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광야 복음선교사역 - 한글 첫성경의 뿌리를 찾아서]

한글 첫성경인 존 로스 선교사님이 번역, 발행하신 '예수셩교젼셔' 성경은, 이수정역의 최초개정판이 나온 이래, 1893년에 더 이상 사용하지 않기로 내한 선교사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바로 이 해에 선교사공의회(Council of Missions)가 구성되고, 이 기구에서 네비우스 선교방법론이 공식적으로 채택되고, 그리고 소위 '선교지 분할 협정'(Comity Arragement) 역시 이 해에 이뤄진다. 참으로 불행한 역사적 과오를 낳고 말았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교단별로 지방색이 드러난 것은 이러한 잘못된 출발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화중광야)


존 로스의 유산(遺産)

글/그레이슨  번역/Shariah Chung  편집/화중광야




존 로스(1842-1915) 선교사가 기독교 선교의 역사상 가장 크게 기억되는 인물에 속하지는 않을 지라도, 당시 활동했던 선교사 중에 가장 뛰어나고 성공한 인물로 기려지기에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거의 40년의 세월동안 중국에 뿌리를 내리고 거주하면서, 그는 만주와 한국 지역의 개신교 교회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11개 언어를 숙지함으로써 성경 번역, 주석에 지대한 공헌을 했고, 선교 사역의 이론과 실재에 있어 새로운 장을 엶과 동시에 중국의 역사, 문화 및 종교에 새로운 사상들을 불어넣었다. 방대한 신학적 지식과 지적 능력을 갖춘 이 선구자적 선교사의 이야기는 동북 아시아선교 역사 가운데 관심 받지 못하고 음지에 가려진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


존 로스는 1842년 7월 6일, 스코틀랜드 동북지역에 위치한 모레이 퍼스(Moray Firth)의 인버니스(Inverness) 북쪽, 발린토어(Balintore) 마을에 가까운 이스터 마치(Easter March)에서 태어났다. 출생한 생가인 브룸톤 카티지(Broomton Cottage)는 아직 남아있다.

그의 아버지는 한 재단사였고, 그의 어머니는 가까운 마을인 펀(Fearn)에서 한 학교 교사로 일했다. 19세기 중반, 스코틀랜드 동북지역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부모님 모두가 전문적인 기술을 갖고, 직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었다.

존 로스 선교사가 비록 훌륭한 교육을 받거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가족은 작은 마을에서 리더의 자리를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었으며, 더 넓은 세상의 존재를 이해한 사람들 이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존 로스가 성장하고 인격 형성을 하는 데 있어 하나의 영향을 끼쳤다. 먼저, 그가 자라난 곳에서 여전히 게일어를 썼다는 사실이다. 이로 인해 존 로스가 처음 배운 언어는 게일어가 되었다.

그의 가정 배경으로 인해, 존 로스는 분명 진학 전부터 영어를 사용했으며, 유년 학창시절부터 영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어릴적부터 두개의 다른 언어를 배워야 했던 경험은 훗날 나이가 들어 다른 언어를 배우는 과정에 있어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두번째 성장 요인은 작은 마을의 테두리를 벗어나 더 넓은 세상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 재단사와 한 교사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구두가게에 들르는 사람들의 대화와 그의 선생님, 즉 어머니로부터 듣는 이야기를 통해 존 로스는 분명 더 넓은 이 세상을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발린토어는 스코틀랜드의 산악지역에 위치한 외딴 마을이 아닌, 대륙을 오가는 상선들이 지나가는 주요 수로 옆에 위치한 농업, 어업 마을이었다. 모레이 퍼스는 로스의 집에서도 보이는 곳에 있었다. 항구를 오가는 배를 보면서 어린 소년 존 로스는 분명 저 넓은 곳에 대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의 삶에 세번째 주요 영향을 끼친 것은 바로 그의 교회였다. 존 로스의 가족은 기존의 '스코틀랜드교회'(Church of Scotland)의 교인들이 아닌 더 작은 단위의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Scotland)에 속해 있었다.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는 선교에 대한 열정으로 잘 알려진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 개 교파 이상의 교회가 있는 지역에 살았다는 점은 로스로 하여금 교파간 경쟁 보다는 상호협력의 필요성에 대해 생각하게도록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존 로스의 정규 교육에 대해서는 그가 1865-1870년에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의 신학과정을 거쳤다는 것 이외에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 기간 동안, 존 로스는 히브라이즈(Hebrides)의 외각지역에 있는 리스모어(Lismore), 글래스고(Glasgow), 인버니스(Inverness), 스토노웨이(Stornoway)나, 스카이 아일(the Isle of Skye)에 있는 포트리(Portree) 등지의 여러 연합장로교회에서 교회 봉사를 했다.

