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중광야주제곡11] '치욘아리랑'(Chung's Ziyon Arirang) ㅡ 벌써 6년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본 '치욘아리랑' 즉흥곡 우리말 버전을 채보하고 연주까지 해 준 그 손길에 고마움을 전하며, 6년만에 공개하는 '치욘아리랑'...오늘 아침 유난히도 밝게 떠오르는 저 해에 실려 보냄은...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7백만 '한민족'(桓民族)을 위함이요..또 하나의 '영어버전'도 속히 저 빛을 볼 수 있도록 간구함이다...샬롬. (2011.9.13/ 이른 아침)

◆작곡-정재선 ◆채보연주-안연숙 ◆런타임 12:57

    [독백] ㅡ '치욘아리랑' ㅡ '나 만의 사랑'(His Love For Me)

    <1절>
    그대가 문 밖에 보였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환한 얼굴의 모습이 내 속으로 딩굴어옴을 느꼈기 때문이다/ 엉거주춤 망설임과 설레임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2절>
    그대가 문 안에 보였을 때 나는 고백치 않을 수 없었다/ 그 잔잔한 자태의 모습이 내 마음을 감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내 보듬치 못하고 추억 속으로 내몰리기 시작하였다

    <3절>
    그대가 내 곁에 다가 섰을 때 나는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따스함의 구리빛 손길이 내 지친 몸을 녹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막혔던 봇물이 터져 나오듯 나는 터놓고 말았다

    <에필로그>
    나 만의 사랑을/ His Love for Me/ 그대에게

    <2005.11.19/ 그대의 손길을 놓은 후>

['치욘아리랑'의 미니시놉시스] <요한복음 4:19-24>에서 예슈아님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올라가시는 중에, 사마리아를 지나가신다.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간 사이 수가성 우물가에 이르신다. 예슈아님이 수가성 여자를 만나주셨다. 그 여자는 예배의 참뜻을 잘 못 알고 있었다. 예슈아님은 예배란 이 여자가 강조한 '장소'(산과 예루살렘)인 'where we worship'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인 'what we worship'을 풀어주신다. 바로 '영 안에와 진리 안에 그 아버지를 예배하라'(4:24)고 가르치신다. 이것은 솔로몬 이후 갈라진 10지파인 북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사마리아'와 2지파인 남유다를 지칭하는 '유대'가 하나되도록  '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신 영적인 비유이셨다. 두 민족이 하나됨을 '이슬' 즉 '헤르몬산의 이슬'과 '치욘의 이슬'이 하나됨을 <시편133편>에서 예표하고 있다. 이러한 영적인 주님의 가르침을 3년전부터 전하고 기도해오던 중 때가 이르매, 주님이 보내주신 사역자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만남의 순간에...막혀 있었던 필자의 내적 음성이 '즉흥곡'으로 봇물되어 멜로디로 터져 나왔으니, 이름하여 <치욘아리랑>이라고 명명하게 되었다. 이것은 세속적인 연인간의 사랑이 아니요, 주님의 사랑을 승화시킨 '에픽' 곧 '서시'이다. 샬롬. (2005.11.20/밤에)

[성경어휘풀이] '치욘'(Tsiyown/H6726=예루살라임의 한 산. '건조한 사막'(H6723/치야)에서 유래. '기념비석'(H6725/치윤)과 동의어. 영어로 'Zion'(자이온)이요, 우리말로는 '시온'(Sion)으로 번역해 놓았으나, 필자는 1999년 11월 이스라엘 현지에서 이스라엘인들이 '시온'을 '치욘'이라 부름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치욘아리랑'의 성경적 배경 ㅡ 요한복음 4:19-25. 시편 133:1-3]

