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뎀보의 세월따라 노래따라] '노래'는 우리의 역사요 삶 그 자체입니다...지난날 일제의 강점기의 굴곡진 우리의 역사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는 우리의 삶을 그대로 재현합니다...

['엔카'에 관한 '반야월'의 증언] "1932년 '고가 마사오'에 의해 처음 발표된 일본의 엔카는 우리 가요를 도둑질하여 모방한 일본의 가요"


[제1부] 일본 엔카 가요계의 두 거목(작곡자/가수)은 한국인이었다!! <자세히보기>


[1928년에 발표된 '황성옛터'가 대중가요 1호]

일제 식민지 시절, 나라를 빼앗긴 설움은 고스란히 우리 가요 밑바닥에 깔려 있다:

    ◆2004년 당시 생존해 있던 한국 가요계 작사자/작곡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 모임은 반야월 선생님이 주도하셨다. 그리고나서 8년후 2012년 3월 26일에 반야월(맨앞 왼쪽 6번째 회색양복 정장) 선생님은 별세하셨다. 그분은 일제 강점기 때 활약하셨던 대중가요 예술인 총57명 중 그 마지막 생존자였었다. 이제 일제 강점기 중에 활약하셨던 '대한족'(大桓族)의 가요인들은 모두 다 역사 속으로 옮겨지셨다!! <본 이미지를 제공해주신 '이기정' 님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화중광야 제공)

    "전통가요를 살려야 한다. 우리의 전통가요는 저항가요다. 우리 민족의 눈물겨운 이야기는 우리의 가요 노랫말에 살아 있다. 서울에 살았던 고가 마사오가 우리나라의 가야금 소리, 피리 소리, 장구 소리, 우리 가요를 도둑질해 간 놈이다. 1932년 일본 엔카의 효시는 1928년에 발표한 '황성옛터'를 모방한 것이다. 이예리나가 노래한 '황성옛터(전수린 작곡, 왕평 작사)'는 대중가요 제 1호이자 전통가요의 효시다.

    100년 전인 1928년, 일제식민지 시절 16세의 이예리나는 '황성옛터'를 노래했다. 노래하는 가수나 객석에 있는 우리 동포들은 함께 울면서 합창했다. 이런 광경에 놀라서 일본 현병들은 호루라기를 불며 허둥대다가 결국 무대의 전등을 소등시켰다. 노래를 한 가수나 악극단, 객석에 있는 동포들 모두 종로경찰서에 연행된 사건으로 우리의 저항의식은 시작되었다."

    "노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 가요의 밑바닥에는 저항의식이 강하게 저려 있다. 저항가요에는 우리의 슬픈 역사가 들어있다. '타향살이' '눈물 젖은 두만강'의 노랫말에 나오는 하나하나의 단어는 값싼 사랑 타령이 아니다. '그리운 내 님이여~'에서 '님'은 내 조국이다. 내 가사에는 혁명이 있고 일제의 총칼과 싸운 글이다."

    <'울고 넘는 박달재' 작사 대중가요 국보1호> <브레이크뉴스/자세히보기>


['고가 마사오'에게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ㅡ 정설(精說)인가 풍설(風說)인가??]

일본에서는 우리나라의 '트로트음악'에 해당하는 대중음악 장르를 '엔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의 의미는 '恨歌,艶歌,戀歌,演歌' 등 일본국민의 노래에 대한 시대적 마음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며, 또한 위의 3가지가 발음은 모두 '엔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엔카 하면 보편적으로 '演歌'로 쓰지만, 위의 어느 것을 쓰던간에 모두 같은 뜻과 같은 장르의 음악이라고 한다.


'고가 마사오'(高賀政男)는 '한국인'이었다는 '설'이 무성한데...과연 그는 '한국인'이었을까?? 그가 '한국인'이었다는 진실(?)은 지금의 '일본엔카협의회'(日本艶歌歌謡協会) 회장 '다카키 이치로우'(高樹一郎) 씨의 증언이 있었기에 그 신뢰성을 지니게 된다. 그는 지난 1월 3일, '아이넷TV'가 방영한 '한국인의 소울ㅡ트로트 제2부'에서 이같이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 이와 관련해서 '고가 마사오'가 '한국인'이었다는 확증된 기록들은 아직 입수하지 못하였다. 다만 그가 일제시대에 한국에 왔고, 인천에서 종형 집에서 소학교를 다녔고, 서울로 옮겨서 '선린상업학교'(현 선린상고)까지 졸업하였고, 1924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는 메이지대학을 졸업하였다.