한 선교사라는 직무에 대한 존 로스의 생각은 그가 속했던 교파의 외국선교위원회의 서기관이었던 해밀턴 M. 맥길(Hamilton M. MacGill)이 1868년 9월 신학과정의 학생들에게 발표했던 연설에 고취된 듯 하다.

그의 연설을 듣고 난 후,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의 갈릭 지방(the Gaelic community)에서 교회 봉사를 하는 것과, 중국 혹은 인도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기 시작했다. 3년이 넘는 고민과 맥길과의 상담 끝에, 존 로스는 마침내 중국에서 해외 사역을 위해 가기로 결정하였다. 일단 결정이 내려지자, 모든 일들은 빨리 진행되기 시작했다.

존 로스는 1872년 2월 27일, 그가 속한 교파 선교 위원회로부터 중국 발령을 공식적으로 받았다. 같은 해, 3월 20일 연합장로회 선교사 안수를 받았고, 3월 27일 M. A. 스튜워트(M. A. Stewart)와 결혼하였다. 결혼 이후 존 로스는 부인과 함께 바로 중국행을 하였고, 1872년 8월, 산동반도의
芝不(지부/지) - 煙臺/烟台(연대/얀타이의 옛 지명)에 선교 사역을 하기 위해 도착했다.



선교사로서의 커리어

중국에 존 로스가 도착했을 당시, 지프는 알렉산더 윌리암슨 (1829-90)이 이끄는 연합장로회(United Presbyterian Church)의 선교사역의 중심이었다. 당시 알렉산더는 중국 북부 지방에서
'스코틀랜드 성경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의 대표도 겸임하고 있었다:

<편집자/참조>
'조선인은 대단한 지적 능력이 있으며 예리하고 탐구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결단력을 갖춘 자랑할만한 민족... 조선은 위대한 가능성의 나라...'
(영국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암슨의 글 (1870) )

첫 전도자이자 첫 복음전파자 인 선교사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韋廉臣)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 목사로서 1863년에 중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먼저 상해를 거쳐 산동성 치프에 자리를 정하고 1865년 이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The 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 북영성서공회)의 중국 지부의 총무를 겸임하며 일생을 중국과 만주를 위해 선교하는 한편 한국 선교에 대해서도 매우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국선교에 대한 그의 가장 큰 공헌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 관한 광범위한 자료를 수집하여 이를 토대로 1870년에 두 권으로 저술한 한국에 관한 몇 가지 설명을 곁들인 북중국, 만주, 동몽고 여행기(Alexander Williamson, Journeys in North China, Manchuria, and Eastern Mongolia with Some Account of Corea)이다. 이것은 한국을 서구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한 몇 안 되는 서적들 가운데 꼽히는 중요한 한국관계 고문헌이다.

당시 산동성 지푸(Chefoo)에 거점을 둔 윌리암슨은 다른 선교사들이 찾지 않은 내륙 지방을 탐색하며 전도하던 중 만주에서 왕래하는 한국인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윌리암슨은 1866년 4월 요동 지방에서 한국인 상인들과 여행자들과 접촉하고 그 달 19일 북경에 왔다 귀국하는 동지사 김익문 일행을 전장대(田莊臺)에서 만나 청나라 말에 능통한 사절을 통해 그들이 북경에서 여러 선교사들을 만났다는 사실과 북경의 런던 선교회에도 다녀왔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한국선교에 대한 열의를 더욱 불태울 수 있었다.


윌리암슨은 여러 곳을 여행했고 만주도 여러 차례 방문했었다. 여행 중에, 청(淸), 차이나 및 당시 서양인들에게 '고려문'(Corean Gate)라 알려진 곳들을 방문했다. 당시 조선 왕조가 외세를 엄격히 배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암슨의 만주와 고려문 방문들은 그로 하여금 만주 안에서와 한국을 향한 한 선교사의 존재의 필요성을 확신시켜주었다.