    4:19그 여자가 그 분을 향하여 말씀드리기를, '주님, 주님은 한 선지자 이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4:20우리의 조상들은 이 산 안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런데 유태인들이 말하기는, 사람들이 마땅히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 안에 있다.' 하더이다. 4:21예슈아님이 그 여자를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여자여, 나의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 안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곳에서, 그 아버지께 예배드릴 그 때가 오고 있느니라. 4:22너희는 너희가 예배드리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우리는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을 알고 있으니, 이는 구원이 유태인들 가운데서 나옴이라. 4:23그러나 참다운 예배자들이 영 안에서와 진리 안에서 그 아버지께 예배드릴 그 시각이 오나니, 바로 지금이라. 이는 그 아버지가 자기에게 예배드리는 그런 자들을 찾으심이라. 4:24하나님은 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 분께 예배드리는 자들은 영 안에서와 진리 안에서 그 분께 예배드려야 하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4:19-24, 킹제임스 화중광야역)

사마리아 여자는 예배의 참 뜻을 모르고 있었다. 다만 자기네 사마리아는 '이 산 안에 예배하였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마땅히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 안에 있다'고 말하였다. 이 때 예슈아님은 '이 산 안에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데서 그 아버지를 예배할 그 시각이 오고 있다'고 하신다. 자,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여기서 함께 말씀을 나누어 보고자 한다.

첫째, 사마리아인이나 유대인은 주어진 자기네 경계 안에서 즉, 장소를 지정하면서 그 안에서 드리는 예배로 생각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산 안에'와 '예루살렘 안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기독교 역사상 전해내려 오고 있는 전통적인 생각으로서 지금도 예배를 장소, 건물로 제한시켜 오고 있는 곳일 수록 외관상 규모가 커지고, 교인이 많을 수록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킹제임스성경>을 6년이나 걸려 번역을 완료하였음에도, 나는 어느 곳을 보아도 그런 권면의 말씀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둘째, 참예배란 것은 '영 안에와 진리 안에 그 아버지를 예배함을' 뜻하고 있음을 예슈아님이 직접 증거해주신다(요한복음 4:23-24).
성경의 의문에 대한 해답은 오직 성경 그 속에 해답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성경을 제대로 보지 아니하고, 연구하지 아니하고, 부분적인 것이 전체인양 겉포장을 해 놓으니까, 그 진리가 가리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셋째, '영 안에와 진리 안에'라는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우선 전통적으로 알려져 오기로는, 우물가 여자가 말하는 '이 산 안에' 이 산을 '그리심산'(Mount Gerizim)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위 지도 참조). 이 산은 '에발산'(Mount Ebal=해발 937m로서, 세겜의 북쪽에 위치하여 이스라엘의 중심지였다) 바로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현재의 명칭은 '제발 에드돌'이다. 에브라임 지경에 있는 '복의 산'(신11:29)이요, 요담이 비유를 든 곳이요(사사기 9:7), 사마리아인들이 '거룩한 곳'으로 여긴 곳으로, 본 문제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해발 854m로서(예루살렘 위치와 비슷함), 석회암으로 된 이 산은 경제적,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러나 수가성 여자가 말하는 '이 산'이란 것이 그리심산을 지칭하는 성경적 배경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주제이다.

그런데 예슈아님이 이 여자의 말을 이어 받아서 말씀하시기를, '이 산 안에도 아니고, 예루살렘 안에도 아닌데서 그 아버지를 예배할 그 시각이 오고 있다.(요한복음 4:21)고 말씀하신다. 그러시고 나서 참예배자의 모습을 손수 증거하고 계신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예슈아님이 참예배자의 모습은 장소가 아니라, '참예배자들이 영 안에와 진리 안에 그 아버지를 예배할 그 시각이 오고 있고, 바로 지금이니.'라고 증거하신다(요한복음 4:23). 또 바로 이어서 하나님이신 그 아버지는 '한 영'이기 때문에, '영 안에와 진리 안에 그 분을 예배해야 할 것이다'(24)고 당위성을 강조하고 계신다. 특히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너희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예배드리지만, 우리는, 즉 참예배자들은 '예배드리는 분' (what we worship)을 알고 드리며, 이는 이미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 바로 그 구원을 유대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짐이라고 확증해 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주제의 핵심은 <요한복음 4:22>에 있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슈아님 공생애 사역 그 당시까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선포된 바로 그 구원이란 무엇을 상징하는가? 구체적으로 성경 속에서 찾을 수는 없는 것일까? 바로 이 주제의 열쇠는 본문 22절의 '예배드리는 분' 즉 'what we worship'의 'what'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예슈아님은 사마리아 여자가 강조한 '장소'(산과 예루살렘)인 'where we worship'이 아니라 예배의 대상인 'what we worship' 을 풀어주신 것이다.