◆위 이미지들은 영상 캡쳐한 것임. (화중광야 제공)


서울 선린상업학교에서 음악활동을 하였고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 재학 중에 음악활동을 한 것이 공식적으로 밝혀진 그의 일반적인 신상과 활동내력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인'(부친계 혹은 모친계)이었다는 '진실'은 아직 밝혀내지 못하였다. 다만, 필자는 이번 작업을 통해서, 한 가지 진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가 마사오는 서울 남대문 가까이 살면서 어린 동생을 업고 다닐 때 술집에서 흘러나오는 조선 가락에 귀를 기울였다.'

    <한운사, '한국적 최강 CEO 장기영: 뛰면서 생각하라', 서울: 동서문화사, 2006, p.523-524> (화중광야 소장).


장기영(張基榮/한국일보 창업자/1916-1977) 씨와 고가 마사오(1904-1978)는 선린상업학교 선후배지간이었다. 장기영 씨는 1934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 후 '조선은행'(오늘의 한국은행 전신)에 입사하였다. 1969년에 고가 마사오가 해방 후 처음으로 서울에 왔을 때
(아래 신문기사 참조), 장기영 씨는 신문사(한국일보) 사장으로서 보다는 선린상업학교 후배로서 그를 따뜻하게 맞았다고 전한다. 위 책을 읽어보니, 장기영 씨가 고가 마사오 씨를 만날 때는 자신이 총애하던 한국의 작곡가 길옥윤(吉屋潤/요시야 준) 씨를 대동하였다고 전한다. 그렇다면, 길옥윤과 고가 마사오 두 분은 퍽이나 교분이 있는 사이였을 턴데...함께 나누었을(?) 가요관련 자료들(예/두 분의 협연 등등)이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다. 나중에 관련자료가 입수되면 참고해 볼 것이다:

◆모교 선린상고 동문회 초청으로 45년 만에 한국에 도착한 고가 마사오 씨. (경향신문 1969.4.18 발행).


'엔카'(演歌)는 한마디로 일본인의 고유한 정서를 담아 부르는 신식 가요형식을 일컫는다. 일본에 서양악이 처음 소개된 것은 카톨릭교의 보급과 함께 찬송가와 서양민요에 가사를 만든 노래가 불려지면서 부터이다. 그러나 이미 554년경에 백제의 음악이 일본에 전해져 생활 속에 영향을 미쳤였다고 전한다. 이 백제의 음악을 일본사람들은 '구다라가꾸'(久太良樂)라고 불렀다. 엔카가 생겨나던 1920년경, 일본은 영국, 미국, 그리고 프랑스 등 세계열강의 음악과 맞닿아 있었으나, 지리적인 접근성 등의 이유로 이미 한반도 음악의 영향도 받고 있었다.

1930년대에 접어들면, 본격적인 유행가시대가 전개되므로 1920년대와는 상황이 다르다고 볼 수 있는데, 30년대 일본 유행가의 영향은 자체 기반 없이 전적인 수용 일변도로만 이루어졌던 20년대와는 양상을 조금 달리한다고 하겠다. 1930년대 일본 유행가의 영향은 우선 음반이나 가사지 등 당시 자료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는 몇몇 이름들에서 손쉽게 찾아 볼 수 있으니, '고가 마사오'(古賀政男), '에구치 도시'(江口夜詩), 竹岡信幸(다케오카 노부요키)등이 가장 대표적인 예이다.

그들 중에서 '고가 마사오'는 자신의 노래가 한국에서 사는 동안, 듣고 배워 익혔던 한국의 전통음악에서 직접 차용해 온 것이라고 토로하였다:


◆'고가 마사오'는 자서전 '幾山河'에서 자신이 작곡한 엔카의 멜로디 중에서 특히 애절한 멜로디는 한국의 멜로디에서 가져 온 것이라고 고백하였다. <岡野弁, '演歌源流・考: 日韓大衆歌謡の相異と相似', 1988, p.274-275> (화중광야 소장) ㅡ 외부의 도움없이 어려운 사정 속에서 자비량으로 꾸려나가고 있는 <화중광야>의 '필적'(筆跡) 사역을 공감해 주시는 김OO 선생님에게 본 귀한 책을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해주신데 대해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합니다.


