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작곡/ 정재선 ㅡ 채보/ 안연숙 ㅡ 편곡ㆍ연주/ 정동윤


[Dembo's Unforgettable Essay ㅡ SamPaRam]
[삼파람 ㅡ 山은 오를수록 높으이 江은 건널수록 깊으이] 국가사회에 영향력을 크게 행사한 지도자들은 자랑 일변도의 '자서전'보다는 '참회록'을 남겨 후대 사람들이 본보기로 삼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4] 19세기 일본어 사투리 '켄토' ㅡ '하지만...'

시대가 '영웅'을 낳는다고 했던가...?

일본 유신회천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
수 일 전에 끝내 일본이 세계 경제 2위 자리를 중국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일본 ㅡ 영웅 료마의 부활을 염원하나?

글/ 정재선 목회자



[일본의 무사도정신]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에도시대(江戶時代)에서 메이지시대(明治時代)로의 이른바 유신회천(維新回天)의 풍운아다. 일본이 쇄국 정책을 행하면서 우라가(浦賀/현 카나가와현 쿠리하마)에 쿠로후네(黑船/서양 배)가 내항한 후부터 막부(정부를 집행하던 곳)가 점점 약체화되어 간 시대였다. 당시 막부로부터 감시의 대상으로 몰려있으면서 견원지간이었던 사츠마번(薩摩藩/현 카고시마현)과 조슈번(長州藩/현 야마구치현) 사이에 들어 '삿초동맹'(薩長同盟)을 체결시키며,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된 사람이 바로 '사카모토 료마'인 것이다.

◆(왼쪽사진/영상캡쳐)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에서 료마(후쿠야마 마사하루/福山雅治 분)이 고향 토사번을 탈출하여 보다 너른 세계로 향하고 있다. (오른쪽사진/高知県立坂本龍馬記念館제공) 우리에게 낯익은 료마의 사진이다. 이 사진을 찍은 때 1867년 11월 15일에 암살당하였다. 그의 나이 33세였다. 왜 그를 죽였을까...?? 누가 그를 죽였을까...??

坂本龍馬・岩崎弥太郎の生涯】 <자세히보기>

天保6年(1835年)1歳 11月15日 郷士坂本八平の次男として龍馬誕生。
弘化3年(1846年)12歳 龍馬の母、幸49歳 で亡くなる。
嘉永元年(1848年)14歳 龍馬、小栗流日根野弁治道場に入門。
嘉永6年(1853年)19歳 龍馬、武芸修行のため江戸に。北辰一刀流千葉定吉道場に入門。ペリー来航を目撃する。
安政元年(1854年)20歳 龍馬、土佐へ帰国。河田小龍から海外事情を聞く。岩崎弥太郎21歳 、江戸へ上る。
安政2年(1855年)21歳 龍馬の父、八平59歳 で亡くなる。弥太郎、父の入牢を聞き帰郷。
安政3年(1856年)22歳 龍馬、剣術修行のため再び江戸へ。
安政5年(1858年)24歳 日米修好通商条約締結。
安政6年(1859年)弥太郎、吉田東洋の推挙で、下横目になり、長崎へ。
文久元年(1861年)27歳 龍馬、武市瑞山率いる土佐勤王党に加盟する。
文久2年(1862年)28歳 3月24日 龍馬、沢村惣之丞と脱藩する。弥太郎、吉田東洋暗殺の下手人探しに大阪へ。材木商への転身を図るも失敗。龍馬、勝海舟を訪ね、門弟となる。
文久3年(1863年)29歳 龍馬、勝海舟の海軍塾の塾頭となる。
元治元年(1864年)30歳 龍馬、国元召還の延期が認められず、再び脱藩。蝦夷地開拓を計画。幕府、神戸海軍操練所を建設。第一次長州征伐。龍馬、楢崎龍と出会う。弥太郎、郷里で農作業に従事する失意の日々。
慶応元年(1865年)31歳 神戸海軍操練所、廃止される。龍馬らは薩摩へ。亀山社中発足。長州藩のために武器購入。
慶応2年(1866年)32歳 龍馬の立会いで薩長同盟成立。龍馬と三吉慎蔵、寺田屋で襲撃される。お龍とともに、鹿児島、霧島などで療養する。第二次長州征伐。
慶応3年(1867年)33歳 龍馬、後藤象二郎と面談。海援隊結成。弥太郎、土佐商会主任として長崎赴任。
海援隊いろは丸が紀州藩明光丸と衝突、沈没。紀州藩が賠償金8万3千両を支払うことで決着。「船中八策」を作成する。大政奉還をめざす薩土盟約締結。徳川慶喜、大政奉還。
11月15日 龍馬、近江屋で暗殺される。
明治6年(1873年)弥太郎、「三菱商会」設立。


요즘 일본 NHK대하드라마 '료마전'(龍馬伝)을 보고 있다. 2010년 1월 3일 첫 방영한 역시나 지극히 일본스럽게 호화스럽고 디테일한 드라마이다. 특히 일본의 드라마 경우, 고증이 잘못되면 호된 비난을 받는 풍조로 볼 때, 일본을 대변한다는 공영방송이 지나간 역사의 발자취에 대한 고증을 성실하게 하였을 것을 염두에 둔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坂山龍馬) 역의 '후쿠야마 마사하루'(福山雅治)나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彌太郞) 역의 '카가와 테루유키'(香川照之), '카츠 카이슈'(勝海舟) 역의 '타케다 테 야나'(武田鐵矢)는 필자로서는 처음 만나는 일본 배우들이다. 필자가 본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주인공 '료마' 때문이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유독 눈에 들어오는 대사가 있다.

'닛뽄진쟈!!'

도대체 료마는 뭐한다고 그리 '일본인'을 강조하는지...료마만이 아니다. 카츠 카이슈, 요시다 쇼요 등 당대의 인물이라면 하나같이 '일본인'을 입에 달고 다닌다.

'일본인이니까!!'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10년 이상 체류했다는 '존 만지로'에게 '사카모토 료마'가 왜 그렇게 미국이 좋은 나라면 굳이 일본으로 돌아왔느냐고 묻자, 존 만지로가 하는 대답이다: '도대체 일본인이 뭐라고?'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대단한 것이었다. 이전까지 일본이라는 나라는 없었다. 일본인이라는 국민도 없었다. 토사인(土佐人)이고, 마츠마에인(松前人)이고, 아이즈인(會津人)이고, 미토인(水戶人)이었다. 큐슈인(九州人)이고, 에도인(江戶人)이었다. 천황이 있는지 조차 몰랐고 일본이 뭔지도 몰랐다. 그나마 쇼군(將軍)은 번주(藩主) 위에 있다고 하니 조금 멀게나마 의식하고 있었을까?

그것을 '일본인이라는 단일한 정체성'으로 묶은 것이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었다. 천황 아래 일본을 하나로 뭉치게 한 것이 '존왕양이'(尊王攘夷/そんのうじょうい/손노조이/천황을 지지하고, 서구 열강은 배척할 것을 주장)였고, 막부를 타도함으로써 일본은 비로소 중세를 벗어나 근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1854년 미국의 흑선(黑船)이 일본 해상에 닻을 내리자, 일본은 그야말로 '좌충우돌'의 회오리가 밀려오고 있었다. 이 흑선을 이끌고 일본에 도착한 선장 '페리' 제독은 바로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무능한 막부로서는 더 이상 일본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하였는데, 조슈(長州)와 사츠마(薩摩)는 여러 번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존왕양이'를 주장하였다.

한 마디로 지금의 일본을 만든 것이 바로 막말(幕末)의 격동기였고, 지금의 일본인의 정신의 근간을 이룬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말하자면, 근대 일본민족의 뿌리나 다름없는 것이 이 '막말기'(幕末期)라 할 수 있다.