지금까지 반목이 되어서 사마리아와 유대가 서로 으르렁거리고 상종조차 하지도 않는 관계 속에서, 주 예슈아님이 오셔가지고, 그러한 반목의 장벽을 무너뜨리신 것이라고 가르쳐 오고 있고, 나도 그렇게 배우고 전해 준 경험이 있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오늘의 현실을 보자. 오늘의 중동 사태 특히 근래에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 사태는 폭력과 반목으로 얼룩진 싸움의 연속 일 뿐, 아무리 평화와 화해를 부르짖어도 한낯 허구에 불과할 뿐임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 할 것이다. 예슈아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영 안에와 진리 안에' '예배드리는 분'을  아는 예배가 참예배자의 모습이란 말씀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성경은 이미 그 해답을 <시편> 속에서 제시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필자는 강해설교를 통해서 특히 <요한복음 4장> 수가성 우물가 여자에 관해서 5차례 전한 바가 있다. 평소에 제시되었던 여자의 '남편' 문제라든가 '참예배' 라든가 '영 안에서 진리 안에'라든가 하는 주제가 제기되어 있다가, 계속 <킹제임스성경>을 번역해 오는 중, 2000년 9월부터 2001년 1월 사이에, 구약의 소선지서들에서 그 해답을 찾았으니, 마치 엉크러진 실타래가 하나 하나 풀릴 때의 그 감격처럼 큰 기쁨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본 주제의 핵심의 열쇠는 갈라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다시 하나로 회복되어야만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참예배자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하나가 되어야함을, 다시 말해서 장소가 하나가 됨을, 교회(교파적 건물과 의식행위 및 교리에 의존하고 있는)가 하나가 됨을 의미하심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실체를 믿음으로써 드리는 예배, 그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영과 말씀 안에 하나가 되어야 할 당위성'을 예슈아님이 손수 선포하시어, 온 세계에 열린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하나가 되는 성경적인 해답이 되겠는가? 자, 다같이 이 싯점에서 한번 깊이 생각해보자!!! 어떻게 하는 것이 그 해답이 되겠는가?

자, <시편133:1-3>을 읽자:

    133:1보라, 형제들이 하나되어 함께 거주하는 것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기쁜가. 133:2그것은 마치 머리 위의 값진 향유가 마치 수염, 곧 아론의 수염으로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려가는 것과 같고, 133:3헤르몬의 이슬, 곧 그 이슬이 치욘의 산들 위에 내림같도다. 이는 거기에서 주님께서 복주심을 명하셨으니, 곧 영원한 생명이로다. (시편 133:1-3, 킹제임스 화중광야역)

<시편132편>은 '치욘을 위하여 복주심'(Blessing for Ziyon)이요!!

<시편133편>은 '치욘 안에 복주심'(Blessing in Ziyon)이요!!

<시편134편>은 '치욘으로부터 복주심'(Blessing from Ziyon)을 상징한다!!


본문 <133편>은 '치욘 안에 복주심'(Blessing in Ziyon)이요, 곧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신다. 이 '영원한 생명'은, 곧 예슈아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하신 '내가 줄 그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든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요, 오직 내가 줄 그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존하는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한 샘물이 될 것이다.'(요한복음 4:14) 하신 그 말씀이다.

이미 하나님은 '치욘 안에 복주심', 즉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그래서 사마리아 여자를 이방인 여자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세우신 열두 지파의 한 지파에 속하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하나로 회복시킴은, 그 방법이 곧 '치욘 안에 복주심'으로 직결되는 것이다.