존 로스의 가족이 지프에 도착하자마자, 윌리암슨은 그들에게 만주의 필요성과 발해만(
渤海灣/Po Hai /Bo Hai Bay)의 물이 얼어 버리면 진입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그 전에 만주로 이전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이 시급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러한 권고로 인해 지푸에 정착한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아, 존 로스의 가족은 요하(遼河/Liao River:랴오허)의 입구이자 만주의 조약항인 영구(營口/Yingkou:잉커우)로 옮겼다.

1873년 2월 말, 로스 여사는 아들 드럼몬드(Drummond)를 출산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목숨을 거두었다. 존 로스는 선교 활동에 더욱 전념함으로써 그 슬픔을 극복한 것으로 보인다.

1870년대 초반에, 존 로스는 언어 연구와 만주, 한국 지역의 선교 사역 개척을 위한 계획에 집중하였다.
이 기간에 로스는 '은둔의 나라'(Hermit Kingdom)인 한국에 복음을 전파하는 최선의 방법은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생각을 확실히 굳힌 듯 하다.

1874년 중반까지 존 로스는 본토 중국어를 많이 깨우쳤고, 유교 고전서등을 읽기에 충분한 수준의 중국어와 만주 언어를 회화할 수 있는 지식을 습득했다. 초기부터 광활한 지역인 만주의 사람들과 그 지역을 알기 위해 광범위한 여행을 다녔다.

또한 고려문에 2번 방문함으로써, 존 로스는 언어 선생님이자 그의 성경 번역의 조력자가 되었던 이응찬이라는 한 한약상인의 도움들를 받았다. 즉, 만주에 도착한지 2년만에, 존 로스는 광활한 중국 동북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 뿐만 아니라, 기독교 성경을 전파함으로써, 폐쇄된 사회였던 한반도에 침투하여 들어가고자 하는 그의 계획을 이룬 것이다.

1876년에 존 로스는 'Mandarin Primer'라 불리는 중국어 교과서를 출간했다. 이 형식을 빌어 이응찬과의 언어 공부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1877년에는 '한국어교재'(Corean Primer)를 내놓았다. 이는 최초의 한국어 교과서로서 선교사들이나 무역 거래자들이 한국이 세계 시장에 개방되었을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도구가 되기 위한 목적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여러 차례 개정을 통해 1882년에 'Korean Speech, with Grammar and Vocabulary' 라는 이름으로 재출간 되었다.



<존 로스 지음/ 한국어교재 표지/1877>

존 로스의 언어 공부와 신약성경 한국말 번역이 그의 만주 선교 활동 전략에 방해가 되었던 것은 아니다. 1875년에 이르러, 그는 자신을 봉천(奉天/Mukden/ 현재의 沈陽/Shenyang)에 세웠고, 아들을 돌보아 주기 위해 와 있던 누이 캐더린(Catherine)이 동참했으며, 산동 반도에서 온 존 매킨타이어 (1837-1905)도 동참하게 되었다. 존 로스는 만주 지역에 효과적으로 한 증인을 세우기 위해서는 수도이자, '청 제국의 제 2대 도시'인 봉천 안에 한 크리스천 세력이 반드시 있어야 됨을 느끼게 되었다.


중국인들을 개종시켜서 기본 복음사역을 의존할 목적으로, 로스는 하나의 독립적인 교회를 위한 근간을 마련했다.


봉천 안에 하나의 선교사가 존재함은 존 로스의 3대 만주 선교 전략 중 하나였다. 그 만큼 또 중요한 것은 영구(營口/Yingkou) 조역항에서부터 수도까지 이르는 도로에 위치한 주요 마을들에도 한 기독교의 존재를 설립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 마을들이 복음의 지식을 전파하는 제 2의, 혹은 지역적 기반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 중 세번째는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광범위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개종한 중국인들을 말씀 선포자들이나 전도자들로 사용하는 기본 복음사역에 대한 것이었다.

봉천 사역의 핵심은 존 로스의 중국인 조력자였던 왕징밍(Wang Ching-ming)의 말씀선포(설교)와 선교 활동에 대한 노력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존 로스는 매우 초기부터 중국인 기독교인들을 임명하여 영구(營口/Yingkou)에서 봉천(奉天/Mukden)에 이르는 마을을 위해 봉사하게 하였다.

