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풍 주제곡/'대칸민족이여, 일어나라!!' ㅡ 작시작곡/정재선 ㅡ 채보연주/안연숙>(룸바버전)


[미륵불(彌勒佛)이시여, 속히 이 땅에 오시오소서!!] <대한민족 토속종교 2>

[미륵불(彌勒佛)이시여, 속히 이 땅에 오시오소서!!]

필자는 본 주제를 놓고서 3회에 걸쳐서 언급하게 되었다:

먼저, 제1차적으로 [미륵불(彌勒佛)이시여, 속히 이 땅에 오시오소서!!] <인트로> (자세히보기)를 시작으로 해서, 둘째, [미륵불(彌勒佛)이시여, 속히 이 땅에 오시오소서!!] <본주제> (자세히보기)를 거쳐서 마지막으로 [미륵불(彌勒佛)이시여, 속히 이 땅에 오시오소서!!] <대한민족 토속종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 마지막 부분에서는 우리의 토속종교가 여럿있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그 중에서도 <원효결서>와 <동학/천도교>를 약술함으로써, 본 주제 <야풍>(野風)의 도입부분을 마치기로 한다.


6개월간 책주인과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극복하고서 간신히 입수하게 된 책이다. 아무튼 이 귀한 자료값을 일부 할인해주신 그분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곧 도착하는대로 본격적으로 살펴보면서 올릴 것이다!!


백여년을 지내오면서 민족적 과제 앞에 최대의 희생을 치룬 동학(東學)이었는데, 그 신원(伸寃/펼침)은 되지 않은채, 오늘날에는 민족분단의 통일원리를 민족 앞에 제시해야 하는 또 하나의 책무가 있음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동학이 득명(得明)된지 130년의 역정(歷程)이 되었는데도, 아직 이렇다할 기록하나 없이 지나다, 60여년 전에 최준모(崔俊模), 정광조(鄭廣朝), 이종린(李鍾麟) 삼장로(三長老) 어른들이 자료를 수집하여 총서라는 교사(敎史)를 등사고료(謄寫稿料)로 편찬하였고, 한순회(韓順會) 장로의 일지중에서 발화(拔華)한 것을 수습위원회 때 해암(海庵) 이종해(李鍾海) 종법사(宗法師)가 등사출판한 것을 지난 130년(되던) 봄철에야 뜻있는 동덕(同德) 여러분의 정성을 모으고, 교회사적(敎會史的) 일환으로 출판할 것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도조(道祖)의 조난과 신원운동(寃運動)을 시발로 <갑오동학운동>(甲午東學運動), <3·1국권회복운동>(3·1國權回復運動), <무인멸왜기도운동>(戊寅滅倭祈禱運動) 등 희대의 종교운동을 거치며, 40여만명이라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종교적 희생을 겪으면서도, 그 사적(史跡)을 세상에 발현하지 못한 우(愚)를 범해 오다가, 이제서야 비로서 그 사실(史實)을 활자화 만이라도 실행한다는 단계에 들었을 뿐이다. (龍潭淵源, '東學·天道敎略史', 서울:보성사, 1990, 머리말) (2015.7.4/밤)

◆[이미지/화중광야제작] 대한민족(大桓民族)의 민족종교인 <동학>(東學)을 이끌었던 지도자 <최제우(崔濟愚)ㅡ최시형(崔時亨)ㅡ송병희(宋秉熙 ) 교주들이다. 이제는 우리 민족의 고유종교인 <동학>의 고귀한 가르침이 다시 펼쳐져야 할 때가 이른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白淳在, 申一澈, 愼鏞廈, 李光麟, '東學思想資料集', Vols.1&2, 서울:亞細亞文化社, 1979>. <2015.7.5/깊은밤>


[황당한 죄명을 받아들인 조선조정의 마지막 시대의 정황이 어떻했는지를 알아볼 수 있도다!!] 조선의 조정에서 대신사 최제우(崔濟愚)에게 씌운 죄목은 당시의 지배이념인 유학, 즉 공자의 도덕을 문란시킨 것과 서학이라는 사술로써 어리석은 백성의 재물을 사취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신사는 이러한 죄목이 옳치 않다고 일축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극대도>(無極大道)의 참뜻을 모르는 어리석은 관헌을 오히려 힐책하였다. 서헌순은 대신사를 신문한 내용을 그대로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았다. 이는 애초부터 대신사를 참형할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정운구가 장계로 보고한 동학의 핵심이론인 <논학문>(동학론)이라는 증거물이 있었음에도, 그 내용은 하나도 인용하지 않고 허황된 이야기만 나열할 뿐아니라, 마치 동학이 사교인양 꾸며 놓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동학이란 서양의 도술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오직 이름만 바꾸어 세상을 현란시키는 것'이라 말하고, '만일 조속히 토벌하여 법으로 철저히 다스리지 않으면 더욱 심해질 것이며, 이들은 황건적이나 백련교와 같아질 것이 뻔하다'고 하여 서학으로 지목하였다. 1864년에 최제우가 순도한 이래, 정확히 30년 후 1894년에, 조선에 파견된 일본군 밀정(스파이)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 소위가 <동학처형>에 큰 공훈을 세웠던 것이다!! <2015.8.16/깊은밤>