이는 료마가 고베 소재 해군조련소가 막부의 명으로 해체된 후, 폐쇄된 해군조련소 바닷가에서 탈번(脫藩)하여 갈곳 없는 동료들 5명과 함께 '사츠마'로 가서 함께 '일본을 세탁하자'고 선언한데서 비롯된다. 도쿠가와 막부가 260여년 지배한 이 나라(일본)에는 우스울 정도로 때가 잔뜩 끼어 있다는 것이었다. 막부 소속이면서 '양이'를 받아들인 해군조련소 총책 '카츠 카이슈'(勝海舟)의 두터운 신임을 한 몸에 받은 료마는 그의 소개로 당시 막부를 보호하고 있던 사츠마 총대장 '사이고 기치노스케'(西鄕吉之助/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동인)를 만나고 난 후로 유명한 말을 동료들에게 남긴다:

    '작게 치면 작게 울리고 크게 치면 크게 울린다.'


이 말은 이제는 더 이상 오고 갈데 없으니, '사이고'가 우리들에게 눈을 돌릴 정도로 크게 치면 된다면서 동료들을 독려해준다.

이렇게 불화하던 양쪽이 연합하게 된 것은 외국 세력과의 전쟁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즉 영국 상인의 살해 사건으로 1863년에 일어난 영국과 사쓰마의 '사쓰에이전쟁'(薩英戰爭)과 조슈군이 미국의 상선에 포격을 가한 데 대해 서양 4개국(미국,영국, 프랑스,네델란드)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 공격사건'(下關戰爭/馬關戰爭)으로 두 번은 서양 기 과 무력의 우수성을 인정하게 되고 개국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존왕양이'라는 구호는 더 이상 명분이 없어지고 배타적인 국수주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양쪽은 '토바쿠'(討幕) 즉 '막부 토벌'을 새로운 구호로 내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양쪽의 갈등은 골깊은 것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토사번(土佐藩)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였다:

    '사쓰에이전쟁'(薩英戰爭)

    薩摩藩士によるイギリス人殺害(島津久光の行列の前を乗馬のまま横切ったことへの無礼討ち)を発端とした戦争。
    文久3年(1863)7月 賠償を求めてイギリス艦隊7隻(旗艦ユーリアラス号2371t)が鹿児島湾に襲来し、薩摩藩との交渉決裂により戦闘となる。
    これにより薩摩藩の砲台は壊滅的損害を受け、城下町も一割が焼失する。また、イギリス側も60余人の死傷者を出す。
    講和談判で薩摩側は賠償金を払うことに同意。薩摩は攘夷が不可能であることを痛感する。


    '시모노세키 공격사건'(下關戰爭/馬關戰爭)

    文久3年(1863)5月11日未明…関門海峡を通過しようとしたアメリカ商船「ペンブローク号」に対して、馬関(下関の別称)に作られた長州藩砲台が猛烈な砲撃をくわえる。
    長州藩のその無謀とも言える「攘夷・外国船打ち払い」の行為だった。
    さらに、5月23日にはフランス艦キャンシャン号を砲撃。26日にはオランダ艦メデューサ号を砲撃。
    これに対して、元治元年(1864)8月5日にイギリス、オランダ、フランス、アメリカの計17隻の連合艦隊が襲来。
    あっという間に長州の軍艦2隻を撃沈。海岸の長州側砲台も沈黙させて、やすやすと占領。


    ◆1차전(1863.7.20-8.14). 2차전(1864.9.5–6) ㅡ 영국군이 점령한 조슈의 포대. 약 2천명의 영국군이 포대의 탄약고를 파괴하였다. (イギリス軍に占拠された長州側砲台 元治元年、F・ベアト撮影. 約2千人の上陸部隊は、砲台や弾薬庫を破壊した。) <영국 사진가 베아토(F.Beato) 촬영/위키피디어제공> 한편, 영국에로 밀입항으로 유학을 간 '조슈5걸'(長州五傑)은 1864년 3월에 영국 신문에 나온 본 전쟁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 그 중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는 귀국을 결심하였고, 4월 중순 런던을 출발, 6월 10일경 일본에 도착, 본 전쟁 종식을 위해 분투한다. [호국스페셜 제1부] <너, 玄海灘아, 吐하라!!> (자세히보기).


1847년에 난부번(南部藩/모리오카(盛岡藩)은 일본 이와테 현 중북부에서 아오모리 현 동부에 걸친 지역에 위치해 있던 에도시대의 번의 별칭)에서 일어난 농민들의 一揆(반란) 곧 '산헤이이 잇키'(三閉伊一揆)가 한창 진행중인 1853년 '에도만'(江戶灣)의 '우라가'(浦賀)에 페리(Matthew C. Perry)가 이끄는 미국 함대 '흑선'이 출현하여, 무력을 배경으로 일본에 개국을 재촉하였다. 이에 일본도 처음에는 우리의 '대원군'(興善大元王)처럼 강한 외세 배격에 나섰다. 초기에는 양이(攘夷) 운동이 판을 쳤다. 막부 내에 강 · 온 양론이 대립했고, 지방의 번(藩) 가운데는 서양 외교관을 살해하고 외국 선박을 공격해 말썽을 일으킨 곳도 있었다. 그리고 외세에 대한 투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천황과 막부 양측이 합력하는 '공무합체운동'(公武合體運動/고부갓타이/Movement for Union of Court and Shogunate)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한편 공무합체운동의 거점인 사츠마번은 '사쓰에이전쟁'(薩英戰爭)을 계기로 점차 막부에서 멀어져 1866년에는 '사초동맹'(薩長同盟)을 맺고, 막부토벌운동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867년 10월에는 토사번(土佐藩), 아키번(安芸藩)이 쇼군 요시노부에게 '대정봉환'(大政奉還)을 건백해 이것이 수락됨으로써 봉환의 상표(上表)가 조정에 제출됨과 동시에 막부타도의 밀칙(密勅)이 내려졌다. 12월 9일에는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의 왕정복고파가 은밀히 사츠마번의 막부토벌파와 결합해 '왕정복고 쿠테타를 단행하였으며', 같은 날 '왕정복고의 대호령'(大號令)이 발표됨으로써 조정을 중심으로 사쓰마번, 토사번, 에치젠번(越前藩) 등이 연합한 메이지 신정권이 수립되었다. 이후 도호쿠(東北) 지방을 중심으로 막부 측의 산발적인 저항이 있었으나 모두 진압되었다.

◆사츠마 사무라이의 교섭인들(1865년 촬영) ㅡ'사이고 다카모리'(왼쪽 앉은자)와 '오쿠보 도시미치'(왼쪽 서있는 자)(Saigo Takamori and Okubo Toshimichi) (이미지프리제공/위키피디어). 이리도 절친했던 '우정'은 11년 후 1876년 '대적'으로 변하여, '사이고'는 1877년에 '서남전쟁' 패전과 함께 '자결'로 생을 마감하고, '오쿠보'는 이듬해인 1878년에 '암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 어찌 운명의 불행이 아니련가...!!


그런데 서양 군대와 두어 차례 힘을 겨뤄 본 뒤 일본 지도자들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전투력의 현격한 차이를 경험하면서 배격의 자세를 전면적으로 바꾸었다. 대결에 앞장섰던 조슈번(長州藩)이 영국군과의 두 차례 싸움에서 패하자 주도권을 다투던 사츠마번(薩摩藩)과 연합을 선언하면서 개국 운동에 앞장서게 된 것이다.