선교의 제1단계에서 이같은 접근법을 취함으로써, 존 로스는 만주 안에다 하나의 독립된 기독교 교회를 세우는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동 기간에, 존 로스는 영구(營口)와 봉천(奉天)에서의 사역을 나누어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와 6개월씩 교대하기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존 로스 가족이 영구(營口)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던 '아일랜드 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of Ireland)의 선교사들과 긴밀하게 협력하기로 합의하게 되었다.

한글 신약성경 번역일 시작부터 완료까지는 10년의 시간이 걸렸다.

초기 단계인 1877년 1월부터 1879년 3월까지, 존 로스는 한국 성경번역팀의 관리 감독이라고 하는 주요 책임을 맡았다. 존 로스가 1879년 3월에 스코틀랜드에서의 휴가를 떠났을 때는, 그 때까지는 번역일에 있어 다소 작은 역할을 하고 있던 존 매킨타이어가 1879년 4월-1881년 6월까지 2년의 기간동안 번역일을 담당하였다.

마지막 단계인 1881년 7월부터 1886년 말까지, 존 로스는 번역일을 완료했다. 휴가차 있는 동안,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 성경공회'(National Bible Society of Scotland)로부터 한글 신약번역의 발행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시도했으나, 본 성경공회의 지원은 본문에 들어가는 인쇄형태을 새롭게 만들어 주는 비용에만 그쳤다.

신약 성경 인쇄에 들어간 실제 비용은 기독교 억만장자 자선사업가인 로버트 아딩톤(Robert Arthington/1823-1900)의 도움으로 조달되었다.

<편집자/참조>

로버트 아딩톤의 기부금으로 인쇄된최초 한글성경 '예수셩교젼셔'

    Administrative/Biographical history: The missionary philanthropist Robert Arthington (1823-1900) was the only son of Maria and Robert Arthington of Leeds, England, and was brought up as an evangelical evangelist. However, following the disownment of his mother by the Leeds monthly meeting of the Society of Friends, Arthington himself left the Society, later becoming associated with the South Baptist Chapel. From the 1850s until his death, Arthington devoted himself to overseas missions, aided in 1864 by the inheritance of £200,000 from his father. As a premillennialist, Arthington's philanthropy was conditional upon missionary endeavours taking place in previously unreached areas. To this end, Arthington funded and encouraged such ventures as the Baptist Missionary Society and the London Missionary Society. For instance, in 1877 both the Baptist Missionary Society Congo mission, and the London Missionary Society Central Africa mission were established thanks to Arthington's benefaction, and in 1889 the Arthington Aborigines Mission was established amongst the hill tribes of Mizoram in North India, leading to subsequent evangelism in this area by the Welsh Calvinistic Methodist Mission and the Baptist Missionary Society.
    Further reading see: A. M. Chirgwin, Arthington's million: the romance of the Arthington Trust , London, The Livingstone Press, 1936. (자세히보기)


성경번역 기간 동안, 존 로스와 존 맥킨타이어는 번역팀을 관장하였는데, 그 구성원들은 몇 년의 시간 동안 다양하게 바뀌었다. 그래서 그 중 몇 명의 이름들만 알려졌다.

성경번역 작업은 기본적으로 '문리역본'를 저본(底本)으로 삼고, 그리스어성경과 영어성경을 비교하였다.

<편집자/참조>
이 주제는 심히 중요한 주제이므로, 차후 별도 주제에서 다루기로 한다. 아직도 확연하게 밝혀지지 않은 이 분야를 밝혀낼 것이다. 그리하면, 지금까지 알려져 온 '한글성경역사'는 새로이 기록되어야만 할 것이다!!

원문의 4개 완성 번역본은 신약성경의 초반 부분 (누가복음/요한복음)이 1882년 인쇄되기 이전에 나온것으로 보인다.

초기 번역은 한국 북쪽 지역인 평안지방 (번역팀의 전원은 아니지만 대부분 이 지역 출신이었음) 사투리로 이루어졌다.