[1] 대신사(大神師) ㅡ 1세교주 <최제우>(崔濟愚)

대신사(大神師)의 성은 최(崔)요, 이름은 제우(濟愚)요 (초명은 제선/濟宣), 자는 성묵(性默)이요, 호는 수운(水雲) 혹은 수운제(水雲齊)니, 포덕전(布德前) 36년(조선 순조 24년) 곧 갑신년(甲申年)인 1824년 10월 28일에, 경상도 경주 가정리(柯亭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옥(鋈)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대신사의 원조(遠祖)는 신라말기의 최고운(崔孤雲)(명=致遠/28대)이며, 13대조 최눌(崔訥)은 문학으로 추천되어 벼슬이 성균사성(成均司成)에 이르렀고, 7세조 최진립(崔震立)은 인조왕 병자난에 순절되어 충사(忠祠)에 모셔졌고, 6세조 이전으로는 대대로 유가(儒家)에 이름이 있어 도학(道學)으로 가전(家傳)되었으며, 부친 최옥은 호를 근암(近菴)이라 칭하는데, 더욱 도학이 높아 경상도 일대에서 사림사표(士林師表)가 되었다.

서쪽으로 약 12㎞에 가정리가 있고, 그 앞산이 바로 구미산(龜尾山)이며, 그 산 계곡에 용담정(龍膽亭)이 있다. 용담정은 도학으로 이름 높았던 최제우의 아버지 최옥이 그의 나이 60이 넘도록 자식이 없어 구미산 계곡에서 시를 읊조리며 소일하던 곳이다. 최옥은 나이 63세 되던 해 한씨를 세번째 부인으로 맞아 1824년 10월 28일 최제우를 낳았다.

다음은 최옥이 최제우를 얻은 내력이다. 최옥이 자식이 없음을 한탄하였는데, 하루는 내실에 들어갔는데, 어떤 처음보는 부인이 자리에 있는지라 그 까닭을 물었다:

    '나는 금척리(金尺里)에 사는 한씨(韓氏) 과부로서 20세부터 독거(獨居)하야 지금 나이 이미 30세 이르도록 친가(親家)에 있었더니, 오늘 아침에 문득 정신이 혼도(昏倒)하면서 해와 달이 품속으로 들어오고, 이상한 기운이 몸을 싸더니 부지부식(不知不識) 중에 이곳에 왔나이다.'

최옥은 이 말을 듣고 기이하게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감동된 바 있어, 서로 부부의 의(義)를 맺었고, 그 달부터 태기가 있어, 갑신년(甲申年) 10월 28일에 대선사가 태어나니, 천기(天氣)가 청명하며, 서운(瑞雲)이 그의 집을 두루고, 집 앞 구미산이 3일을 크게 울었다고 전한다.

대신사는 태어나면서 그 도량(度量)이 한울같으며, 사리(事理)에 밝음이 일월(日月)같고, 얼굴이 관왕(冠王) 같아서 뼈와 살이 투명한듯 하므로, 집안 사람이 이상히 생각할 뿐 아니라, 보는 사람이 모두 선동(仙童)이라 이름하여, 특히 안청(眼晴)에 광채가 있어, 눈을 뜨면 형광(熒光)이 사람을 엄습함으로, 어렸을 때 동무들이 부모의 외우는 말을 듣고 대신사를 희롱하였다:

    '네 눈은 역적의 눈이라.'

이에 대신사는 예사롭고 자연스럽게 대답하였다:

    '나는 역적이 되려니와 너희는 순량(純良)한 백성이 되라.'


이렇듯 대신사 최제우는 모든 일을 대할 때, 의심과 비평을 가졌음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 해석과는 서로 다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칭찬도 받으며, 또한 비방도 받았다고 전한다. <2015.8.1/깊은밤>

[2] 해월신사(海月神師) ㅡ 2세교주 <최시형>(崔時亨)

신사(神師)의 성은 최(崔)요 명(이름)은 시형(時亨)이요, 초명은 경상(慶翔)이요 자는 경오(敬悟)요, 호는 해월(海月)이니 포덕전(布德前) 33년(조선 순조 27년) 곧 정해년(丁亥年)인 1827년 3월 21일에, 경주 동촌(東村) 황오리(皇吾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최종수(崔宗秀)니 신사 12살때 돌아가셨고 , 어머니는 배씨(裵氏)요 신사 5세때 돌아가시니, 고독한 마음을 의지할만한 사람이 없어, 생계를 먼 친가에 의탁해 지낼 때, 몸에 남루(襤褸)를 면치 못하고, 입에 조강(糟糠/지게미와 쌀겨)을 끊지 못하였고, 형기수려(形氣粹麗) 곧 기운이 순수하고 고웁고, 용지준정(容止俊挺) 즉 용모와 행동이 빼어남은 대중의 이목을 놀라게 하였다. <2015.8.3/여명>