'존왕양이'(尊王攘夷/손노조이),즉 천황을 중심으로 한 서구 열강 배격 운동을 버리고 개국 ·개화로 돌아섰다. 이것이 곧 '메이지유신'의 시작이요, 페리 '흑선' 출현 후 15년 만에 도달한 귀착점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귀착이 거듭된 타협을 통해 얻어진 것이란 사실이다. '유신3걸'(維新三傑)로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 등은 모두 타협을 이끌어 낸 중재자들이었다. 타협을 위한 중재의 성공, 그것이 메이지유신 성공 신화의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타협의 명분과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일본의 정치 세력은 당시까지 각 지방의 번(藩) 중심이었다. 사무라이나 상인들의 애국은 번주(藩主)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신3걸'은 그 애국을 '일본'에로 돌렸던 것이다. 곧 천황에 대한 것으로 바꾸지 않으면 서양 열강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력 집결을 위한 타협 중재에 나섰던 것이다. 드라마 '료마전'(龍馬伝)을 통해서 볼 때도 사카모토 료마가 '탈번'(脫藩/곧 참형을 각오)까지 하면서, 각각 이념 및 권력 분쟁이 발생하는 곳에 자원하여 달려가서 '목숨'을 무릅쓰고, 타협의 중재를 나서는 것이 본 대하드라마의 '주류'임을 느끼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에 의하면,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조슈와 사츠마 모두 막부 토벌에 공동의 목적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두 번의 화해를 중재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츠마 대표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본명은 사이고 기치노스케/西鄕吉之助)와 조슈 대표인 '가쓰라 코고로'(桂小五郞/별명은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사이에 비밀 동맹이 맺어지는데 이를 '삿초동맹'(薩長同盟)이라고 한다. 삿초동맹은 조슈를 공격해 온 막부군을 격퇴시킴으로써 비로소 군사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고, 일개 번(藩)인 조슈에 패배한 막부의 권위는 크게 손상되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867년 같은 해 12월 14대 쇼군 '이에모치'(家茂)가 죽고, '요시노부'(慶喜)가 15대 쇼군이 된 것과 같은 시기에 '고묘'(孝明) 천황이 죽고 '메이지'(明治/본명 무쓰히토/睦仁) 천황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에 메이지 천황은 막부를 폐쇄하고 '쇼군'(將軍)이라는 직위를 없애고 친히 정치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260여년을 이어온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정식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이후 700여년을 이어온 무사(사무라이)의 정권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지금도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다. '토사번'(土佐藩)의 하급무사(下士/카시) 출신으로 특히 협상과 중재에 능하여 삿초동맹을 이끌어 내었고, 신정부와 막부 간의 협상을 중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상술(商術)에도 능하여 일본 역사상 최초의 현대식 상사이라고 할 수 있는 '해원대'(海援隊)을 조직하여 해운과 무역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의 가장 탁월한 능력은 아마 세계의 흐름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직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기 전 너나 할 것 없이 장검(長劍)을 차고 다니던 시절, 료마는 거리를 가다가 당대의 검술 명인인 친구를 만났다고 한다. 장검을 차고 있는 친구에게 료마는, '이보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네. 장검을 뽑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권총으로 대결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네' 하며 가슴에 품은 권총을 보여 주었다. 이에 감명받은 친구는 그 후 얼마 지나 료마를 찾아와 자랑스럽게 권총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료마는 '이제는 권총의 시대도 끝났네. 이제는 이것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네' 라고 말하며, 가슴 속에서 작은 국제 법전 한 권을 꺼내 보이더라는 것이다.
<자세히보기>.

한편, '토마스 글로버'는 친구와의 대화에서 영국이 이미 일본과의 전쟁을 상정(想定)해 놓고 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있다는 비밀을 알려준다:

    영국군은 셋츠(摂津)의 바다를 봉쇄하고, 보병 1만 2천과 기병 5백을 효고(兵庫)에 상륙시키며, 오사카를 제압하고 쿄토로 진군한다. 그리고 천황을 구속해서 해군을 에도만에 진격시키고는 본대 1만 5천이 에도성을 공격하여, 일본은 단 하루 만에 항복한다...지금 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있음을 아는 일본인은 한 사람도 없다네. (료마전, 29회 방영중에서)


    <료마전>의 타이틀 BGM ㅡ 토머스 글로버: '지금 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있음을 아는 일본인은 한 사람도 없다네.' 사츠마와 조슈의 충돌 현장에서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 '마치 닭장 속에서 장닭들끼리 싸우는 꼴이라고!! 일본인끼리 싸울 상황이냐? 응? 사이고 씨!!' 이어서 타이틀 BGM이 흐른다. 보컬은 호주 출신 작곡가 겸 가수 '리사 제라드'(Lisa Gerrard)이다.


토머스 글로버(Thomas Glover)는 필자가 이미 앞에서 소개, 언급한 바 '프리메이슨 회원'이었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거상'(巨商)이었다. 1859년 일본 막부가 '나가사키'(長崎)를 개항하였을 때, 중국 상하이에서 건너와 '쟈딘 매써슨상사' 지점을 개설하였다. 1863년 사카모토 료마 사무라이 일행을 만난 적 있으며, 이무렵 이토 히로부미를 중심으로 한 '죠슈5걸'(長州五傑)의 영국 유학 알선을 주도한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본 드라마 '료마전'(龍馬伝)에 나오는 글로버의 대화 ㅡ '지금 이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놓여있음을 아는 일본인은 한 사람도 없다네.' ㅡ가 진실이면, 이미 영국은 일본을 점령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요, 그 배후에는 '비밀집단'(프리메이슨/로스차일드)이 백업을 해주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우리는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 혹은 강화도사건(江華島事件)을 기억하고 있다. 1875년 9월 20일(고종 12년 음력 8월 21일) 통상조약 체결을 위해 일본 군함 '운요호'가 불법으로 강화도에 들어와 측량을 구실로 정부 동태를 살피다 수비대와 전투를 벌인 사건이다. 한국식 한자음 그대로 '운양호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때 일본인들이 타고 온 배를 바로 글로버가 일본으로부터 부탁을 받고는 영국으로부터 구해 온 배였던 것이다. 이렇게 글로버는 우리와는 악연인 셈이다.

그렇다면, 토머스 글로버는 평범한 무기상(武器商)이었을까? 이 시대에 평범한 무기상은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근대 일본에서 종횡무진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The Last Samurai)의 '톰 크루즈' 조차 울고 갈 정도였다고 전한다. 왜 그랬을까? 글로버는 일본인으로 귀화하였고, 그의 일본인 아내 '쓰루'(鶴)는 푸치니의 나비부인 모델로 알려졌으며, 그는 일본에서 근대 최초라는 수식어를 온통 만들어낸 장본인이고, 이토오 히로부미 등 일본 유신정권에서 맹활약하던 '조슈5걸'을 대거 영국에 유학을 보낸 장본인이었으며, 대표적으로 일본 최초의 철도와 조선소, 그리고 최초의 '기린'맥주 사장이었으며, 메이지유신 때 '프리메이슨'(국제유태자본)의 계획에 따라, 해리 파크(Harry Parkes) 공사의 지시를 받아 막부정권을 무너뜨리는 무기를 '사츠마-조슈번'(삿초동맹/삿초연합)에 지원을 했으며, 무엇보다 대부분의 사업을 '이와사키 야타로'(岩崎弥太郎) 라는 '미쓰비시'(三) 창업자에게 넘겼다는 데에 있다. 야타로는 료마와 같은 해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토사번'(土佐藩)의 죽마고우이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記錄이 없다하여서 모든 과거의 痕跡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보기).

파크스 공사는 18년간(1865-1883)의 외교관 생활을 접고, 1883년에 중국 주재 영국 공사로 부임하였고, 이듬해 1884년 부터는 초대 한국주재 초대 영국 공사직을 겸임하였다. 1884년 4월에 아버지를 따라서 서울에 온 큰 딸 '마리온 파크스'가 5월 7일, 궁궐에 초대를 받았고, 거기서 명성태황후를 알현하게 되었다. 명성태황후 인상에 관한 그의 기록은 지금 번역 중에 있으며, 번역이 마쳐지면 다른 관련 주제에서 밝힐 것이다. 서양 외국인들이 느낀 명성태황후에 대한 인상 중에서 자세한 부분이 있기에 말이다. 암살당하신지 115년이 되는데도, 아직도 명성태황후에 관한 '진짜' 어진(御眞)을 구비해놓지 못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국가적, 민족적 수치가 아닐 수 없다고 필자는 7천만 우리 한민족에게 강력하게 호소하는 바이다!! 제 아무리 겉으로 경제대국에 진입할 정도의 위상이 높아져 있다 하더라도, 한민족혼이 담겨있는 '대한국'(大桓國)의 뿌리를 어찌 그 누가 뽑아낼 수 있으랴...이는 창조자 하나님이 '카이로스 시간' 속에서 절대로 용서치 않을 것이라 믿어지는 것이다. 지난 과거의 한민족 역사 속에서 유유히 남아있는 그 흔적만은 지워지지 않았기...아니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일본인이라는 민족의 원형이 만들어진 것이 '막말기'(幕末期)라면, 우리나라는 언제일까? 여러가지 설이 있을 수 있다. 고려에서부터 조선 후기, 혹은 일제강점기까지 가능해진다. 그러나 역시 근대민족주의를 전제한다면, '구한말'(舊韓末)이 그 시작일 것이다. 강화도조약으로 개항을 하고 밀려드는 외세들 사이에서 미약하게나마 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지키려 했던 그 시기로부터...그런데 바로 그 뒤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가 시작되었으니 말이다.

