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특집] 20세기 초를 넘어 메스미디어의 발달에 따라 가요시대로 접어 들면서 서울 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여러 아리랑이 폭발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대표작 중 하나로 1926년 10월 1일에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한 나운규(1902-1937) 감독의 무성영화 <아리랑>이 10월 1일에는 개봉 90년 맞았다!!


네 여배우가 전하는 나운규(羅雲奎)의 히든스토리
ㅡ 신일선, 문예봉, 복혜숙, 김연실 ㅡ

정리/ 정재선 목회자

<삼천리는>(三千里)는  정치, 사회, 경제, 대중문화를 폭넓게 다룬 잡지로, 1929년 6월에 창간한 이 잡지는 1941년 11월까지 13년간 통권 150호를 발간되었다.  그후 <대동아>(大東亞)로 잡지제목을 고쳐 발행해오다가 종간(終刊)되었다!!

◆<'삼천리' 광고> (동아일보/1949.11.11). 본 자료는 발행인 '김동환'씨의 아들 '김영식'씨가 영인, 발행한 자료에는 아깝게도 누락이 되어 있다.

[들어가는말] 나운규(羅雲奎)는 1902년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습니다. 17살 되던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간도 땅에서 대한민국독립 만세를 외칠 정도로 강단있던 그는 러시아 백군의 용병생활과 독립군 활동까지 하던 애국지사였습니다. 독립활동에 매진하던 그가 영화를 알게 된 것은, 192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부터입니다. 한국 최초의 상설 영화관인 '우미관'(종로소재)에서 '명금', '쾌걸 조로', '철로의 백장미' 등의 작품을 본 그는 곧바로 영화라는 예술에 눈을 뜨게 됩니다.

1924년 나운규는 당시 영화 제작의 메카였던 '조선 키네마'사(社)에 들어갑니다. 윤백남 감독의 영화 <운영전>에서 가마꾼으로 출연한 그는, 다음 작품 <농중조>에서 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됩니다. 그렇게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불과 3년 만에 대한민국 영화계에 큰 획을 그은 <아리랑>을 선보였습니다. 독립투사로 활동했던 그의 항일민족정신을 스크린으로 옮겨온 이 작품에서, 그는 직접 각본과 감독, 주연까지 맡으며 예술적 재능에 꽃을 피운 것이죠. 1937년 8월 9일, 36세의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세상으로 떠나기까지 <벙어리 삼룡>, <임자 없는 나룻배>, <오몽녀> 등의 굵직한 작품을 남긴 그는 지금까지 한국영화의 선구자이자 교과서로 불리고 있습니다.

<아리랑>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널리 부르는 민요입니다. 남북을 통틀어 지금까지 드러난 아리랑의 종류만 해도 약 60여종, 3600수에 이른다고 합니다.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풍년이 들어 흥겨울 때도, 흉작으로 시름에 잠길 때도, 머나먼 타향에서 고향을 그리워할 때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슬퍼할 때도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또 일제 강점기에는 저항과 희망의 의미로 부르기도 했고, 이제는 분단을 넘어 남북이 어우러져 부를 수 있는 노래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나 그 민족의 영혼을 사로잡는 노래가 있게 마련인데, 우리에겐 <아리랑>이 바로 그런 노래입니다. <인터넷인용>


◆[이미지/동아일보/1937.8.10] 東亞日報가 [朝鮮映畵界의功勞者-羅雲奎氏의業績]제하로 1937년 8월 9일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나운규의 사망소식을 보도하고 있다.

◆나운규의 둘째아들 나봉환 영화감독

[미니가족사] 아버지: 나형권(羅衡權) 둘째형: 나시규(羅始奎) 부인: 조정옥(趙貞玉) 장남: 나종익(羅鍾益) 딸: 나신자(羅信慈) 차남: 나봉한(羅奉漢/1934.4.15-/ 연극배우로 첫 데뷔한 영화감독으로 서울 출생이며 아버지 나운규의 고향인 함경북도 회령에서 유아기를 보냄.)