신사(神師) 17세 때에는 몸을 조지소(造紙所)에 의탁하며 겨우 생계를 도모하였을 정도였다. 이웃에 일찍이 과부된 오씨(吳氏) 여자가 있어 가장이 대체로 여유가 있는 지라, 신사의 용모가 거룩한 것을 보고는 모작(媒妁/중매쟁이)을 보내어 혼인을 청하였던 바, 신사가 남의 덕에 의해 졸부(猝富)됨이 상스럽지 못하다 하고 완곡히 거절하였다.

19세 때에, 밀양 손씨(孫氏)를 맞아 부인을 삼았고, 28세 때에는 경주 광면 마복봉(馬伏洞)에 체류중이었을 때, 그 지방 사람들이 신사의 공명정직하고 청렴결백함을 보고 중망(衆望)으로 천거되어 집강(執綱/오늘날의 면장이나 이장)이라는 소임을 맡았다. 신사께서 재임하는 6년동안 주민의 억울함을 덜어주고 좋은 일은 표창하는 등, 공덕이 많아 마을 사람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신사의 공로를 칭송하였다. 그러나 마북동에서의 생활이 여전히 형편이 어렵게 되자, 33세 때 자신의 농토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이곳에서 20여 리 정도 더 산쪽으로 들어간 깊은 계곡의 검곡(劍谷)에 정착하여 화전민 생활을 하였다. 해월신사는 화전민 생활에서도 삶에 대한 새로운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드디어 35세(조선 철종 12년) 곧 신유년(辛酉年)에 도(道)를 대신사(崔濟愚)에게서 배우는 기회가 찾아 온 것이다. <2015.8.6/깊은밤>

신사(神師) 최시형(崔時亨)은 도문(道門)에 든 후에 매월 3-4차례 어기지 않고 대신사(大神師) 최제우(崔濟愚)를 뵙고, 교설(敎說)을 들었고 의범(義範)을 배웠다. 그리고 집에 있을 때는 문을 가리우고 명상(冥想)과 극기(克己)로서 도(道)를 닦았다.

신사는 홀로 생각하기를, '대신사는 편공(篇工)하실 때에 천어(天語)를 들었다'(천어/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순수한 마음과 바른 기운으로 성실하게 행한 뒤에 내려진 판단을 언어로 표출한 것이야. 그러니까 그 말이 공중에서 들려온 것이 아니라 바로 자네 마음 안에서 들려온 가르침일세) 하시니, 내 성력(誠力)을 다하여 천심(天心)을 움직이게 하라 하시고, 비록 엄동이라도 매일 목욕재계(沐浴齋戒)하였고, 이러한지 2-3개월 후에는 물이 또한 차지 아니하고 밤이 어둡지 않는 감이 있더니, 문득 공중으로부터 소리가 있어 가로되, '양신소해(陽身所害)는 우한천지급좌(又寒泉之急坐)니라'(찬물에 급히 들어앉으면 건강에 해로우니라) 하거늘, 신사는 천어(天語)를 듣고는 감히 크게 놀라서 냉수욕을 끊었다고 전한다. <2015.8.13/오후>

신사는 천어(天語)를 들은 후에 곧 대신사를 뵙고 말씀드리기를, '생(生)이 어젯밤에 천어를 들었나이다.' 하니, 대신사는 묵념양구(默念良久) 같으되, '그대가 천어를 들은 시간인 즉 내가 수덕문(修德文)을 짓고 읊든 시간이니 수덕문 중에 <양신소해(陽身所害)는 우한천지급좌(又寒泉之急坐)라> 하는 구절이 있음에, 나의 글 읊는 소리가 그대의 귀에 영(靈)으로 들린 것이 분명하니라' 하거늘, 신사 가로되, '어떤 이치(理致)이십니까' 한 대, 대신사 가로되, '천지(天地)의 사이에 지기(至氣) 가득히 찼으며, 나의 기(氣)와 그대의 기가 또한 둘이 아니라. 그럼으로 이 지기의 소감(所感)으로 나의 말을 그대가 듣게 된 것이니, 어찌 25리의 상거(相距)를 멀다 하리요. 성력(誠力)의 이르는 바에 대삼천세계(大三千世界)가 다 묘법(妙法)에 돌아올 수 있나니라' 하시거늘. 신사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깨달아 공부가 날로 진척되었다고 전한다.