1886년 전체 신약성경의 번역 작업이 완료되었을 때, 존 로스는 당시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1859-1916) 선교사로부터 원문의 지방색에 대해 반박을 받았고, 이에 대해 서울에서 3-4명의 한국 사람들을 고용함으로써 원문을 표준 문법에 일치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편집자/참조>
이렇게 해서 언더우드 선교사가 로스역본을 한글 표준어로 바로 개정해서 발행하였더라면, 오늘날같이 엉터리 번역에 의한 용어들로 인하여 혼란을 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기독교 역사에 있어 존 로스의 신약역본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번역본의 일부는 만주 지역의 한인회(韓人會) 뿐만 아니라, 외국 선교사들이 1884년과 1885년 한국에 들어오기 훨씬 이전에 한반도에 배포되었다. 이 성경은 한국의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이 번역 출간한 1906년 이전 까지는 유일한 신약성경 완역본이었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존 로스의 성경 번역의 배포로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친표현은 아니다!!


1880년대, 존 로스와 '외국인 선교사위원회' 및 그의 본국 교회는 긴장 관계에 있었다. '외국인 선교사위원회'의 서기관인 해밀튼 맥길(Hamilton M. MacGill)의 말에 따르면, 존 로스는 '직접적인 선교사역'(direct mission work)에 전념하지 않는 다는 이유로 위원회의 비난을 받았다. 그의 '한글성경번역' 작업이나 그의 기타 연구 활동이 그의 적합한 선교활동들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1882년에 존 로스가 특정 소유지를 구입하고 '연합장로회신학원'(United Presbyterian theological hall) 학생들로부터 받은 기금을 사용한 했다는 이유로 위원회와 갈등이 빚어지자, 존 로스는 비난받고 있음을 느끼게 되었고 사직을 고려하게 된다. 이러한 갈등들 가운데서도, 존 로스가 선교사역에 대해 갖는 견해는 크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존 로스의 판단에 대한 신임을 엿볼 수 있는 한 가지 주요 사건은 그의 사수인 알렉산더 윌리암슨(Alexander Williamson) 사이에 있었던 의견 불일치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주에 정착한 지 2-3년 안에, 존 로스는 중국에서의 교파 활동들 센터가 산동(山東)에서 만주로 이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윌리암슨은 강력히 반대했다. 그러나 본국 위원회가 가졌던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존 로스의 의견이 우세했다.

1882년까지 만주에는 7명의 선교사가 있었는데, 이 숫자는 산동반도의 선교사 숫자보다 많았다. 존 로스는 1876년-1881년 휴가기간 동안, 1879년 초까지는 완성은 아니더라도 문자로 나와야만 했던 두 개의 역사적인 출판건으로 인해 분주했다. 만주는 한국과 중국 역사상, 자기 제국들이 크게 영향을 받은 민족들이 모여 살고 있던 본국이었기 때문에, 존 로스는 만주에 거주하면서, 동북 아시아의 지정학적 관점에 있어서 하나의 역사상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시 동북 아시아 역사에 대해 유럽 언어로 쓰여진 책은 없었기 때문에, 존 로스는 중국어를 역사적 언어로 사용하여, 이 지역에 대한 역사서 두 권을 썼다. 역사상 한국 왕조들이 만주를 광범위하게 통치하였기 때문에, 한반도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 처럼, 만주라는 내륙지방에 최대한 포커스를 맞추어, '한국역사'(History of Corea /1879)'를 썼다.

그는 당시 만주 지역의 성장에 세밀한 관심을 두었고, '만주인들; 중국의 지배왕조'(The Manchus; or, the Reigning Dynasty of China/1880'를 썼다. 이 책들은 책 자체를 위한 것 뿐만 아니라, 그가 '제대로 된' 선교사역에 가담하지 않는 다는 위원회의 비난을 받게 한, 번역작업을 무마시키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존 로스는 만주에서 일어나는 일은 동북 아시아 전역의 교회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믿었다.


이렇듯, 깊고 광범위한 학문적 노력과 그의 역사서에 표출된 관점은 존 로스의 종합적인 선교전략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1880년대, 존 로스의 선교적 관심들은 두가지 였다: 한글성경번역 완료와 중국 크리스천 사역들에게 더 높은 수준의 신학교육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더 중요해 졌다. 왜냐하면, 존 로스는 중국 모임(교회)가 자생의 발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중국 교회인들을 위한 정규화된 교육이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교회내의 장로의 역할에 대한 '장로회'(the Presbyterian)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높은 수준의 종교적 훈련이 선교사 안수를 받은 성직자들에게 중요한 것 만큼 평신도의 지도부에도 필요하게 되었다.