필자는별도자료를 통해서 <나봉한의 스토리>를 소개할 기회가 오기를 바란다!! 그는 아버지 나운규의 재능을 그대로 부여받은 아들로서 한국 영화계에 헌신한 공로를 찾아내어 밝힐 것이다!! 독자 제위의 아낌없는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린다. 샬롬!!
<2016.10.3/이른밤>

[영화'아리랑'시놉시스] 나운규 출연, 연출작. 공부하다 미친 영진은 악덕 지주의 청지기 오기호가 동생 영희를 겁탈하려 하자 낫을 내리쳐 죽이고, 일본 순사에게 체포되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역사의 행간속으로 희미해져 버린, 1920년대의 우리의 예술적 선각자 춘사 나운규 의 영화 <아리랑>은 우리 대한민족(大桓民族)의 한과 정서를 담아낸 슬픔을 넘어선 분노였고웅비한 기상이었던 것이다!!

◆[이미지/'삼천리' 1937.12호] 위 <그리운 羅雲奎여> 이 글은 나운규가 죽은 후 약 3개월이 지난 12월에 그의 후배 네 여배우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하는 한스런 일성이다. 필자는 본 자료 입수를 위하여 부단히 노력중에 있다!! 독자제위의 합력기도를 부탁드린다!! 아래 글은 이 네 여배들의 추모글을 옮겨온 것이다. 전문을 확인해야 그 당시 나운규의 죽음의 분위기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자료는 국가기관에서 보존해 와야 하지 않았을까?? 무성영화 <아리랑> 단 1세트도 보존하지 못하면서...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고 판단되었다!! <2016.10.1/한낮에><20161004/깊은밤>


[1] 신일선(申一仙/1912-1990)

'나는 이제 무엇을 위하여 살며 무엇을 위하여 죽으리까. 오로지 영화만을 위하여 살았고 영화만을 위하여 돌아가신 거룩한 당신의 영혼이 영원히 행복함을, 눈 뜬 잠을 자고 있는 나는 속마음으로 축원하나이다.'


[2] 문예봉(文藝峰/1917-1999)

'나운규씨처럼 후배 양성에 열정을 다한 분은 없을 줄로 생각되며, 그의 후배에 대한 깊은 애정이 새삼스럽게 감격의 눈물을 짜낸다.'


[3] 복혜숙(卜惠淑/1904-1982)

'일꾼을 잃어버린 영화인들은 그가 못하고 간 일을 우리 손으로 다해야지 하는 마음이 각각 있을 줄로 안다.'


[4] 김연실(金蓮實/1911-1997)

'자기 할 책임은 어떠한 곤란이 있어도 실행하는 강렬한 책임감과 사업욕을 가지고 있었다.'

[본글은 배우 김연실 가족과 나운규와 많은 일들로 연관되어 있기에, 별도로 필자가 올린 것이다!!]

평안남도 평양에서 출생하였으며 경기도 수원에서 성장하였고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마쳤다는 기록과,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에 지방관을 지낸 김연식의 딸로서, 경기도 수원군에서 태어나 수원 삼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다. 오빠 김학근은 단성사 변사였고, 남동생 김학성은 후에 유명한 영화 촬영기사가 되었습니다.

변사로 일하던 오빠의 소개로 나운규의 <잘 있거라>(1927)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영화계에 입문하였습니다. 토월회와 태양극단에서 활동하며 연극 무대에도 섰으며, 1937년에 가장 많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로 꼽혔을 만큼 다작 배우였습니다. 능숙한 연기를 보여주었다는 연기 평이 남아 있습니다. 1930년대 이후로는 대중가요 가수로도 활발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만주국 신징으로 건너가 스탠드바 등을 경영하며 살다가, 다시 고협에서 연극 배우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1940년대에는 당시 유행하던 악극단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미군정 시기인 1947년에 당시 신인 배우였던 '최은희'와 함께 영화 <새로운 맹서>에 출연하였습니다. 김연실은 최은희를 마음에 들어하여, 자신이 배우로 일하면서 뒷바라지를 한 동생 김학성과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성사시켰습니다. 마지막 출연작은 1949년 작품인 이규환(李圭煥) 감독의 <돌아온 어머니>입니다. 그가 감독한 <님자 업는 나루배>(임자없는 나룻배) <자세히보기>는 <아리랑>과 함께 일제시대를 대표하는 영화로 나운규를 주연으로 하여 민족적 비애의 정서를 사실주의 기법으로 그린 탁월한 영화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다방을 운영하다가 한국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좌익 언론인이었던 연인을 따라 월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냉전시기에는 김연실이 숙청되어 협동농장에서 고생하면서 월북을 후회하고 있다는 내용으로 반공주의 시각의 목격담이 대한민국에서 널리 퍼진 적도 있었으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민배우 칭호를 받은 것이 2002년에 확인되었답니다. <위키제공>