포덕(布德) 3년(조선 철종 13년) 곧 임술년(壬戌年) 1862년 1월에 신사는 밤이 늦도록 공부를 계속하였을 때, 빈종유(半鍾油)를 가지고도 21일 밤을 지나도 기름이 없어지지 않더니, 내덕인 이경중(李敬仲)이 일일유(一壹油)를 가져올 때, 기름이 갑자기 떨어지거늘, 신사가 그 때서야 이적(異蹟)이 있음을 알았고, 일종유(一鍾油)로 시험해 본 즉 하룻밤을 다 하지 못하고 기름이 떨어지는 것이었다.

이 해 3월에 대신사가 은적암(隱寂庵)으로부터 돌아오자, 박대여(朴大汝)의 집에 은거하였는데, 이 때 신사가 대신사의 객지 안후(安候/안부)를 잊지 못하다가, 문득 감동된 바 있어, 조용히 마음의 염려를 마치고난 즉, 대선사가 박대여의 집에 계시거늘 의아(疑訝)하여, 백사길(白士吉/白源洙과 동일인으로서 1864년에 황해도 문화군으로 유배당함)과 함께 분주히 박대여의 집에 도착하니, 대선사의 주문을 외시는 소리가 들리거늘 마음에 기쁨을 얻어 나아가 뵈올 때, 대선사가 무척이나 기뻐하였다고 전한다.
<2015.8.15/깊은밤>

이 때에 신사가 대신사의 '포덕에 종사하라'는 명교(命敎)를 들으시고, 집에 돌아와 출가전도(出家傳道)코자 하나, 양자(糧資)가 없음을 걱정하더니, 친구 김이서(金伊瑞)라는 사람이 120포의 조(租)를 보냈어거늘, 이에 집을 떠나 영해(靈海), 영덕(盈德), 상주(尙州), 흥해(興海), 예천(醴川), 청도(淸道) 등을 순회하여 많은 도인(道人)을 얻으니, 이때 '검악포덕'(劍岳布德)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니, 인구를 회자(膾炙)하고 도명(道名)이 널리 세상에 퍼졌었다.

그리하여 날로 강도(講道)과 설법(說法)을 시작하여 진리를 천명(闡明)하실 때, 하룻밤은 선사께서 무리에게 이르시기를, '이젯밤에 마복동 친구 이상춘(李相春)의 집에 절도가 들었다 한데, 무리가 의아해서 확인해보니 과연 그러하였다. 그러자 선사가 무리를 데리고 흥해(興海)로 가실 때, 서촌(西村) 종숙가(從淑家)에 들어가보니, 그 종수(從嫂)가 위급한 병에 걸려있어 목숨이 위태로운지라, 선사가 묵념을 하고나서, 손으로 병자를 어루만지시니 병이 곧 낫는 것이었다. 이에 가족이 기이하게 여겨 신사에게 그 연고를 물으니, '나 또한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력(誠力)일까 하노라.' 하였다.

한편, 포덕(布德)의 성가(聲價)가 날로 높음에 경주의 관속(官屬) 30여명이 소문을 듣고는 선사를 체포코자 하거늘, 선사는 생마일속(生麻一束)으로 그 관원들을 포박한 후에 좋은 말로서 소유하여 돌려보내니, 이때부터 '검곡'(劍谷)에 큰 장사가 있다하여 관노배(官奴輩)의 침해가 끊어졌었다.

이처럼 해월(海月) 신사의 포덕과 정성으로 검곡에는 많은 도인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았다. 포덕 5년(1864년) 3월 10일 대신사 순도 후, 안동·평해·울진 등지로 관의 추적을 피하여 은신하던 신사는 이듬해 포덕 6년(1865년) 10월 28일 자신이 입도하고 천어(
天語)를 들었던 검곡에서 많은 도인들과 대신사 탄신향례를 봉행하였다. 이때 신사는 최초로 도인들에게 유명한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법설을 하였다:

    '사람은 한울이라 평등이요 차별이 없나니라. 사람이 인위(人爲)로써 귀천(貴賤)을 가리는 것은 곧 천의(天意)를 어기는 것이니 제군(諸君)은 일체 귀천의 차별을 철폐하여 스승님의 뜻을 계승하기로 맹세하라'

뿐만 아니라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우선 도인된 사람부터 적서(嫡庶)의 구별을 두지 말라고 강조하였다. 신사는 평등무차별을 법설로만 끝내지 않고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즉 포덕 32년(1892년) 호남에서 양반 출신의 윤상오(尹相五)와 천민 출신 남계천(南啓天)을 따르는 도인(道人)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신사는 남계천을 호남좌우도 편의장으로 삼았다.