많은 개화파 인사들이 친일(親日)로 돌아섰다. 근대화와 관련한 많은 인사들 역시 친일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탈민족 좌파들이 한국의 정통성을 '조선총독부'에서 찾고, 독립운동가를 '사회부적응자'로 조롱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음악이며 미술이며 문학이며, 각종 근대문명에 기여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친일과 연루되어 있다 보니, 그 상황의 흐름이 아니 시대적 흐름이 한민족의 지배로 시작된 한국의 근대민족사에는 하나의 지울 수 없는 깊은 '트라우마'(Trauma)가 되었다. '트라우마'란 신체적인 손상과 생명의 위협을 받은 사고(事故)에서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은 뒤에 나타나는 질환, 곧 '정신적 외상'(精神的 外傷)이란 뜻이다. 길게는 '한민족의 뿌리박힌 상처'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가 정해 놓은 '한울가'(桓鬱歌)도 바로 이와 같은 정서로부터 비롯된 필자의 '내적 울부짖음'의 분출인 것이다!!

일본의 '막말기'(幕末期)에서 '다이쇼'(大正) 시대까지 일본의 근대를 이끈 수많은 지식인과 기업가와 정치가들이 있었다. 물론 여러 문제들이 있었다. 그 문제들이 지금에까지 이어지는 것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들이 만들어낸 시대는 지금의 일본을 만들어낸 근원과도 같은 시대다. 그런 만큼 매우 긍정적이며 낙천적이고, 일본의 어떤 전통적 의미로서 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수많은 지식인과 기업가와 정치가란 친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에, 아니 친일로부터 자유롭더라도 지나칠 정도로 비장(悲壯)하다. 친일파가 아니면 죄다 비장하다. 도저히 그 시대를 긍정적으로만은...그렇게 그려내기에는 너무 무겁고 상처가 많다. 더구나 그 친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식인, 기업가, 정치가들이 해방 이후 사회의 주류로 다시 기득권을 쥐게 되었으니...다만 지금은 그 얼굴을 바꾸었을 뿐이다. 이들의 행적은 좀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지난 대선 운동 2년전부터는 활달하게 움직였던 기억이 나는데...지금은 어디로 사라진 것은 아닐텐데도...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것 같다. 다음 대선 기간 중에나 드러낼런가 보다. 그러기에 간접적인 '현상과 상황'을 가지고서 그 단체의 존재함이 판단될 뿐이다. 예를 든다면, <6・25남침> 60주년을 맞아 개봉한 영화 '포화 속으로'...군번 없는 학도 의용군의 실화를 근거로 해서 만든 영화로서 역시 흥행에 성공하였다고 전하는데...'포항'이란 용어에 초점을 둔 것은 아닐런지...??

    첫째, '포화 속으로'의 배경이 '포항전선'(포항여중/현 포항여고) 이라는 점.


그리고 최근에 개봉한 영화 '이끼'(Moss) 역시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필자는 아직 두 영화를 관람하지 못했다. 다만 원작 만화 '이끼'는 웹툰을 통해서 잠깐 살펴보았는데...작가 윤태호의 말이다: "'이끼'는 어릴 때 경험했던 시골 풍경과 이야기들을 배경으로 삼아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나가려고 했다. 아버지는 거대한 싸움에서 패했지만, 아들은 강한 집념으로 사소한 승리자가 되는 모습을 축으로 삼았다." (자세히보기). 그런데...??

    둘째, '이끼'라는 용어가 일본 국가 속에 나온다는 점...해서...필자는 처음으로 일본 국가(國歌)의 가사를 살펴보았다:

    きみがよは
    ちよに
    やちよに
    さざれいしの
    いわおとなりて
    こけのむすまで

    천황의 세상이
    천 세대로
    팔천 세대로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서
    이끼가 낄 때까지

    May your reign
    Continue for a thousand,
    eight thousand generations,
    Until the pebbles
    Grow into boulders
    Lush with
    moss

    ◆악보제공/위키피디어


이상에 관한 판단은 이 글을 읽는 각자 자신이 하시기 바란다. 이러한 현실이 진실이면, 이는 여간 심각한 한민족(칸민족)의 또 하나의 '트라우마'가 아닐 수 없다.


친일파(親日派)를 '친일파'라 부르기에는 기득권이 걸린다. 그렇다고 친일파를 '친일파'가 아니라 하기에는 민족이 걸린다. 다른 것도 아닌 민족주의다. 우리 한민족을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친일이란 민족에 대한 배반이며 반역이다. 아무리 관대하자고 그들의 친일 자체를 없었던 것으로 그냥 보아 넘길 수는 없다. 이미 그들의 한민족에 대한 '배반적 행위'가 '민족적 트라우마' 속에 그 흔적이 깊이 박혀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주류 기득권은 아직도 그 자신들이거나 그 후예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결국 남은 것이 독립운동이었다. 외세의 침략과 그로 인한 고난의 시절과 그에 항거하던 독립운동가들...물론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가를 존경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에 대한 존경은 어떻게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지나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들로 인해 지금 우리 한민족의 자주성(自主性)이 회복되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것이 어떤 열등감과 억압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문제다. 언제 또 다시 침략당할지 모른다. 외세로 인해 우리는 이런 고난을 당했다. 그래서 외국을 배척하고 다른 것을 배척하고 지나칠 정도로 내적 단합을 강요한 것이었기에...지나칠 정도로 비장하고 지나칠 정도로 치열하며 지나칠 정도로 폭력적이었다.

아니 그것도 좋다. 프랑스의 국가(國歌)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를 들으면 그렇게 섬뜩할 수 없다. <하룻밤에 쓰여진 혁명가, '라 마르세예즈'/듣기>.
1792년 입헌의회가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한 뒤, 프랑스가 오스트리아·프로이센군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젊은 공병 장교 '루제 드 릴'(Rouget de Lisle)이 하룻밤 사이에 가사와 멜로디를 작성했다고 전한다. 가사는 라인강변으로 출정하는 용사들의 심경을 그린 것으로 1879년 정식 국가로 채택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부당한 폭력에 항거하려던 인민의 의지가 담겨 있다. '라 마르세예즈'에 담긴 폭력성은 불의에 항거하려던 인민의 분노인 셈이다. 독립운동 역시 마찬가지다. 그 폭력성이 부당하게 다른 민족, 다른 나라를 침략하여 지배하려는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로 승화된다면, 옳지 못한 것에 항거한 당연한 의분으로서 여겨질 수 있다면...당장은 무리더라도 그렇게 나아갈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 조차도 해방 이후 기득권을 쥔 친일파들에 의해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버렸다. 독립운동에 이데올로기가 덧씌워지며, 독립운동의 가장 큰 부분을 담당했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이 깡그리 독립운동사에서 배제되어 버린 것이다. 가장 가열찬 투쟁을 벌이던 사회주의자들이 배제된 한국의 독립운동사는 얼마나 공허한가...절반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필자가 1993년 5월에 중국 교여행 중에 직접 눈으로 확인한 바 있으며, 일부 구입해 온 '독립운동사' 책들이 있다. 그러한 역사적 진실(증거)들이 우리 한민족 위에 얼마나 투영되어 있는가? 그 현장을 북한이 가로막고 있고, 중국이 차지해서 그런 것인가?? 아니다. 필자가 어려서부터 학교에서 듣고 배워왔던 그 숱한 독립투쟁사들이...어느덧 그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사라져 버렸음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더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그렇다고 주저 앉을 수만은 없는 한민족의 '부흥대사'(復興大事)임에 틀림없다 판단하였기에...이렇게 필(筆)로서나마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19세기 중기 서구열강의 아시아진출 지도' (山口貴生, '日本の夜明け: フルベッキ博士と幕末維新の志士たち', 東京:文芸社, 2009, p.18).