☞[나운규의 육성/00:27]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행복스러우니까요. 정희야, 오빠도 너를 쫓아가마. 어머니가신 나라로 다 같이 가자. 남에게 말하지 못할 이 사정을 네가 알고 다만 내가 알 뿐이다.>

◆[이미지/1936년 9월 7일, 잡지 <삼천리> 발행인 '김동환'씨의 주재로 인터뷰 한 기록이다.] 나운규씨의 유물이 너무 없다!! 육성도 겨우 구하였고, 그분의 필적도 간신히 구하였다. 그것도 서명이다. '羅雲奎'씨의 위 서명을 필적을 보니, '성격이 날카롱'을 엿볼 수 있었다!! 바로 그 왼쪽에 '文藝峰'씨의 서명도 보인다. 나운규 씨의 사진도 그다지 많지 않다. 특히 그분의 가족(아내 '조정옥'과 아들 사진)이 전무하다!! 이는 우리 대한민족(大桓民族)이 복원해나가야 할 민족적 숙원사업이라고 '감히' 전해드린다!! <2016.10.2/석양에)

[맺는말] 조선민족에게  '민족영화 제1호'로 평가되어지고 있는 이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 그러나, 현재 그 영화를 본 사람은 거의 생존해 있지 않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영화는 1시간 25분 짜리로, 제작과정에서부터 미스테리가 많습니다.

'그 살벌했던 일제 식민지 하에서 어떠한 경위로 이러한 반일(反日)을 주제로 한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게다가 조선인감독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가?' 또 '이러한 영화가 어떻게 검열을 통과하지 않고 캇트없이 상영될 수 있었는가?' 등등이 미스테리의 부분으로 지적될 수 있습니다. <김경원의 증언/혁명가 김산과 나운규의 부활을 꿈꾸며/사람일보-2006.9.6>

◆[이미지/'나운규, '아리랑과 사회와 나', 삼천리, 1930.7월호, p.54]. 나운규는 자신이 공부를 넉넉하게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지만, 장래에는 배우 보다는 영화제작자로 진력하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그러나...??!! <위 이미지는 '아리랑'의 한 장면이다(나운규와 신일선). <2016.10.3>



<俗言> 역사로부터 배움을 실패한 자들은 그것을 반복하는 운명에 빠져든다!! ㅡ Those who fail to learn from history are doomed to repeat it!!

[필독관련자료]

1. 1932년 무성영화 나운규 주연의 <님자업는 나룻배>(임자없는 나룻배) ㅡ 지방상연에는 왜놈의 검열로 제목을 <정춘삼>(鄭春三)으로 바꿔서 상영하다!!  <자세히보기>

사람들의 눈자위는 붉게 충혈되었고 그럴수록 극장 앞은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시장 바닥처럼 붐볐다. <아리랑>이 이처럼 인기가 있었던 것은 그 영화에 그 때의 민중들의 찌든 마음을 시원하게 해줄 만한 요소가 충분히 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리랑>은 마치 일본에 대항하여 싸우던 의열단원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듯한 통쾌감을 맛보게 했다. 그것도 비밀리에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보는 대낮에 한 것 같은 통쾌감 말이다.