신학 교육에 대한 정식 프로그램은 1887년 최초로 제도화 되었고, 이로써 1896년 최초의 중국인 목회자들이 임직되었다. 성직자에 대한 정식 교육을 좀 더 정규화 시키기 위해, 신학프로그램이 1894년 제도적으로 수립되었고, 1898년에는 봉천(Mukden/奉天) 안에 하나의 신학원이 설립되었다. 이 '동북신학원'(東北神學院)의 초대 학장으로 존 로스가 임명되었고, 몇 년 동안 학장직을 맡았다.

이 신학원에는 초기에 로스를 포함하여 두 명의 강사로 시작하여, 추가적으로 4명의 선교사가 참여하였다. 2년 과정의 프로그램은 성경기록연구, 성경신학, 조직신학, 목회연구로 구성되어있었다.

존 로스의 선교사로서의 말년은 신학원의 행정과 건물 확장 및 신학 커리큘럼 개발에 헌신되었다. 이러한 활동이 그가 초기에 했던 선구자적, 실험적 선교사역에 비해 세속적으로 보일지라도, 현지 성직자를 개발하는 일은 존 로스의 관심에서 시작되었다.

이 기간의 신학 교육프로그램의 제도적 개발은 1890년대 중반에서 1905년 사이 만주에 큰 영향을 끼쳤던 당시 3대 주요 사건 - 중일전쟁(Sino-Japanese War), 의화단사건(Boxer Rebellion), 러일전쟁(Russo-Japanese Wa) - 이 있었던 만큼,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18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존 로스의 선교사로서의 활동은 초교파적인 노력에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 1874년부터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에 선교적 임무를 구분짓는 것이 거의 해결 불가능한 것으로 인식되었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방법은 이 둘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라고 제안한 사람은 바로 존 로스였다.

이 일은 1887년에 이루어졌다.

이 초교파적 활동의 이유는 각 교파와의 관계를 조화롭게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만주안에 하나의 '그리스도의 모임/교회'(Christ of Church)를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독립노회(presbytery)가 1890년 만주에 세워졌으며, 첫 번째 한 일은 향후 모든 회의들는 중국어로 실행, 기록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발전은 존 로스의 초교파적인 활동 및 로컬 리더십 개발을 위한 그의 의지로 가능했던 것이다. 존 로스는 self-propagation을 위해서는 자체 통치가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현지 전도자들에게 많은 재량권을 주었다.

하나의 선교사로서의 존 로스의 말년에는 선교학적 주제와 역사적 주제에 대한 많은 집필활동이 있었다. 1879년에, 비교파적이며 범선교적 단체인 '성경주석위원회'(Bible Commentary Committee)는 성격의 모든 책들에 대한 주석들은 중국어로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존 로스는 구약 성서의 <욥기>, <이사야서> 및 신약의 <마태복음>, <야고보서> 등에 대한 주석집필 요청을 받는다.

그의 마지막 15년 동안, 존 로스는 4권의 책을 썼으며, 그 중 한권은 사후에 발간되었다. 그 중 2권은 그의 만주에서의 자신의 헌신들을 다룬 전형적인 선교사역에 대한 책이었다. 미지막 2권은 특히 꼼꼼하고 탄탄한 연구에 늘 생각의 기준을 두었던 사상가로서의 존 로스의 역할을 반영하고 있다.

'만주의 선교방법론'(Mission Methods in Manchuria/1903)에서 그는 만주에서 선교사역를 시작했을 때 사용했던 몇가지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이 방법은 다음의 3가지 주요 원칙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그것은 최고로 훈련된, 능력있는 후보자를 선교 현장으로 보내는 것, 2) 선교사들을 주요 정착지에만 상주시켜 현지의 개별 교회를 담당하고 있는 전도자와 설교자들을 관리하고 지원하는 것, 3) 마지막으로 기존의 현지 전례를 반영한 표현 방식과 전도의 수단을 독려하는 것이다.

