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뎀보의 세월따라 노래따라] <떠날 때는 말없이> (작사/유호ㅡ작곡/이봉조ㅡ노래/ 미)

<떠날 때는 말없이>

<화중광야가족> 그리고 <김동기님가족>에게 드리는 추석선물입니다!!

 

1964년 2월 <맨발의 청춘>의 성공 후 김기덕 감독이 같은 해 5월에, 다시 <신성일-엄앵란 >커플을 주인공으로 해서 만든 영화가 <떠날 때는 말없이>이다. <맨발의 청춘>의 시나리오 작가인 서윤성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도 썼으며, '가난한 청년-부잣집 딸' 커플을 주인공으로 한다는 점도 같다. <맨발의 청춘>이 '가난한 청년-부잣집 딸' 커플이 계급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동반자살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떠날 때는 말 없이>는 두 사람이 결합 이후에 겪는 일들에 초점을 맞춘다는 점에서 대조적이다.

필자가 <떠날 때는 말없이>를 본 것은 1964년(고교1년) 때 무척이나 방황하던 때였다. 상업고등학교(대전상고)를 진학하지 못한 반항심이 못내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리하여 1학년 여름방학 중에 <소년병>(5년) 시험에 합격하면, 입대하여서 마음먹은 대로 해외 근무도 가능할 것 같다는 기대감 속에서 학교 공부는 제쳐두고...,<국어/영어/국사> 이 세과목에만 다시 공부하는 중이었다. 이 영화는 물론 <학생입장불가> 영화이다. 그렇지만, 집 바로 건너편 <호서극장>의 선전부장(양OO)님이 필자를 무척이나 아껴주셨다. 중학교 3년 가을에 충청남도 사생대회(미술대회) 참가자로 뽑혀서...수채화(풍경화)를 그리고는 귀가 중이었다...나의 화판을 보신 양 부장님이...시간나는대로 놀러오라고 하셨다. 저녁 먹은 후, 집에다는 친구집에 공부하러 갔다 온다 해놓고는...길 건너 몰래 선전실(영화 간판실)에 들어가서...양 부장님이 그리는 일을 보고...가르침도 배우고...파레트도 닦아주고 나면...비상문을 통해서 영사실로 데리고 가서 영화도 관람시켜 주셨다...그곳은 아무나 못들어오는 금지구역이었다. 어찌보면...그러한 환경이 필자에게는 학생의 신분으로서 <불가영화>를 보게 되는 절호의 기회였으며...타고난 <딴따라 기질>이 작동하였던 것인데...그것이 무참히도 짓밟혀 버린 것이다. 교대(공주교육대학)나 사대(공사범대학/지금의 공주대학교) 나와서 '선생'이 되는 것이 집안의 유일한 바램이었었는데...그 때문에...필자는 서울로 유학을 갈려고 그리도 몸부림 쳤던 것이다...짬만 나면, (공산성>(公山城)에 올라가서 금강교(錦江橋) 너머로 펼쳐지는 금강 물줄기의 여울 따라 <가곡>을 부르고 나면..속이 후련함을 느끼곤 하였다.

아래 이미지 중에서 포스터를 보니..49년전의 고교시절의 추억이 문득 떠오른다. 그 당시 극장가에서 특히 간판실에서는 각 배우마다 얼굴의 특성을 잘 살려줘야만이 많이 닮는다는 풍설이 있었다. 대도시에나 가야 스틸(사진)이나 포스터를 환등기(확대기)로 비쳐서 그대로 본떠서 그려내니 많이 닮는다. 그 외의 지방 소재 극장가에서는 일일이 뎃상을 해야 한다. 간판에다도 원고지 모양의 사각형을 그리고 포스터 및 스틸에다는 연필로 원고지 모양의 사각형을 그리고나서 1미터 길이의 대나무 끝에다 백묵을 끼우고서 그려간다. 그리고 나면, 엷은 갈색 페인트로 스케치해간다. 그리고는 백목 자국을 지우고는 그려나간다. 그때 한국 영화배우 중에서 코가 제일 잘 생긴 남녀배우가 전해졌다. 남자배우로는 <김진규>(배우 김진아 씨 부친)요, 여자배우로는 <엄앵란>씨였던 것으로 기억난다. 그리고는 시내 주요 거리 마다 선전용 광고판(베니다 1장 크기)을 내건다. 대개 실제 영화 포스터를 바른 후에, 그 위에다 아교를 입힌다. 비 맞아도 울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는 영화 제목 같은 것이나 기타 글씨들은 실제로 그린다. 아래 이미지 포스터에서 <떠날 때는 말없이>...이 글씨를 그린 기억이 떠오른다. 집에서는 아무도 모른다...알면...쫓겨날 판이었으니...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제공] [주제가 및 영화 대사 일부] [런타임/18:27]