서구 세력들이 동쪽으로 들어오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에(위 지도 참조), 제국주의 침략 앞에 한민족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롭던 시기에, 분연히 떨쳐 일어나 맞섰던 영웅들...한민족의 미래를 열고 한민족의 영광된 현재를 만들어낸 위인들...그들의 이야기를 저처럼 낙관적으로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그리고 그들을 통해 세계를 이야기하고 근대문명을 이야기하고 보편적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뻔뻔스레 자기들도 제국주의 침략을 했던 주제에 일본인들은, 그들의 작품 '료마전'(龍馬傳)에서 서구의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있었다. 서구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평화로이 모든 나라가 공존하는 그런 이상을 그리고 있었다. 뻔뻔하지만 그만큼 과거에 구애될 것이 없기에 지금의 가치를 당시에 자유롭게 투사할 수 있는 것일 게다. 지금의 바램을 그런 식으로 과거를 통해서...그 시대를 통해서...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그런 식으로 묘사했다가는 바로 욕부터 나옴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구한말을 단순히 '개화기'(開花期)로서 근대문물이 소개되는 시대로서만 그리려 했다가는...그런 점에서 '별순검'은 참으로 특별한 드라마였다. 필자는 본 드라마를 아직 감상하지 못하였다. 시간이 허락 되는대로 감상해 볼 작정이다. 그대신 아래와 같이, 한 네티즌의 감상문으로 대신하는 것이다:

    한국 드라마의 고질병은 모든 걸 연애와 연결시킨다는 데 있다.

    의사도 연애만 하고, 변호사도 연애만 하고, 예술가도 연애만 하고, 수사관도 연애만 한다...

    연애 장면을 아예 없애라는 건 아니지만, 스토리 전개상 어거지로 연애 장면을 끼어넣을 때 드라마 질이 현격히 떨어진다는 걸 왜 생각하지 않을까? 지난 몇십년간 한국 드라마중 연애와 무관하게 질높은 수사물은 '수사반장' 이외에는 없는 것 같다.

    '별순검'이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연애 범벅 잡탕 드라마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문드라마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여기에 더해 별순검은 조선말-일제초의 시대적 생활상에 대한 그럴 듯한 고찰을 덤으로 선사하고 있다.

    이번 시즌도 각회각회가 고른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고, 이야기의 밀도와 재미가 높은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돈 쳐발라도 그지같은 스토리에 연애범벅 잡탕 같은 지상파 드라마보다 이 드라마가 훨씬 더 귀하다.
    <자세히보기>.


성경번역에 정진만 해오던 필자에게 오늘의 이 글을 쓰게 된데에는 아들 다니엘의 영향이 지대하다. 아들이 전하는 '대한국'(大桓國)은 우리 한민족의 뿌리를 저 '수메르문명'에로 까지 뻗어나간다.

    '아빠, 진짜 우리 대한국의 민족의 정기를 알리는 영화나 드라마 음악 한번 만들고 싶어...지금껏 방영된 히트작이라는 사극 드라마들이 온통 역사를 왜곡시켜버렸어...'


간간히 아들이 들려주던 우리 한민족의 뿌리에 관하여 필자는 솔직히 한쪽 귀로 흘려보냈던 것이 진실이다. 그러한 귀를 바로 제자리로 돌려 놓은 것이 바로 아들의 이 한 마디였다. 일본의 역사는 우리와는 비견이 되질 않는다. 일본은 한민족의 한 부분일 뿐이다.

다만 묘하게 시대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는 드라마였다. 아직까지는 무리인 것일까? '트라우마'가 남아 있는 동안에는. 더구나 보편적인 가치를 담아내기에는. 민족이며 국가며 상관없이 단지 시대적 가치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더더욱 금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 당장에는 지나칠 수 있을 지 모르나, 그 역사적 진실의 왜곡이 또 한번 우리 한민족 위에 '트라우마'로 투영된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민족은 없을 것이다.

일제강점기가 아쉬운 이유다. 우리가 지금도 이렇게 쫓기듯 벌벌 떨면서 강박관념 속에 살아야 하는 이유가 그것일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의 뿌리를 먼 과거로부터만 찾으려 하고...근대에 대해서는 외면하도록 만들고 있다면...자의든 타의든...현재에도...지금에도...어쩌면 지금의 한국사회의 많은 병폐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어차피 역사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역사에는 '만약'(if)이란 가정(假定)이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호국스페셜 제1부]
<역사 기록에는 '만약'(if)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세히보기). 중요한 것은 '어째서 그랬는가? 왜 그랬는가?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비교적 과거사로부터 자유로운 세대가 늘어나고 있음에 기대를 걸어본다. 다만 자유롭다는 것이 자기를 부정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면, 친일이 탈민족(脫民族)이 아니라, 한민족의 정체성을 입증해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미래적 증인'일 수 있겠다.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분노는 보편의 가치에 비추어 타당한 것이다. 민족주의에 대한 반대는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이기도 하다.

조금 더 낙천적일 수 있으면...긍정적일 수 있으면...그것이 안 되니까...필자도 일제강점기를 마냥 긍정적으로만은 볼 수 없다. 어떻게 해도 친일 의혹이 있는 인사들에게 한국 근대화의 공로를 인정하고 그들을 존중해 줄 수는 없다. 필자 역시 한국인인 터라...언제고 보다 자유롭게 공로(功勞)와 과오(過誤)를 한데 나누어, 보다 긍정적으로 즐길 수 있는 그 날이 올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 할 것이고...

◆필자는 '료마전'이 끝나고서, 그의 역사적 유적을 소개하는데, 이 때 들리는 배경음악의 연주자 '키요즈카 신야'(淸塚信也)를 직접 '자막'으로 처리해주는 일본식의 긍지에 감흥을 받았다. 참고로 키요즈카 신야의 저서이다: 'ショパンはポップスだ' (쇼팽은 팝이다): 淸塚信也のクラシック 키요즈카 신야(淸塚信也) 연주. 그의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필자는 아들 동윤이도 저 정도 이상의 연주를 능히 해낼 수 있으라 믿으면서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아직 동윤에게는 때가 이르지 않은 것 뿐이리라...곧 아들의 '앨범'을 통해서 그의 천재성이 드러날 것임을 확신한다.


한편, 본 대하드라마 '료마전'(龍馬伝)의 음악은 '사토 나오키'(佐藤直紀)가 맡았다. 그는 '칸노 요코'와 '히사이시 죠'와 함께 일본의 '3대음악감독'이라 전해진다. 스케일이 크고 가슴을 울리는 음악을 작곡한다. 음악스타일이 일본적이지 않고 오히려 할리우드 스타일이라고 하니, '료마전'을 보면서 느끼지만, 어쩐지 '블럭버스터' 색깔이 강하게 밀려온다.


[우리에게는 선비정신이 있다]

일본은 에도막부 개항(1854) 이전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 이란 사람들이 개화의 씨를 뿌린다. '하급무사'(下士/카사)의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 이미 번주 앞에서 군사학에 대해 강의했다는 요시다 쇼인은 29세의 나이에 막부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당했지만, 그는 학교를 열어서 서구학문 연구교육과 개화의 필요성을 전파하고, 이들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사무라이'(지사들)을 길러냄으로써 사실상 메이지유신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고 있다. 그는 특히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와 더불어 정한론(征韓論)을 처음 주장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사카모토 료마'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젊은이였던 것이다.