'검곡'(劍谷)의 원명은 '금등곡'(琴登谷)이었는데, 이 지방 사람들은 '검등곡'(劍登谷)이라 불렀다. 그후 교중의 기록에는 검곡(劍谷)으로 기록되었으며, 오늘날에는 '검곡'으로 통용되고 있다. 교중기록에는 검곡이 용담으로부터 25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두 배에 해당된다. 검곡의 행정구역은 현재 경상북도 포항시 신광면 마북리이며, 포항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20키로 정도 떨어져 있다. 검곡 들어가는 입구에는 현재 포항시의 상수원이 조성되고 있으며, 옛날에는 1백여 호의 마을이, 현재는 20여 호 정도 있다. 검곡에는 4호 정도의 집터가 아직 남아 있으며, 집터 뒷쪽으로는 신사가 화전을 하였던 흔적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고 전한다.
<2015.8.17/이른아침,한낮>

[3] 의암성사(義菴聖師) ㅡ 3세교주 <송병희>(宋秉熙 )

◆[이미지] 의암성사(義菴聖師)가 일본으로 망명해 있던 당시의 사진이다. (포덕46년/고종42년/1905년). 앞줄 오른쪽이 의암 손병희(孫秉熙) 선생, 그 왼쪽이 조의연(趙義淵). 그리고 뒷줄 오른쪽이 오세창(吳世昌), 그 왼쪽이 권동진(權東鎭)이다. <천도교교사편찬위원회, '천도교백년약사(天道敎百年略史)(上)', 미래문화사, 1981, p.40>. <Updated/20160417>


성사(聖師)의 성은 손(孫)이요 명(이름)은 병희(秉熙)요, 자는 응구(應九)요, 호는 의암(義菴)이니, 포덕(布德) 2년(조선 철종 12년) 곧 신유년(辛酉年)인 1861년 4월 8일에, 청주군 대주리(淸州郡大周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조(懿祖)요 어머니는 최(崔) 씨니, 꿈 속에 태양이 회중(懷中)에 들어가더니, '인이유신'(因而有娠/임신)하여 낳으매, 기우(氣宇)가 영매(英邁)하고, 소절(小節)에 불구(不拘)하였다고 전한다. <2015.8.18/새벽>

성사는 손의조(孫懿祖)의 서자(庶子)라서 대게 그 가풍에 따라 서자로 하여금 아버지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으니, 성사 7세이후로부터 결단코 입으로 '부'(父)라 '형'(兄)이라 부르지 아니하였고, '적서'(嫡庶)의 별칭을 폐하여 주면 '부'(父)라 부르리다 하였으니, 이로써 손병희 특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독립운동가였던 친동생 '손병흠'(孫秉欽)이 있다. 그는 최시형을 도와 동학의 포교에 주력하였으며, 관의 체포령을 피해 숨어지내는 최시형의 은신처 마련에 힘썼다. 1898년 7월 최시형이 순도(殉道)한 뒤로는 3대 교주인 친형 손병희를 보좌하여 동학의 재건에 진력하였다. 특히 1900년을 전후하여 손병희의 도일(渡日)에 참여하였으며, 후일 동학의 후신인 <천도교 창건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일본과 국내를 오가며 애쓰던 중 1903년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급서하였다.

포덕(布德) 13년(조선 고종 9년) 곧 임신년(壬申年/1872년)에 포덕 나이 12세때에 그의 형(이복형)이 지방 '풍헌'(風憲)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사로 하여금, 공전(公錢/공금) 40냥을 가져다 관청에 바치라 하였더니, 길에서 행인이 병으로 인하여 동사(凍死)할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고는 그 병자를 업어 근처 주점에 들게 하였고, 주점 주인에게 돈 30냥을 주어 치료케 하였는데, 돌아올 때 그의 이복형이 그 공전 여부를 물었으나, 손병희는 끝내 맑히지 않았다고 전한다.

포덕(布德) 18년(조선 고종 14년) 곧 정축년(丁丑年/1877년)에 성사가 충북 괴산군(槐山郡) 삼가리(三街里)에 이르렀더니, 마침 수신사(修身使=御使)가 말 뒤에다 마인(馬人)를 데리고 오는데, 유혈이 낭자함을 보고는 성사가 노하여 물으셨다:

    사람을 학대함이 어찌 저러 하냐'

성사가 목봉(木棒)으로 마복(馬僕)을 때려 쫓아버렸고, 마인을 풀어놓은 후에, 유서통(諭書桶/서류를 넣어둔 통)을 빼앗아 연못가운데로 던져 버렸다고 전한다.

포덕(布德) 21년(조선 고종 17년) 곧 경진년(庚辰年/1880년), 성사가 청주 약시장(藥市場)을 야행(夜行)하다가 유실물을 얻었는데 '금 3백량'이었다. 성사가 이 금을 잃은 자를 찾더니, 한 포목상(布木商)이 깊이 근심하는 얼굴표정을 보고서, 그가 곧 금을 잃은 자임을 알아보고는, 그 잃어버린 금을 내어주었다. 그러자 그 금 주인이 절반을 드린다고 청하였는데도 듣지 아니하고 갔다고 전한다.<2015.8.27/오후>

한편, 성사가 음성(陰城) 지경을 지나다가 한 고을에 이르렀다. 한 동네 사람이 잡좌(坐/돌아다님)하여 훤뇨(喧閙/시끄러움)함을 보고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 동네 어느 집에 악질(惡疾/역병)이 들어 그 가족이 전멸하였다는데, 5-6일이 지나도록 아직도 수습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성사가 개탄하여 말하였다:

    '사람이 사람의 죽음을 구하지 아니하면 어찌 인도(人道)라 하리요'

하고, 친히 4-5인의 시체를 감습(歛襲)하여 매장(埋葬)하여 주었다고 전한다.