[작사자 유호 선생의 회고] 대학 축제, 그 가면무도회에서 만난 두 사람. 둘은 사랑하지만 결국 비련으로 끝나고 만다는 내용을 이 노래는 담고 있다: KBS의 '가요무대'에서 이봉조의 추모 프로그램을, 더구나 피날레에 현미가 부르는 <떠날 때는 말없이>를 들으면서 나는 눈시울을 적셨다. <현미/자세히보기>. 이 노래를 그가 작곡할 무렵, 이봉조와 나는 똑같이 'TBC' TV에 전속돼 있었다. 그는 악단장, 나는 드라마 작가로 자주 만났다. 성품에 걸맞게 그의 목소리는 걸걸했다. 그가 나에게 작사를 의뢰할 때는 언제나 하는 말이 있었다: '작사하면 유 선생님밖에 더 있습니까.' 그날도 예의 말이 오간 후 그는 영화대본 '떠날 때는 말없이'를 디밀었다. '곡은 다 돼 있습니다.' <1> '그날 밤 그 자리에 둘이서 만났을 때/똑같은 그 순간에 똑같은 마음이/달빛에 젖은 채 밤새도록 즐거웠죠/아, 그 밤이 꿈이었나 비오는데/두고 두고 못 다한 말, 가슴에 새기면서/떠날 때는 말 없이 말 없이 가오리다. <2> 아, 그날이 언제였나 비오는데/사무치는 그리움을 나 어이 달래라고/떠날 때는 말 없이 말 없이 가셨는가

[이미지/화중광야제작 제공] 작곡자 이봉조 선생 25주기기념 가요무대에서 아내 현미 씨가 <떠날 때는 말없이>를 애창(哀唱)하고 있다. <KBS가요무대/2012.8.20 방영>. 오른쪽은 이봉조 선생이 수상한 자리에서 두 주연배우 신성일-엄앵란 커플이 축하해주고 있다. 1960년대 한국영화의 부흥기로 인식된다. 그러다가 신군부 세력들이 정권을 잡고부터 한국의 예능 문화계는 찬서리를 맞는다. 그 이후로 오늘에 이르도록 이런 주옥같은 옛영화들은 '충무로'와 함께 사라져 버린다. 물론 영화계 종사자들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그리고는 프리메이슨 주도의 <K-Culture/K-Pop>이 등장해서 한국영화는 옛정서는 사라지고...'헐리우드化' 되어 가고 있는 즈음이다. 보통 민족적 정기의 재생 및 부활이 절실한 때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2013.9.18/밤/보정하다>


[영화 시놉시스] 고등고시를 준비하면서 직장에 다니는 명수(신성일)는 자기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 딸인 미영(엄맹란)과 티격태격하다 사랑에 빠진다. 이를 안 미영의 아버지(김승호)는 미영을 은행장의 아들인 준호(윤일봉)과 결혼시키기 위해 명수를 부산 지사로 내려보내려고 한다. 명수가 떠나던 날, 미영은 부모의 대화를 몰래 엿듣다 지금의 어머니가 생모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된다. 충격을 받은 미영은 집을 뛰쳐나가 명수에게로 가고 그날로 두 사람은 동거를 시작해 딸 옥이를 둔다. 명수가 다니던 출판사가 망하자 미영은 아동복을 지어 돈을 벌지만 살림은 어렵기만 하다. 미영의 친구와 약혼한 준호는 그런 미영이 미영 부모님과 화해하도록 돕는데, 그러느라 미영이 준호와 만나는 것을 목격한 명수는 미영과 준호의 관계를 의심하고 괴로워한다. 잔뜩 술에 취한 명수는 밤늦게 집에 온 미영에게 대문을 열어주지 않고, 겨울비 속에 두 시간을 서있던 미영은 폐렴에 걸려 죽는다.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 명수는 미영의 시신 앞에서 통곡한다. 미영의 부모는 명수에게서 딸 옥이를 빼앗는다. 딸을 되찾기 위해 명수는 천신만고 끝에 고등고시에 합격한다. 외무부에서 일하다 미국 대사관으로 발령을 받은 명수는 딸 옥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고 싶어서 미영의 부모를 찾아가나 그들은 옥이를 내놓지 않는다. 그러나 명수가 비행기를 타기 직전 옥이가 달려와 `아빠'를 부르고 부녀는 함께 떠난다.

◆가라오케연주(화중광야제공)

[영화제작 숨은 이야기] 1960년 4.19혁명으로 잠시 민주화의 물꼬가 트이는듯 했으니, 군사정부는 곧 창작 자유에 대한 영화인들의 기대를 잠재웠다. 이같은 정치 사회적 불안에도 불구하고, 우리 영화는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6년)에 따른 기대심리와 늘어나는 수출에 편승하여 양적 팽창과 함께 질적 향상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특징은 뭐라해도 초반기에 고개를 든 <강대진> 감독의 <박서방>(1960년), <마부>(1961년)와 같은 서민물의 성행과 대중소설과 대칭되는 단편소설 등 순수문학이 원작으로 제공된 문예영화의 활기, 그리고 일본의 인기작가 <이시자카 요지로>(石坡洋次郞) (오른쪽 사진/wiki제공/자세히보기원작 소설 <양지바른 비탈길>(陽のあたる坂道)을 <유한철>이 한국에 맞게 번안·각색한 <가정교사>(1963년), <그 녀석과 나>를 각색한 <청춘교실>(1963년), <푸른 꿈은 빛나리>(1963년)와 <진흙투성이의 순정>(泥だらけの純情)을 그대로 베낀 <맨발의 청춘>(1964년), <만가>(1965년) 등 왜색 영화가 일으킨 청춘영화의 유행이었다. 이로 인해 <말띠 여대생>(1963년), <떠날 때는 말없이>(1964년), <연애졸업반>(1964) 등 유사 청춘물이 양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김종원, 정중헌, '우리 영화 100년', 서울: 현암사, 2001, P.266> (화중광야 소장).

필자가 한참 극장간판에 몰두하던 이 시기에 <극동흥업영화주식회사>의 대표 <차태진> 씨의 중재로 <신성일-엄앵란> 커플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극장가의 큰 화제거리였다!!

 
 
<Created/20130916> <Updated/20130917><201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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