요시다 쇼인이 '쇼카손주쿠'(松下村塾)에서 제자들을 육성한 기간은 2년여에 불과하다. 하지만 훗날 메이지시대를 풍미한 수많은 인물이 그곳을 거쳐갔다. 특히 이곳으로부터 한국침탈의 원흉들이 배출된 역사적 사실이 있음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 삿초동맹의 주역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본명 가쓰라 코로로(桂小五郞)요, 료마와 일찍이 접촉을 갖은 인물이다.
  • 막부 토벌의 선봉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 일본 군국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며 군부 최고의 실력자로 군림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 한국강제병합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 명성태황후 암살의 배후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이 그들이다.


'료마전'(龍馬伝)과 같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전혀 다른 식으로 시대를 이해한 역사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는 현실이...그것이 곧 민족적 전통이 형성되는 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그를 통해 현대의 가치를 투영하고 현재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역시...그것이 하필 또 '일본이라는 것'이...'일본이더라는 것'이 우리 한민족을 위해 투영되는 또 하나의 도전일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와 동시대에 우리에게는 일본의 '사무라이정신'과 전혀 색다른 정신이 있었으니, 바로 '선비정신'(先非精神)이었다. 선비란 근대화 사회 이전에 그 사회의 근간을 이룬 지식인들을 두고 널리 쓰인 말이다. 그런데 사람에 따라서는 그 접근이 서로 다르지만 선비하면, 흔히 조선시대의 선비들을 두고 지칭하고 또 그들의 행위 및 규범에 대하여 논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그들 선비의 행위의 규범과 일반적 특성은 드러낼 수 있는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는 선비 특히 조선시대의 선비에 대한 시각이 어떤 선입관 때문에 그리 좋지 않다. 흔히 그들 선비의 행위특성을 두고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어 고루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지나친 명분이나 이론에 치우친 나머지 문약(文弱)하기 짝이 없다는 등 매우 부정적으로 보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말과 행동이 반듯하고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발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작은 실리보다는 큰 명분을 내세우고 역설적으로는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탐구하려는 태도,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 보는 것과 같은 실험과 연구를 거쳐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을 통하여 정확한 판단과 해답을 얻음)와 같은 선비다운 숭고한 정신을 가지고, 참 삶을 살아 왔다고 하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선비, 그들의 숭고한 선비정신에 관하여 새삼 열린 마음으로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오늘날과 같은 자본주의의 경제체제 속에서 비록 급속한 개발과 경제성장은 이루어졌으나 그 경제의 안정 및 선진화를 위해서는 숭고한 선비정신과 같은 기업가행위의 규범 내지는 온고지신의 참 덕목을 갖춘 많은 우수한 CEO그룹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필자의 선배 '설봉식' 교수님이 발표하신 논문글 '선비정신과 CEO의 행위규범'이 있어서 발췌하였다:

    첫째, 선비정신은 그들 선비의 바른 몸가짐과 옳은 행위 등에서 출발된다. '선비의 몸가짐 즉, 조신(操身)은 그들이 거동하면 반드시 예(禮)를 생각하고 어떤 일을 행동에 옮기면 먼저 의(義)에 합당하지 아니한지를 살피는 데 있었다.'

    둘째, 선비정신은 학문연구와 그 실천에서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학행(學行)의 일치라고 해도 좋다. 조선시대에는 선비라면 누구나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대우를 받았다. 그 때 선비들은 아무리 거룩한 말을 해도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면 비판받고 또 매도당했던 것이다. 교언영색(巧言令色/편집자주ㅡ남의 환심을 사려고 아첨하는 교묘한 말과 보기 좋게 꾸미는 얼굴빛)이라고 했던가? 조선시대의 선비사회에서는 배운 것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교묘한 말로 좋은 얼굴색을 지어 남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짓을 크게 매도했던 것이다.

    셋째, 선비정신은 투철한 이타심(利他心)으로 형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박기후인(薄己厚人/편집자주ㅡ남에게는 후하고 자신에게는 박하게 하여, 청빈하고 검약한 생활 방식을 몸에 익힘)이라 했던가? 선비는 남에게는 후하고 자신에게는 청빈하고 검약한 생활방식을 자연스럽게 몸에 익힌다는 뜻이다.

    넷째, 선비정신은 의리와 명분을 생명보다 중시하는데 있을 것이다. 논어에도 '선비는 위급을 당하면 목숨을 바치고, 득(得)을 보면 의(義)를 먼저 생각한다.'라고 쓰여 있다고 하지 않은가! 그래서 허 균은 선비를 두고 된 사람, 혹은 채워진 사람이라고 했다. 그의 선비관은 이렇다. '군자(君子)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채워 뒷사람에게 남기는 것이다.'



19세기 초 한국(조선)은 개화파 원조격인 대표적인 두 분, 정약용(실학파 중농학파)과 박지원 (실학파 중상학파)이 있었다.

정약용은 당파싸움에 희생되어 귀향가게 된다. 사도세자 아들 정조(문송대왕)이 죽자(독살설), 정순왕후(영조의 후궁)가 사도세자를 옹호한 '시파'(時派/노론의 분파로서 반대파를 '벽파'-僻派라 부름)를 천주교 탄압을 빌미로 대규모로 처형, 유배시켰다. 정약용 가문이 이때 극한 처형을 받고 서구 실학사상이 뿌리채 흔들리게 되었다.

박지원은 당시 순조의 생모(수빈 박씨) 외척세력이라 권력가 가문으로 변을 당하진 않는데 실학사상은 몰래 집안에서 공부하여 전하는 수준으로 변하게 되었다.

정조 사후인 '순조ㅡ헌종ㅡ철종'(1800-1863) 때가 한국에서 사상, 출판, 표현, 언론자유가 가장 궁박당한 이 시기가 일본의 에도막부 말기와 동일시대이면서 양자는 현저한 차이가 난다.

에도의 '막말기'는 근대 일본이 시작된 것이다. 근대 일본의 문물과 지금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문명을 이룬 일본의 현재가 바로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더구나 그 사건이 워낙 극적이었기에 일본인들은 지금도 그 시대를 잊지 않고 만화나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컨텐츠를 통해 재생산하여 확인하고 있는 것이라고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한 가지 아쉬움을 남기면서 본 주제의 글을 접으려 한다. 2010년 12월에 가서야 종영하게 될 본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龍馬伝)은 지금까지 30회가 방영되었다. 필자가 기대하는 '막말기'의 '사무라이들'(무사들)과 베어벡 선교사와의 교제는 아직 보여지지 않고 있다:

◆일본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龍馬伝)에는 위 '베어벡' 선교사의 제자들(사무라이들)이 주축을 이룬다. <이미지/화중광야제공>


네델란드 출신의 선교사로 알려져 있지만, 일본에서는 '國籍없는 宣敎師'로 불린다. 이 사진은 '베어벡과 幕末 維新의 志士들'이란 타이틀의 사진이다. 베어벡 선교사의 사무라이 제자들이란 뜻이다!! 몇년 전, 옥션사이트에서 '江戶幕末 志士의 집합 사진'으로서 팔리고 있던 유명한 사진으로서, 에도막부 말기의 1865년(慶応元年), 각지의 '사무라이'(志士)가 나가사키에 집결했을 때의 것으로, 사실은 1869년(明治2년)에 나가사키, '우에노 히코마 사진관'에서 찍었다고 하는데, 옷차림으로 봐서는 '메이지유신' 결행 전인 1865년에 찍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전한다. 아무튼 이 사진은 '베어벡 선교사와 그의 제자들'의 귀중한 送別寫眞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전개중인 시대적 배경이 1865년인데...이 기간 중에 '베어벡' 선교사와 그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송별의 사진을 찍은 것으로 볼 때...1865년 토머스 글로버로부터 무기 구입과 1866년 3월 7일, 료마의 입회하에 체결된 베어벡 선교사와의 교제가 빠질 경우, 이 드라마 역시 '역사적 진실'로부터 멀어져 있음을 자인하는 것일텐데...현재 발표된 방영횟수 별 테마를 참고할 경우, 오는 ㅡ 9월 12일 방영분 까지는 없는 것 같은데,

◆위 료마의 '인물상관도'에서 보듯이, 지금 전개중인 배경이 '나가사키'인데...'토머스 글로버'는 나와 있는데, '베어벡 선교사와의 인맥은 보이지 않는다.