위 본문에서는 '헤르몬의 이슬, 곧 그 이슬이 치욘의 산들 위에 내림같도다.'(3절)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슬(혹은 풍부한 한 여름밤의 안개)은 본래가 하나였다. 이 이슬이 남쪽(남유다)에서는 치욘 위에 내렸고, 북쪽(북이스라엘)에서는 헤르몬 위에 내렸다. 쌍방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가 하나였음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무조건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해서 참예배자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여기서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헤르몬'(Hermon=히브리어=ker-mone)은 해발 2,800미터로서 이스라엘의 북쪽 지경이었다(신명기 3:8, 4:48, 여호수아 11:3, 11:17, 12:1, 13:11). 장관을 이루고 있는 눈 덮인 정상들이 저 멀리 이스라엘 남쪽으로부터, 서쪽은 레바논으로부터, 동쪽은 시리아로부터 보인다. 갈릴리 바다로 부터 약32키로미터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슈아 그리스도의 공생애 동안 나자렛과 가버나움에서도 잘 보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필자가 1999년 11월 27일, 갈릴리에서 나자렛으로 향할 때 보았던 바로 그 산이었으며, 현재는 '아이스 마운틴'(Ice Mountain=얼음산)이라 불리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스키를 즐기는 관광지로 유명하다. 이 산에서 녹아내리는 물이 갈릴리 바다로 들어가는 그 물줄기를 나는 확인할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낚시도 즐기고 있었다. 이 산에서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물이 갈릴리 바다로 들어가고, 거기서 요단강으로 흘러내려가, 이스라엘 백성의 생명의 젖줄이 됨은 참으로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남쪽의 유대인들이 북쪽의 사마리아 북쪽 경계지인 헤르몬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시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지금도 이스라엘과 시리아간의 골란고원 문제를 놓고 완전히 해결이 난 것은 아니다. 결국은 물 문제를 놓고 아직 해결이 난 것은 아니며, 언제 또 도화선이 될지는 그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치욘의 이슬은 '유다지파'를 의미하며, 헤르몬의 이슬은 '아셀 에브라임, 므낫세, 스블론, 잇사갈'(역대하 30:11,18,25,26)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이 이슬이 헤르몬에서 치욘에 이르는 이슬의 동작(motion)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슬이 풍부하게 '흘러내림으로'(2절에서의 값진 향유가 아론의 수염으로 흘러내림과 같다고 표현) 헤르몬산과 치욘의 산들이 하나됨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됨이란 히브리어 '에하드'(ehad) 즉 하나의 구성요소가 아니라, '야하드'(yahad) 즉 결합하고 연합하여서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체'(體)를 이루고 있는 '개'(個)가 아니라, '개'가 결합해서 '체'를 이루는 것을 의미하며, 곧 전체로서 하나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12지파를 이루는 각 지파(에하드)가 아니라,

    ①+②+③+④+⑤+⑥+⑦+⑧+⑨+⑩+⑪+⑫=각 지파가 12지파를 이루어 곧 하나됨(야하드), 곧 이스라엘을 '이슬'에 비유한 것이다.


이슬이 내리면 분리된 채 있는 것이 아니다. 흐르고 흘러내리면 서로가 모여서 물을 이루게 된다. 그것을 하나의 물이라 말하지, 그 속에 '헤르몬산의 이슬'이 따로 있고, '치욘의 이슬'이 따로 있다고 어찌 구분할 수 있겠는가? 그저 하나됨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것도 풍부하게 넘치도록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복주심'(blessing)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물가의 여자 사건과 결부시키면 이렇다. 수가성 여자가 예배에 대해서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분리되어 경계를 긋고서 드리는 일종의 의식을 강조한 것이다. 이것이 참예배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참예배자는 '영 안에와 진리 안에 그 아버지를 예배함이니' 곧 그것은 어떤 외형적인 분리됨이 아니라 실체가 하나가 됨은 물론이거와 영적인 의미로서 하나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바로 하나님은 '형제들이 하나되어 함께 거주하는 것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기쁜가'(시편 133:1)라고 선포하신 것이다. 12지파가 하나가 되어 함께 거주할 때가 옴을 예표하신 말씀이다. 이 사실을 예슈아님이 이 땅에 오셔서 증거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수가성 우물가 여자와의 대화의 주제인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은 지금도 이루어져가고 있는 과정 속에 있으니, 곧 하나님의 크로노스(χρονοζ=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는 시간) 속에 있는 사건인 것이다. 아직도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의 백성은 자만에 빠져서 좀처럼 주변 국가의 백성들과는 타협과 화해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흩어버리신 사마리아인들, 즉 북이스라엘의 10지파를 무시하고서 성경을 해석하면 커다란 오역을 낳을 수 밖에 없다(열왕기하 17장). 지금 이 시대는 때가 되었다. 이 흩어진 10지파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하는 주제들이 여기저기서 들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바로 지금의 이스라엘 백성과 결합해서 하나의 이스라엘로 형성될 때가 반드시 오고 있다는 것이다(에스켈 37:15-28). 이것이 참예배라는 것이다.