성사는 일찍부터 지상(地上)의 어지러움과 또한 반상(班常/양반과 쌍놈)의 불평등함과 자기 자신이 서자(庶子)이므로, 입신양명(立身揚名/출세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침)을 못할 것 등을 알았으므로, 이에 불평이 만만(滿滿)하여 글을 배우려 하여도 그 쓸곳이 없음을 븐히 여겨, 책(冊)을 던지고 문(門)을 나섬에, 천지(天地)가 회회(恢恢)하되, 장부(丈夫)의 몸을 둘 곳이 없는지라, 이에 그 불평을 풀기 위하여 술을 마시고 도박장에 출입하며, 동류(同類/무리들)을 모아 낭인단(浪人團)을 만든 후에 스스로 두령(頭領)이 되었도다.

일찍 청주의 초정약수(草井藥水)에 간즉, 양반이 있어 물을 마심에, 민중은 다만 서서 기다리다가 양반이 가기만 기다림을 보고, 성사는 주위(周衣/두루마기)를 입은 채로, 약수장(藥水場)에 들어앉아 물을 퍼서 민중에게 나눠주는 반면, 양반을 향하여서는 흐린 물을 퍼서 끼얹음에 양반도 마찬가지로 성사의 소문을 들었는지라, 감히 어찌하지 못하고 돌아가니, 청주(淸州) 일대에서는 낭인(浪人)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었다고 전한다.

<白淳在, 申一澈, 愼鏞廈, 李光麟, '東學思想資料集', 1 & 2, 서울: 亞細亞文化社, 1979>

이상으로 2015년 6월 6일에 착수한 본 주제는 이것으로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벌써 끝났어야 할 본 주제의 글은 필자의 '개인사정'으로 인하여 이토록 밀려와서야 끝을 맺게 되었음을 밝혀드린다!! 샬롬!! <2015.8.28/이른새벽>


☞[화중광야가 여러분의 도움의 손길을 기다립니다!!]

이미 예고한 대로, 이제는 더 이상 지체없이 본 주제의 <제2부 ㅡ 강화도의 눈물>이 이어질 것입니다. 다만, 필자와 관계 협력자들과 함께 <강화도>를 순례함이 우선이라고 판단되었고, 아직도 미비된 관계자료 보완으로 인하여 시간이 '약간 늦어질 것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본 <화중광야>가 '자비량'으로 선교사역을 해 오면서 부족한 면이 있어, 감히 <도움의 손길>을 부탁드립니다. 위 이미지에서 보듯이, 본 <화중광야> 홈페이지 왼쪽 상단에 배너 <Raising Your Heart>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본 홈페이지를 찾아주시는 독자 제위에게 심심한 고마움을 전해드립니다. 샬롬!! <2015.8.28/이른새벽>


[신원운동(伸寃運動)의 요결(要結)]

신원운동(伸
寃運動)은 동학 창도 초기인 1862년에서 1893년 보은취회 시기로 한다. 1893년 3월11일(음력) 충북 보은 장내리에 해월 최시형을 중심으로 동학농민 수만명이 모여 척양척왜(斥洋斥倭/서양인과 왜인 배척), 보국안민의 깃발을 내걸고 열었던 집회이다.

동학교인들은 복합상소 직후 외국공관과 교회당에 외국인을 배척하는 괘서(掛書=벽서/이름을 숨기고 은밀하게 투서형식의 익명서로 공개된 장소에 게시)를 부착하였다. 특히 광화문복합상소 이전부터 수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외국인을 배척하고 몰아내기 위하여 상경한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던 상황이어서 외국인들은 더욱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당시 괘서는 미국인 선교사 집에 2건, 프랑스와 일본 공사관에 각각 1건이 부착되었다.