나운규는 키가 작은 편이고 목이 다붙고 안짱 다리에다 뚱뚱보였지만, 목청이 좋아서 노래를 잘 불렀다. 그가 멋대로 지어낸 가사에다가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면 듣는 사람은 모두 서러워져서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다.

총독부에 들어가니 '오가다'란 놈이 내 앞에다 신문 한 장을 홱 던져 주었다. 신문을 펼쳐보니 그 전날 시사회를 보고 동아일보 학예부장 주요섭 씨가 쓴 영화평이 실려 있었다:

    '...이 영화 전편에 흐르는 민족정신은 우리를 다시금 일깨워 주고, 춘삼이의 혼에는 민족혼이 뛰놀고...'

물론 그날치 동아일보는 발매 금지를 당했고, 신문은 모두 압수를 당했다. 또 한 차례의 가위질을 당하고 나서야 단성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구경꾼들은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서둘러 영사기를 돌리자 구경꾼들의 흥분은 사그러지고 변사는 입에서 불을 뿜어대기 시작하였다. 구경꾼들은 춘삼이가 일본 순사에게 대드는 장면이 나오면 손뼉을 치며 소리를 질렀고, 춘삼이의 딸이 철다리 기사에게 강간 당하려는 장면에서는 악을 써댔다.

<2016.10.3/영화 예술에 죽고 살고 - 영화감독 이규환> (작성자 홍준호)

2.  일제강점기 금지곡 제1호 <황성옛터>는 <호수돈여학교>에서 태동되다!! <자세히보기>


◆명창 김소희 (Youtube 캡처)


[부록] [떠나가는 배 - 1988 서울올림픽 폐막식 오프닝 송] 우리의 소리 국악(國樂)을 반석에 올려놓은 명창을 꼽을 때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를 빼 놓을 수 없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소리꾼'인 김소희는 숱한 어려움을 이겨내며 국악 외길을 걸었습니다. 일상에 있어서도 반듯하고 흐트러짐 없는 삶으로 표상이 되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답니다. 만정은 <동편제>와 <서편제>를 두루 섭렵하고, 자기 소리로 승화시켜 '김소희제'라는 독창적인 영역을 창출했다는 평가도 듣고 있습니다.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 때, 이미 어두워진 운동장, 불빛 한가닥  없는 상태에서 김소희 선생이 <떠나가는 배>를 불렀습니다. 물론 <심청가>의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을 적절하게 다듬어서 부른 것이었답니다.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과의 이별을 노래하면서, 그 헤어짐의 막막함과 다시만날 기약을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판소리로 전했다는 것, 이것은 참 경이로웠답니다. 아쉽게도 필자가 확인한 그 영상이 화질이 좋지 않아서, 그 장면을 올리지 못였고, 다만 그 음악은 담아서 올리게 된 것입니다. 7분여 동안 묵상하시면서 경청해보시기 바랍니다. <2016.9.30/9월의 마지막 새벽에>

특히 1988년 서울올림픽 폐막식 때, 이미 어두워진 운동장, 불빛 한가닥  없는 상태에서 김소희 선생이 <떠나가는 배>를 불렀습니다.

◆[이미지/88서울올림픽 폐막식영상캡쳐][BGM/07:14-곡목/떠나가는 배-창/김소희] 노랫말은 다소 넘나듬이 있습니다만, 쉽게 이어지는 대목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진양조=우조> 범피중류(泛彼中流) 둥덩실 떠나간다. 망망(茫茫)한 창해(滄海)이며 탕탕(蕩蕩)한 물결이로구나. 백빈주(白頻洲) 갈매기는, 홍요안(紅寥岸)으로 날아들고, 삼강(三江)의 기러기는, 한수(漢水)로만. 돌아든다. 요량한 남은 소리, 어적(魚笛)이 여기렸만. 곡종인불견(曲終人不見)의 수봉(數峯)만 푸르렀다. 의내성중(疑乃聲中) 만고수(萬古愁)는, 날로 두고 이름이라.


☞<제2부에 게속됩니다!!>


 
<Created/20160929> <Updated/20160929><20161001><20161003><201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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