페리(Perry) 내항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당시 '존왕양이' 파였던 '료마'는 일본이 외국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고 있는 원인은, 서양의 영향을 받은 '카츠 카이슈'(勝海舟)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여 그를 죽이러 가지만, 반대로 그의 '일본은 외국의 발달한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한다' 는 이야기로 계발되어, 그 후 료마는 그의 제자가 된 것이다. 그 후, 카츠의 영향을 받아 해운 무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 료마는 해운무역회사인 '龜山社中'(가메야마 샤츄/후에는 海援隊)를 설립하게 된다.

서로 대립하는 사츠마번과 조슈번이었지만 료마와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는 일본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들 양자를 체결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龜山社中'를 통해 당시 막부로부터 무기 수입이 금지되어 있던 조슈에는 사츠마에서 무기를, 쌀이 부족하던 사츠마에는 조슈에서 쌀을 지급시키는 것으로 '삿초동맹'을 체결시키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것을 계기로 막부를 쓰러뜨리기 위해 양자가 한 공동체가 되었으며, 그 다음에는 막부와 각 번을 하나로 하기 위해 정권을 막부에서부터 조정으로 반환시킬 '타이세이 호칸'(大政奉還)을 추진하였다.

◆<이미지프리제공/위키피디어>. 270여년의 '무신' 정치의 종언(終焉)을 고하는 마지막 막부 쇼군의 항복선언이 바로 '타이세이 호칸'(大政奉還)이다. 1867년 10월 14일이었다. 역사는 '만약'(if)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그래도 혹여 이 항복이 없이 무신 정치가 지속되었더라면...그리고 메이지유신의 실세들이 '암살'당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일본의 '정한론'으로 한반도를 강탈할 수 있었을까? 구세대로부터 신세대에로의 개화(개항) 전환과 안정을 이루려면 최소한 1세대 곧 30년은 족히 걸리는 법인데...메이지유신의 실세들은 유신 후 불과 10여년이 지난 1876년에 '한국 정복'이라고 하는 '정한론'(征韓論)을 들고 나왔다. 이것이 거세게 반대에 부딪히자, 정한론의 주도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1877년 메이지 정부군과의 '세이난센조우'(西南戰爭)에서 패하여 자결하였다. 이 때 메이지 정부군의 주도자는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였다. 그리고 이듬 해 1878년 도쿄의 기오이자카(紀尾伊坂) 근처에서 '시마다 이치로'(島田一郞) 일당에게 암살되었다.


그런데 이 보다 10년 전인 1867년, 곧 '타이세이 호칸'(大政奉還)의 한 달 뒤인 1867년 11월15일, '사카모토 료마'는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와 함께 교토에 있는 거처 '오우미야'(近江屋)에서 암살당하였다.

이로써 메이지유신 성공후 10여년에 유신의 주도자들인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오쿠보 도시미치'가 너무 이르게 사라져 버렸다. 왜 '사카모토 료마'는 암살당해야 했으며, 그 배후 세력은 누구 아니 어느 집단이었는가? 왜 '오쿠보 도시미치'는 암살당해야 했는가? 왜 '사이고 다카모리'는 자결해야 했는가? 이들 세 사람은 '베어벡' 선교사의 제자들이었다!! 만일 이 세 사람 중 단 한 사람만이라도 오래 살았더라면, 과연 한국의 운명은 어찌되었을까? 이것이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과연 일본의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하여서 남의 나라를 '강탈할'(?) 정도로 국력이 그리도 성장하였던가? 그 짧은 기간에? '청일전쟁'(1894-1895)과 '러일전쟁'(1904-1905)에 소모된 그 엄청난 돈을 충당할 수 있을 정도로 일본이 유신 이후 그렇게도 빨리 경제가 성장하였던가? 일본군이 한국 땅에 강제로 주둔하면서 그 많은 군비는 어디서 충당하였는가? 왜 역사 전문가들은 이 '배후 세력'을 연구하지 않는 것인가?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인가? 어째서 '국제유태자본'(로스차일드 가문/프리메이슨)의 소행임을 밝혀내지 않는 것인가, 못하는 것인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료마'가 암살당한 후 다음 달 12월에 14대 쇼군 '이에모치'(家茂)가 죽고, '요시노부'(慶喜)가 15대 쇼군이 된 것과 같은 시기에 '고묘'(孝明) 천황이 죽고 '메이지'(明治/본명 무쓰히토/睦仁) 천황이 즉위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맞이하여 새로운 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이것이 어찌 우연의 일치라 할 수 있겠는가...

'사카모토 료마'의 큰 특징은 양이파, 개국파 등 사상과 이념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과 접촉한 것이다. 그는 '통일성이 없었던 일본을 한 국가로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넓은 시야를 지니며 원활하게 정권 교체를 실현시킨 사카모토 료마. 그의 외교적 수완은 높은 평가를 받아 아직까지 일본인에게 <No.1의 영웅>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현재도 매년 11월15일에는 교토에서 위령제가 이행되며, 전국에서 많은 료마 팬들이 모여온다고 전한다.

본 NHK 대하드라마 '료마전'(龍馬伝) 역시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분위기를 필자는 간파하게 되었다. 드라마가 시종일관 온통 콩볶듯이 '긴박감, 성급함, 고성, 전투, 자결, 암살' 투성이의 흐름이 주류를 이룬다. 혹자는 지금 일본이 경제가 너무 어려우므로(최근에 세계 경제 2위 자리를 중국에게 넘겨줌/자세히보기), 140여년전의 경제부흥을 계몽시켜서 하나의 자극제로 제시하는 것이 본 드라마의 방영 목적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런데도 '나가사키'의 경우, 카톨릭교의 '오우라 성당'(大浦天主堂/오우라텐슈도/1864년 프랑스)에서 비밀리에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는 장면은 '30회분'에서 등장하는데...그 보다 중요한 메이지유신의 주도자들인 '44명'의 아버지 아니 정신적 지도자 '귀도 베어벡' 선교사와의 교제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 드라마 역시 '온전치 못한' 수박 겉핧기식 드라마에 불과할 것이라고 조용히 필자는 정리하게 된다. 아직은 9월 12일까지 기다려 봐야 하는 1개월의 시간이 남아 있지만...NHK가 소개하는 시놉시스 속에는 '베어벡' 선교사와의 만남은 제외될 전망이다. 아니 종영 때까지도 등장 안 할 수도 있지만...혹여 각 방영 분 속에 일부 언급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에...그 때까서 보충할 것이며, 일단은 여기에서 글을 맺는다.


[2010년 8월 10일 오후 1시 ㅡ 일본 나가사키시 소재 '나가마치 성당'에서 1610년에 임진왜란 포로 조선인들이 세운 '성 라우렌시오 성당' 400주년 기념미사 봉헌]

'오우라 성당'은 1865년에 완성된 일본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카톨릭교 건축물이며,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서양 건축물이다. 정식 명칭이 '일본 26성인 순교성당'이다.

◆저 '앵크 십자가' 군기를 달고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의 미스테리는 '이 군기의 형상을 푸는데 있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저것이 '사츠마번' (薩摩藩)의 문장(紋章)이라는데(?)...<이미지프리제공/MBC드라마 임진왜란>

1597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공포한 카톨릭교 금교령에 의해 처형된 26명(24명 신자/2명 예수회 신부)의 순교자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Etrangeres de Paris/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에서 파견된 '쁘띠쟝'(Bernard thadee Petitjean)과 '퓌레'(Louis Theodore Furet)라는 두 프랑스인 신부에 의해 세워졌다고 전한다.