그 괘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아, 슬프도다. 소인배들은 이 글을 경건히 받을지어다. 헤아려보면 우리 동방의 나라는 수천년 예의와 범절의 나라였노라. 이러한 예의지국에 태어나 이 예의를 행하기에도 오히려 겨를이 없거늘 항차 다른 가르침을 생각하겠는가. 그들의 서책을 보고 그들의 학을 살펴보니 그들은 소위 한울님을 공경할 뿐이라 말하나 기실은 한울님을 거스르는 것이며 비록 인류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들의 유혹인즉 사람들을 그릇되게 하는데 있다. 천당과 지옥은 이 또한 무슨 소리인가. 세상 사람들은 비록 신선이 있다고 하나 본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천당이 있다고 하지만 이를 누가 보았단 말인가.(중략) 우리 도의 근원은 하늘에 나서 밝은 하늘의 뜻을 천하에 비치니 감히 날뛰면서도 도를 능멸할 수 있는가. 세상을 일치할 도는 이치 중에 있으니 어떻게 조심하지 않으랴. 소인배들은 대도를 함께 하여 사람마다 그 서책을 불태우면 혹시 만의 하나 살 수 있는 길이 있는지 모르겠다. 교두 등을 효유하노라.(중략) 교회를 세우고 포교하는 것은 조약에도 허용하지 않은 것인데 너희들 교두들은 방자스럽게 잇따라 들어와서 겉으로는 상제를 공경한다고 하면서 단지 기도로서 꾸밀 뿐이고 예수(필자교정=예호슈아)를 믿는다고 칭하면서 단지 찬송하는 것으로 법을 삼아 정심성의의 학은 전혀 없고 말을 실천하고 행실을 돈독히 하는 실은 조금도 없다.(중략) 이와 같이 타일러 이르노니 너희들은 빨리 짐을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충신 인의한 우리는 갑옷투구 방패를 갖추어 오는 3월 7일에 너희들을 성토하리라. <차길순, '서울 지역의 동학활동 연구'에서 인용하다!!>.


앞으로는 동학군토벌에 주도역활을 하였던 1894년~1895년 동안 일본군 암약을 상세하게 밝혀내야 만이...<명성태황후의 암살의 필연성>이 소상하게 밝혀지고야 말 것이라고, 본 필자는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일본 후비보병 제19대대 토벌군에게 내려진 명령은 '보는대로 사살하라!!'였다 ㅡ 1894년에 일본군 최고 사령부가 조선침략의 걸림돌이 되는 동학군을 모두 죽이라고 했다!!]

아주 '비인간적이고 잔인했던' 일본군의 그 후예들도 오늘날 한국에 대한 범죄사실을 은폐 내지 축소에 혈안중이다!!

일본정부는 지금까지 조선침략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약탈과 학살의 증거를 은폐해 왔지만, 일제가 계획적으로 동학농민군을 학살하고 조선침략을 자행했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났다!! 아울러 일말의 양심이 있다면, 엄연히 남의 나라 젊은이들을 강제로 데려가서 나가사키 <군함도>의 지하 막장에서 석탄을 캔 엄연한 <역사적진실>까지 회피하다가...마지 못해서(??)...이런 '꼭두각시 나라'는 세계에서도 보기드문 사례인 것이다!! 특히 지난 3월에 상전국인 영국의 '윌리암 왕세손'이 일본을 다녀간 것을 '무심히'(??) 넘겨서는 절대 안 될 것이다!! <영국 윌리암 왕세손의 일본과 중국 방문의 속셈은??> <자세히보기>.

한편,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한창 전개될 때, 동학교단은 조정이나 청국군 일본군의 움직임을 매우 신속하게 포착하고 이에 대응하고 있다.
동학군을 진압하는데 동원된 일본군의 부대는 대략 2천300여명 정도로서, 후비보병 제19대대의 3개 중대, 제18대대의 1개 중대, 후비보병 제6연대 제 6중대의 1개 중대, 4중대와 7중대의 일부 병력, 부산수비대의 1개 중대 그리고 해군 병력 등이다. 이중에서 실질적인 동학군 진압에 동원된 주부대원은 후비보병 제 19대대의 약 800여명(1개 중대 221명, 본부요원과 지원부대 포함)이다. 이 기간 중에 일본군 경성수비대 장교(소위)였던 후비보병 제19대대 토벌군 소속의 소위 <미야모토 다케타로>(宮本竹太郞)의 행동을 면밀하게 밝혀내야만이 <명성태황후의 암살범>으로서의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믿어오고 있다!!

특히 1895년 10월 8일 <명성태황후 암살사건> 이후로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는 일본국 재판소에서 약식으로 재판을 받고는 풀려났다. 그리고는 얼마 후에는 <대만>으로 다시 파견되었다. 그리고 대만에서 작전 중에 죽었다고 하지만, 그와 관련된 기록은 전무한 상태였으며(일본정부가 꼭꼭 숨겨놓고 있어), 특히 그의 시신에 관련된 기록도 전무하다. 아울러 그의 이름도 <야스쿠니신사>에도 빠져 있음이...과연 무엇을 의미해주는 것인가?? 이토록 '악랄하고 비양심적인' 인간성을 지녔던 그 당시의 <일본군>은 완전히 '영국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반증해준 것이라고 필자는 지금도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특히 <명성황후의 어진>을 촬영하는데 성공하는데는, 그 중계역활을 영국의 밀정(스파이)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과 당시 조선(한국)주재 영국 총영사 <월터 C. 힐리어>(Walter C. Hillier)과의 공동합작 소행인 것임을 이미 여러번 글을 통해서 밝혀냈고 잠정 결론내린 바가 있다.
[화중광야대특집][대한민족 3대 암살미해결 사건] <명성태황후 암살단> 주모자[3]ㅡ이사벨라 비숍(Isabella B. Bishop) <자세히보기>.