이것을 예슈아님은 사마리아 여자에게 '이슬'을 비유로 하신 '영 안에와 진리 안에 그 아버지를 예배할 그 시각이 오고 있고, 바로 지금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이것은 예슈아님 자신을 가리키신 것이다. 즉 그 시각이 오고 있는 중이며, 지금 성취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예배자는 그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그 아버지는 또한 그런 자들을 찾고 계신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모든 민족이 회개함으로써 성경의 모든 예언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그 때, 즉 우상숭배를 버리고 불법을 버리는 그 때가 와 있음을 예슈아님이 선포하신 것이다. 그 해답이 저 유명한 오순절날 담대하게 증언하는 사도 베드로가 선포한 <사도행전 3:18-26>을 근거로 할 수 있다:

    3:18그러나 하나님은 그 분의 모든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하리라고 미리 선포하신 그 말씀들을 이와 같이 이루셨도다. 3:19그러므로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주님의 임재로부터 새롭게 되는 때들이 올 때, 너희 죄들이 지워질 것이요, 3:20그리고 그 분이 예슈아 그리스도를 보내시리니, 곧 너희를 위하여 선포되신 분이시도다. 3:21모든 말씀들이 회복될 때까지, 하늘은 그 분을 받아들여야 하나니, 이 회복의 때는 그 세상이 시작된 이래 하나님이 자기의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전해오신 바니라. 3:22따라서 진실로 모세도 조상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 형제들 가운데서 나 처럼 한 선지자를 너희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그 분이 너희를 향하여 무엇을 전하시든지, 너희는 그 분의 모든 말씀들을 들을 것이라. 3:23그리고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누구든지 백성 가운데서 끊겨지는.' 때가 임할 것이라 했느니라. 3:24뿐만 아니라, 사무엘로 부터 그 뒤를 이어 수 없이 전해 온 모든 선지자들이 한결 같이 이 날들에 관하여 예언해 왔도다. 3:25너희는 그 선지자들의 자손들이요,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과 세우신 그 언약의 자손들이니, 곧 아브라함을 향하여 말씀하시기를, '네 씨 안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받을 것이다.' 하셨도다. 3:26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슈아님을 일으켜 세우시고, 너희를 복주시려고 그 분을 먼저 너희를 위하여 보내셨으니, 이는 너희 각 사람으로 자기의 악한 행실들에서 돌아서게 하심이라. (사도행전 3:18-26, 킹제임스 화중광야역)

자, 오늘의 이스라엘을 바라보자. 어디 사도 베드로가 선포한 대로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는가 한번 쯤 반문해 볼만도 한 것이다. 예슈아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이미 하나님께서 모든 선지자들의 그 입들을 통하여 예언하신 '그 메시야'의 오심이 이미 성취되었는데도, 아직도 저들은 악행, 즉 우상숭배와 불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 <70주>(The Seventy Weeks) 예언은 아직 100%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다.  어떤 교리에서는 마지막 한 주간이 예슈아님의 골고다 위에서 돌아가심과 스데반 집사의 돌로 쳐죽임을 당함으로 성취되었다고 하는데, 성경 어디에서 그 정확한 근거를 댈 수 있으면 대 보라!!! 그저 하나님의 주권적, 계시 의존적 구속의 역사는 막연하게 인간의 사리와 이성으로 풀려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오순절의 영적 부흥사건에서 있었던 예슈아님에게로의 돌아오는 회개가 훨씬 미치지 못하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슈아님이 손수 수가성 우물가에서 여자에게 지금의 이런 불법의 때가 오나니, 영적인 존재로서 오직 진리의 그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지고 예배할 것을 선포하신 것인데, 과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예슈아님은 죽기까지 그 아버지에게 순종하사 '그 나무'에 달려 죽으셨고, 부활하셨으니, 반드시 다시 오심은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인데, 그 때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가 되어 (하나됨) 예슈아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국민적 회개'(National Repentance)가 일어나리니, 이 때 알곡과 쭉정이가 분리되는 그 마지막 때가 오는 것이다.

