제하기도)
<시사저널(2010.5.26)/자세히보기>

2.  황제의 서명까지 위조했다 (이태진 교수 기고 '한일병합조약이 왜 무효인가'/'한일 의정서'와 달리 같은 필체·끈 사용)
<시사저널(2010.6.3)/자세히보기>


<Created/20100521> <Mpdified/20100531><20200603> <Updated/20100715>

이 게시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