본 책에서 길옥윤 씨는 '고가 마사오' 씨가 1968년 어느 주간지와의 직접 인터뷰를 통해서 자신의 음악성에는 한국의 민요와 민속악기와 그 정경(情景)이 내포되어 있다고 밝혔다. (위책 p.38).

이러한 진실에 대하여, 고(故) '반야월'(半夜月) 선생은 2009년 인터뷰<브레이크뉴스/자세히보기>에서 '서울에 살았던 고가 마사오가 우리나라의 가야금 소리, 피리 소리, 장구 소리, 우리 가요를 도둑질해 간 놈이다.'라고 '고가 마사오'를 혹평하였다.

그리고 반야월 선생은 '1932년 일본 엔카의 효시는 1928년에 발표한 '황성옛터'를 모방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러한 '역사적 진실'은 필자가 최근에 입수 해놓은 '고가 마사오'의 '1932 엔카 악보집'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고가 마사오'의 애창곡집 1집의 표지와 악보 '影を慕て'. <古賀政男, '古賀政男愛唱曲集 1', 東京: スバル, 1932> (화중광야 소장) ㅡ 본 귀한 책을 입수할 수 있도록 어려운 필자에게 편의를 제공해주신 '이기정' 님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노래 '影を慕て'(님자취 찾아서)는 작곡가 '고가 마사오'가 자신의 '삶의 고뇌 · 절망에서 혼의 절규'가 담겨있다고 전한다. (위키피디어/자세히보기).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고가 마사오'는 평생 미혼으로 살다가 양자를 입양하였다. 그리고 이 노래는 19311월에 발표되었고, 1932년 3월에 가수 '후지야마 이치로'(藤山一郎)가 불러서 대단한 인기를 얻었던 '쇼와가요곡'(昭和歌謡曲)이었다고 전한다. (YouTube/듣기).

'고가 마사오'는 '콜롬비아레코드'와 '테이치쿠'(帝蓄)레코드'에서 주로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같은 시기 한국에서도 '콜롬비아'와 '오케레코드'를 통해 많은 곡들이 소개되었다. 일본에서 지금까지 널리 불리는 '酒は淚か溜息か', '丘を越えて', '影を慕いて' 등은 모두 '채규엽'(蔡奎燁/1906?-1949)이 불러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 '희망의 고개로', '님자취 찾아서' 등의 제목으로 알려졌고, 고가 멜로디의 걸작으로 꼽히는 '東京ラプソデイ'(동경라프소디)는 김해송(가수 이난영의 남편, 625 때 행방불명)이 '꽃서울'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렀다고 전한다. 일제시대 한국에서 발매된 대중가요(일제시대에는 '유행가'로 통칭) 가운데 고가 마사오가 작곡한 것은 현재 40여 곡이 확인되고 있으나,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것도 많이 있으므로 전체 수는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한다.

따라서, 일본의 '엔카'가 공식적으로 태동된 것은 '고가마사오 애창곡집'(古賀政男愛唱曲集) 악보집이 발간되던 1932년으로 보는 것이 국내 음악예술인들의 공통된 견해였던 것이다.

다음은 본 악보집 제1권에서 첫 번째로 실린 '影を慕て'(오늘날의 곡목/ '影を慕いて') 연주를 작곡자 자신이 직접 기타로 연주한 것과 미국의 '퍼시 페이스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두 곡을 싣는다:

◆CBS, '不滅の古賀メロディ一' (PERCY FAITH JAPAN CONCERTS/MASAO KOGA MELODIES) 해설서. (화중광야 소장)




'影を慕て'(님자취 찾아서) ㅡ 고가마사오 기타연주 (화중광야 소장) <Updated/20160521>




'影を慕て'(Kage O Shitaite) ㅡ Percy Faith Orchestra (화중광야 소장) <Updated/20160521>


[부록 1] Percy Faith Orchestra 대표곡 ㅡ 'A Summer Place'(한국인이 좋아하는 팝 '피서지에서 생긴 일' 영화주제곡)

[부록 2] 고향찾은 '고가 마사오'

◆1955년 4월 1일, 고향 후코오카현 '오카와시'(大川市) 시승격 1주년 기념퍼레이드에서 '고가 마사오'가 손을 들어 시민들에게 화답하고 있다. 이 때만해도 일본에는 그는 고향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다고 전한다. <화중광야 제공>.


☞<무지개타고오신 '꼬미아리랑> (20120416/자세히보기) <Updated/20160521>

<Created/20120409> <Updated/20120416><20120417><2016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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