오늘의 되어가고 있는 현실은 이미 구약에서 호세아 선지자의 그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탄의 권세가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 하루 돌아가는 꼴이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이미,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를 끊지 아니하므로, '로암미'(Lo-ammi=호세아 1:9), 즉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No people of mine are ye=이 구절에 관해서는 차후 <성경주제풀이>에서 자세하게 다룰 것임)라고 선포하셨는데도, 계속 그들은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 말라키를 통하여 닫아버리셨다가(430년간), 밥팀례자(밥티스트) 요한(John the Baptist)을 통하여 '그 메시야'의 오심을 그렇게 외쳤는데도(이사야 40장 참조), 그들은 그분을 '그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던 것이다(요한복음 1:11).

그래서 수가성 우물가에 가셔서 그 사마리아 여자를 만난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그 메시야'이심을 손수 증거하셨는데도(요한복음 4:26), 그리고 오순절날 사도 베드로의 그 입을 통하여 진실하게 증언하였는데도, 그들은 예슈아님을 그들의 '그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그 후, 그들은 2000여년 동안 갖은 외침(外侵)과 핍박과 죽음을 당하고, 급기야는 주후 70년 로마 장군 '타이터스'(디도)에 의해 멸망당하였고, 전 세계로 흩어지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디아스포라'(이산=Diaspora)라는 고난의 길을 가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였다. 겨우 다른 나라의 도움으로 1948년 5월 14일, '국가로서 이스라엘'(The State of Israel)이 건국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도, 여전히 상황은 더욱 악화만 되어가고 있으니, 이것은 사탄의 권세하에서 인간의 노력과 화해로 평화가 오는 것처럼 '가장된 드라마'(False Flag)가 한판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2001년 7월 30일 예루살렘 성산(Temple Mount) 안에다 제3의 성전을 새로 짓기 위한 이스라엘 'Temple Mount Faithful'이라는 단체가 40톤가량 되는 주춧돌(Corner Stone)놓으려는 사건이 벌어졌다(실제로는 이슬람교도들의 반대 시위가 예상되므로, 예루살렘 외곽에서=Old City 근교에서 08:20에 형식적인 의식만 벌어졌다고 외신은 전했다/Jerusalem Post). 영국 BBC는 이 주춧돌이 운반되는 장면을 인터넷에 올렸고, 마침 필자는 그것을 지켜 볼 수 있었다. 이렇듯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의 재건축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지 자못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 날 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싸움으로 많은 사상자가 난 것이다. 그러나 평화는 찾아온다. 그 방법은 이스라엘도 아니요, 팔레스타인도 아니다. 바로 세계정부를 주도해오고 있는 통합된 '세계종교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그 때부터는 무진장한 핍박이 가해질 것이니, 참으로 예슈아님이 다시 오실 때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누가복음 8:25) 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입증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다시 오실 즈음에는 '대배도'(大背道)가 일어날 것이고, <요한계시록 18장 4절>에서는 이 사실을 미리 사도 요한의 그 손을 통하여 보여주셨으니, '그 음녀에게서 나오라'고  마지막으로 통첩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지금의 중동의 상황은 그 수순을 밟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슈아님이 참예배자는 '영 안에와 진리 안에 그 아버지를 예배' 한다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을 알아서 깨어 있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암흑 속에서 '종교의식'이라고 하는 독주(毒酒)에 취해 있으니(요한계시록 17:2), 가히 심각한 위기요, 제2의 소돔과 고모라요, 제2의 노아의 때가 아니라고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오, 참으로 통곡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샬롬!! (2003.1.26)

 
<Created/20051120> <Updated/201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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