게다가 지금 독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이 '생쇼'(?)를 벌이고 있는 그 '작태'는 참으로 '비인도적'이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일본의 나가사키에 자리한 자그마한 섬, 야구장 두 개를 합한 크기에불과하지만, 이 섬의 별명은 <지옥의 섬>인 <군함도>(軍艦島/군칸지마)이다. 일본 나카사키 반도에서 4km 떨어진 곳에 위치했으며, 현 명칭은 <하시마섬>인데, 그 섬의 모양이 일본의 해상군함 <도사>를 닮았다 해서 <군함도>라 불린다. 우리 조상들 600명이 어린 소년 나이에 이 섬으로 끌려와서 평생토록 채탄을 한 곳이란다. 목적지도 모른 채 가족과 생이별한 조선인들은 일본의 세계침략전쟁에 자원으로 쓰일 석탄을 땅 속 1000미터까지 내려가 캐야 했단다. 이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가 한수산(韓水山) 교수의 저서 <까마귀> 속에 상술되어 있다고 전한다. 기필코 필자는 곧 시작될 <강화도의 바람> 연재에서 이 주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무튼 일본은 무언가 '정신적인 괴리'가 지나칠 정도로 심각한 것 같다!! 이 어찌 이런 나라와 계속 '진실되게' 소통할 수 있겠는가??!! 이제는 예호바의 그 손길 만이 우리 <대한민족의 영토>를 보살펴주실 것을 기도하게 된 것이다!! 샬롬!! <2015.7.5/늦은오후>


[긴급소식] 2015년 7월 4일, 독일 본 월드컨퍼런스센터에서 개최한 제39차 회의에서 공주·부여·익산의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유산 8군데를 한데 묶은 '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oric Areas)가 대한민국으로서는 12번째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고 전한다. 대한민국은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의 3건이 한꺼번에 처음으로 등재된 이래 창덕궁과 수원화성(이상 1997년),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년),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년), 조선왕릉(2009년), 한국의 역사마을:하회와 양동(2010년), 그리고 지난해 남한산성에 이어 모두 12건에 이르는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겉으로 드러나 있는 유네스코의 <세계유산등재>로 인하여, 한반도의 문화재는 '자의관리'로부터 '타의관리'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이는 기뻐할 일이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은 스스로 내세울 것은 이제는 아무 것도 없는 꼴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우리 <대한민족>(大桓民族)의 드러나지 아니한 <참다운역사적진실>을 찾아 나설 때가 이른 것이다!! 마지막 때가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오늘의 이 현상을...단순히 묵과히지 마시길...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샬롬!! (2015.7.4/밤)


그리고 끝으로 <대한국>(大桓國)의 정체성을 정리하면서, 마지막 주제 <대한민족 토속종교 동학/천도교>를 끝으로 본 주제의 대단원은 막을 내립니다!! <제2부>에서는 <강화도의 눈물>이 이어질 것입니다!! 관심있는 여러분의 아낌없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다니엘정> 편으로 '도움'을 주신 <김향예> 자매님에게 진실어린 고마움을 전해드립니다!! 샬롬!! (2015.6.6/깊은밤)


[부록][삼태극의 민족, 삼파람의 민족] (정동윤/2009.12.6.)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가장 똑똑하고 지혜로운 민족...

그러하기에 가장 많은 연단을 받아야만 했고, 지금도 그 연단을 받고 있는 민족...

그것이 바로 우리 '한민족'(韓民族)인 것이다.

'한민족' ㅡ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이다...GOD'S CHOSEN PEOPLE!!

'한국' ㅡ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운 하나님의 그 왕국...THE KINGDOM OF GOD!!

'아리랑' ㅡ 하나님이랑...임마누엘...GOD WITH US!!

'아라로' ㅡ 하나님께로...유리바다...UNTO GOD!!


이 어찌 우연의 일치라 단언할 수 있겠는가!!


[부록] '아라로'(노래/ 아이유) (드라마 '선덕여왕' OST)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에헤 에헤 에헤 에헤 에헤야 디야

바람길 가차가차 바람길 가차가차/ 마음길 아라로 가니
바람길 물결 건너 바람길 하늘 지나/ 마음길 숨결 따라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바람길 가차가차 바람길 가차가차/ 마음길 아라로 가니
바람길 물결 건너 바람길 하늘 지나/ 마음길 숨결 지나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에헤 에헤 에헤 에헤 에헤야 디야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아라로 가 닿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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