'만주의 부흥에 관한 기적의 이야기'(Marvelous Story of the Revival in Manchuria /1908)에서, 존 로스는 1907년, 1908년 만주 모임들(교회들) 전역을 휩쓸었던 부흥활동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중국 종교의 기원'(Original Religion of China/1909)에서는, 역사적, 유교적 관점에서의 고대 중국 문자 독해에 대해 반박하면서, 중국에서의 초기 종교적 믿음의 형식은 다신론이 아닌 일신론이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그는 에드워드 타일러(Edward B. Tylor)에 의해 시작되고, 앤드류 랑(Andrew Lang)의 '종교 만들기'(The Making of Religion/1898)에서 제안된 원시적인 일신교에서 나온 종교적 진화론 사상이나, 빌헤름 쉬미트(Wilhelm Schmidt)의 '하나님의 생각의 기원'(Der Ursprung der Gottesidee/1926-55)의 12권 연구서적에 나온 입장과는 반대되는 견해를 취했다.

'중국인의 기원'(Origin of Chinese People/1916)에서는 당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초기 역사 시대부터 중국은 단일 인종 민족이었다는 견해와는 다른 입장과는 대조되는 자신의 원래의 입장을 보였다.

악화되는 건강 상태로 인해 존 로스는 1910년에 은퇴하여 에딘버러로 갔다. 에딘버러에서 그는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Edinburgh World Missionary Conference)에 참석하였다. 사망하기 전인 은퇴후 5년 동안, 그는 에딘버러에 있는 집과 고향마을인 발린토어에 있는 '올드샌드윅팜'(Old Shandwick Farm)인 한 농장을 보살피면서 시간을 보냈다. 에딘버러에 거주하는동안, 존 로스는 '패이필드연합자유교회'(Mayfield United Free Church)에서 한 장로로 있었으며, 1915년 8월 6일, 에빈버러의 '뉴잉턴 묘지'(Newington Cemetery)에 뭍혔다.


존 로스의 유산(遺産)


존 로스의 가시적인 유산은 만주와 한국 안에 개신교 모임(교회)를 세운 것과 <최초한글신약성경>(The First Korean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을 번역을 한 것이다.

두 번째 유산은 그가 집필한 문서들로서 새로운 세대의 선교사들의 사역에 공헌한 점이다.

이러한 공헌은 초기 한국에 파견된 감리교 선교사 윌리암 스크랜튼(William B. Scranton/1856-1922)에 의해 인정받았다. 그는 존 로스 선교사가 '한국어교재'(Corean Primer)를 통해 초대 선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것과, 신약성경 번역을 통해 한글성경의 기반을 다진 것, 그리고 그들에게 선교사들의 초기 동료가 될 수 있도록 현지인들을 개종한 것에 대해 그 공로를 치하하였다.

존 로스의 영적인 유산은 말로 형언하기도, 정의하기도 어렵다.

그의 영적인 유산은 그가 선교활동들을 실행한 방식이나 그와 같이 살고 사역했던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보여진다.

만주와 한국의 기독교 성장에 공헌했던 것은 분명 존 로스가 초기 중국,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가졌던 믿음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믿음은 존 로스가 한국에 대한 '자력-복음화'(self-evangelization)의 한 가지 방편으로서 신약성경을 번역한 것이요, '자립'(self-reliance)', '자력전도'(self-propagation), 그리고 '자치'(self-government)로 요약된다.

존 로스가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원칙을 고취했기 때문에, 한글성경번역에 동참하였던 초기의 다섯 명의 한국 청년들, 곧 이응찬(李應贊), 백홍준(白鴻俊), 김진하, 서경조, 서상륜(徐相崙)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한국의 회중/교회'가 외국 선교사들이 아닌 한국 기독교인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존 로스는 기독교 전도학과, 에큐메니컬 운동 그리고 중국인들과 중국 종교의 기원에 대한 그의 근본적인 사상들에 대해 그가 공헌한 것으로 기억되어져야 한다.

존 로스는 기독교 선교에 대해 깊은 의지를 갖고 중국의 종교, 문화에 역동적으로 관심을 보였으며, 분명 중국에서 마치 고향에 와 있는 것처럼 지낸 것 같다. 그의 고향인 발린토어에서는 이러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의 은퇴 후, 어느 날 존 로스는 마을 농부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존 로스의 아들이 계속해서 중국말로 말하고 있는 존 로스를 팔로 쿡쿡 찌르기 전까지 존 로스는 중국어로 말하고 있었고, 농부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다.

이는 그가 인생의 황혼기에서도 자신이 게일어를 하는지, 영어를 하는지, 중국어를 하는지 모를 정도로 중국을 얼마나 친숙하게 느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단적인 예이다.

<Created/20070605> <Modified/20070731> <Updated/2007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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