'파리외방전교회'는 천주교 조 교구가 설립된 1831년에 브뤼기에르(Bruguiére) 주교를 조선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하지만, 브뤼기에르 주교가 1835년 만주에서 병으로 별세하면서, 모방(Maubant) 신부, 앵베르(Imbert) 주교, 샤스탕(Chastan) 신부가 1836년과 1837년에 입국했다. 이들 중 모방 신부는 김대건(필자가 2001년 마카오 방문시 마카오 공원 안에 김대건 신부의 동상이 있었다),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의 신학교에 보내서 신학공부를 하게 하였다. 이들 중 최방제는 병(말라리아)으로 별세하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천주교 신부가 되어 조선교회를 위하여 일하였다. '기해박해'(1838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때 선교사들이 순교하거나 중국으로 도피하는 수난을 겪었으나, 1887년 '한불조약'으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받았다. <위키피디어 참조>.

이왕, 글이 길어졌으니, 새로운 한 가지 역사적 사실을 전한다. 임진왜란(1592/1597) 당시 끌려온 많은 조선인 포로들은 규슈(九州)의 나가사키(長崎), 아리마(有馬), 시마바라(島原) 등에서 살며 예수회 선교사들에 의해 신앙을 접하게 됐고, 이들 역시 박해를 받았다. 현재 일본인 복자 205위 가운데에는 '다케야 쇼자부로 코스메' 가족을 포함해 15위가 조선인이다. 1610년 세르게이라 주교의 주례로 새 성당 봉헌식을 했던 이 '성 라우렌시오 성당'은, 400여년 전 1,300여명의 조선인 포로들이 세례를 받고,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지은 것으로 더욱 의미를 더하고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성당이 1620년 '에도막부'의 카톨릭교 탄압으로 해체되었고, 지금은 그 성당터를 찾고 있는 중이라고 전한다.

당시 예수회 선교사는 연례보고서에 '성 라우렌시오 성당' 봉헌식에 대해 '이 도시에는 조선인 기리시탄(편집자주/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더없이 열심한 신자들로 자신들만의 특별한 성당을 지어 신앙공동체를 만들기로 했다'고 적었다.
<자세히보기>.


'왜정 때 친일 안 한 사람이 어디 있나?'

이 말이 나올 수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독립운동가는 적었다. 나머지는 친일을 했다. 그러나 그 적었다던 독립운동가란 사회주의계열을 배제한 나머지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럼으로써 투쟁의 역사마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상당부분 제거되어 버렸다. 남은 것은 얼마나 되는가?

우리 사회에서의 이순신에 대한 신앙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고구려가 외부로 뻗는 힘이라면, 이순신이란 한민족(칸민족)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지켜낸 내부 정신이다. 원래는 근대여야 했다. 원래는 일제강점기여야 했다. 우리 민족의 근대적 전통이 형성되던 바로 그 시기여야 했다. 그 시기의 수많은 지식인이, 의사들이, 열사들이, 의용군들이, 문인과 예술인들이 그것을 담당했어야 했다. 하다못해 독립운동가들이라도 그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말했듯이, 일제강점기란 돌이키기도 싫은 '트라우마'이기에, 그리고 현실적인 한계가 있었기에 건너뛰어 버린 것이다.

이순신을 숭배하며 이순신이 살았던 조선을 부정하려는 것도 그래서이다. 이순신은 철저히 '조선'이라고 하는 봉건사회에서 살았던 봉건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한국인이 바라는 이순신이란 근대의 이순신이다. 이는 시공(時空)을 뛰어넘은 근대 한민족의 전통을 만드는 이순신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의 가치관을 이순신과 이순신이 살았던 시대에 투영하려 드는 것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를 그대로 보려 하기보다는 지금의 시대적 요구를 이순신에 투영하는 것이다. 조선은 그래서 부정되고 원래 근대가 맡았어야 했을 봉건사회에 대한 부정은 이순신에 대한 신앙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이순신 신앙이란 그 자체가 전근대적인 것으로 한계를 가지며, 그것은 '한민족주의'(桓民族主義)의 한계가 된다. 폐쇄적이고 배타적이며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그리고 전제적이며 전체적인 것이다.

아니면 고구려로 상징되는 제국주의일 것이다. 일본의 제국주의를 닮아 우리도 제국주의 한 번 해보자!! 자칭 좌파들마저 제국주의 한 번 해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그 상처가 깊은가? 영토를 넓히고 더 많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침략을 하고 전쟁을 해야 한다. 사람이 죽고 문명이 파괴되어야 한다. 그것이 너무 당연하다. 지식인들에게조차 말이다.

아무튼 참으로 아쉬운 것이다. 일제강점기만 아니었다면 우리도 우리 한민족(칸민족)의 근대가 열린 시대를 저 일본처럼 낙천적이고 긍정적으로 볼 수 있었을 텐데...김옥균(金玉均/1851-1895/공주 출생)일까? 박영효(朴泳孝/1861-1939/수원 출생)일까? 유길준(兪吉濬/1856-1914/서울 출생)일까?

    '대한국인(대칸국인)이다!!'
    '대한국인(대칸국인)이니까!!'



이렇게 외쳤을 텐데...말이다.


과거는 현재를 아는 열쇠라는 말이 있다. 일본이란 나라는 우리 역사 속에 때로는 우호적으로 때로는 적대국으로 있어 왔다. 지금의 시점에서 볼 때, 일본은 우호국도 적대국도 아니지만 견제해야할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한일병합'을 통해서 우리의 민족성을 짓밟고 발전을 더디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한국의 현대사는 일본에 의한 '병합'에 의해 쓰여질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바야흐로 21세기는 세계화 시대이며 환태평양 시대이다. '하트랜드'(Heart Land) 이론에선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했다. 저 넓은 태평양을 두고 세계로 진출하기 위한 한국의 몸부림은 일본이란 장애물에 의해서 지체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계속 될 것이고, 일본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영원한 투쟁과 경쟁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일본의 근ㆍ현대사를 바로 알고, 이를 통해 우리의 참된 역사를 알고, 새로 올 시대에 대한 대비가 필요할 것이다. 메이지유신, 그것은 일본의 현대사에서 가장 큰 변혁이었으며, 지금의 눈부신 성장을 있게 한 밑거름임에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막부시대의 쇄국 정책 아래서도 '난학'(蘭學)이라는 네덜란드 학문을 받아들였다. 막부는 이러한 난학의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장려하는 입장이었으나, 서적을 통해서 들어오는 자유와 평등이 퍼져나가는 것을 우려하여 사상적인 측면에서는 탄압을 가했다. 이중성의 극치였다고 표현해 볼까?? 이제 우리 후손들에게 남아있는 절대과제는 '대칸국(대한국)과 일본 간의 반목을 뛰어넘어 동질성을 찾아내서 그것을 복원시키고, 저 밀려들어오고 있는 중국의 패권주의적 '동북공정'에 맞설 수 있는 '마지막 보루'로서 양국이 손을 잡고 민족적인 그 소임을 다 해야 할 것이다!! 2020년 안에 엄청난 '죽음의 물결' 곧 '인구축소의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음을 직감해야 하지 않겠나...!! 그러한 미래적 흐름에 대처할 수 있는 진정한 '역사적 진실'을 담은 '료마전'(龍馬伝)이 다시 태어나길, '한민족'(칸민족)의 동일성을 지닌 일본민족에게 '진심으로' 부탁하는 바이다. 우리 함께 '공존'하기 위해서...벌써 잊어버렸는가...100년전의 '그 트라우마'를...일본이여, 깨어나라!! 무슨 '사과'인가...'사죄'가 옳은 표현이 아니던가!!...'그 말' 한 마디가 그리도 거부되는가!!...'그 트라우마'를 안겨준 원인 주도자의 후손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왠, '수상'이란 말인가!!...그는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인 것을...샬롬.

<Created/20100728> <Updated/20100729><20100731><20100801><201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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